[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 나주, 쪽을 사랑하는 사람들
2024년 10월 24일(목) 00:00
지난 주말 나주로 향한 건 오로지 배나무 때문이었다. 최근 돌배나무와 콩배나무를 관찰하며, 한국에서 자생하고 재배되는 배나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배의 고장인 나주에 가 좀 더 자세히 눈으로 재배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다.

배 수확철이 지난 과수원은 한산했다. 대신 가지마다 주황색 열매를 가득 매단 감나무가 과수원의 풍요로움을 대신했다. 배 농장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서울로 가는 열차 시간까지 두어 시간이 남았을 때, 나는 농장주에게 주변에 둘러볼 데가 있는지 물었다.

“영산강 따라 가보세요. 쭉 가다 보면 천연염색박물관도 나와요.” 그는 말했다.

과거 염료식물을 그린 적이 있는 나는 그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영산강변을 따라 달렸다.

박물관에 다다르자 건물 앞에 분홍색 쪽꽃 군락이 한눈에 펼쳐졌다. 들판에 핀 꽃이 쪽인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던 것은 오 년여 전 이맘때 쪽을 관찰해 그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주변에 쪽을 재배하는 곳이 없어 생체를 구하느라 고생했는데, 그때의 고생이 무색하게도 이곳엔 쪽이 널려 있었다.

쪽은 마디풀과의 일년초로, 중국 원산의 식물이다. 이들은 천연염료로써 세계적으로 널리 재배되었다. 천연염료란 식물의 잎, 꽃, 열매, 뿌리 그리고 색깔 있는 흙과 돌, 곤충, 조개 등 자연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염료를 말한다.

서양에서는 푸른빛 색소를 만드는 식물을 통틀어 ‘인디고’라 부른다. 잎에 함유된 인디칸이라는 물질이 포도당과 인독실로 가수분해된 후 인독실이 산화되면 인디고 색소가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쪽을 가리켜 인디고라 한다. 그러나 세계에는 인디고 색을 낼 수 있는 100종 이상의 식물이 있다. 다만 인디고 성분이 많이 함유된 7종 정도만이 염색산업에 주로 활용되어 왔다.

쪽을 실제로 본 사람들은 이들 색에 의아해한다. 생체에서는 인디고의 푸른빛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남엽’이라고도 부르는 쪽의 잎은 실제로 초록색이며, 꽃은 분홍색이다.

쪽은 환원염료로, 염료가 환원제 또는 발효에 의해 환원되고 공기로 산화되어야 청색으로 발색된다. 그에 반해 치자, 울금과 같은 식물은 직접염료로, 생체에서도 염료 색이 드러난다.

일본에서는 쪽으로 염색 작업을 하는 예술가도 많고 문화도 성행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쪽 염색과 관련된 문화가 거의 사라지는 추세다. 푸른색을 얻기 위해 더 이상 쪽을 재배하거나 번거로운 염색 공정을 거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주에서 만난 쪽이 더욱 반가웠다.

나주는 쪽 재배와 염색 문화가 크게 발달한 고장이다. 그 이유는 크게 여섯 가지가 있다.

나주는 햇빛과 물이 풍부하고, 토양이 비옥해 쪽을 재배하기 좋다. 여름 장마철마다 영산강 범람 공포에 떠는 농민들에게 장마철 이전에 수확할 수 있는 쪽은 선호되는 작물이었다. 게다가 쪽 색소를 추출하여 침전시키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석회류인데, 나주는 인근 바다에서 조개나 굴 껍데기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용기 굽는 가마도 곳곳에 있어 석회를 만들기가 쉬웠다. 영산강의 물도 쪽 염색 후 잿물을 빼는 데에 좋은 조건이었다.

또한 과거 나주에서는 목화(면) 재배가 성행해 염색을 위한 염료의 수요도 증가했고, 과거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 나주는 호남의 중심지였기에 공예가 발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박물관에서 나주에 거주하는 전통공예인들의 쪽 염색 작품들을 보고 나왔을 때, 나주에 대한 나의 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토록 염료식물에 진심인 사람들이라니!

나주에는 배나무와 영산강, 나주곰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쪽도 있다. 샛골에선 쪽 염색 축제가 열리고, 쪽 재배와 공예를 이어가는 주민들의 활동도 활발하다. 나는 당분간 푸른 쪽빛의 가을 하늘을 볼 때면 나주가 떠오를 것 같다.

해가 질 무렵 열차역으로 가는 길 영산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강을 따라 낮은 집들이 있고, 논과 밭이 있고,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쪽빛도 있었다. 짙고 푸른 영산강의 물색은 그야말로 쪽빛과 같았다.

그렇게 나는 이 모든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나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식물세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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