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먹으로 되살아난 먹먹한 슬픔 ‘소년이 온다’
김호석 ‘무등의 묵, 검은 울음’전
24일까지 전남대 용지관 전시실
‘윤상원 열사’ 작품도 강렬한 울림
2024년 10월 20일(일) 19:25
‘하얀 침묵’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단팥빵 부스러기를 보며 가슴 깊이 차오르는 먹먹함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두 소년의 주검 옆에 나뒹구는 단팥빵은 현대사의 비극을 넘어 많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지요.”

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 직후 노먼 소프 기자가 촬영한 안종필과 문재학 군의 최후가 수묵으로 표현됐다. 문재학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이다.

소설 ‘소년이 온다’는 세계인이 주목하는 광주의 상흔을 그려낸 수작이다. 그 작품의 주인공 문재학의 주검 주변에 떨어져 있는 단팥빵의 부스러기는 보는 이에게 먹먹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수묵화의 거장 김호석의 ‘무등의 묵, 검은 울음’전이 오는 24일까지 전남대 용지관 기획전시실에서 진행 중이다. 작가는 이번 초대전에 대표작 8점과 신작 21점을 포함해 모두 29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무등’
지난 18일 개막한 이번 전시는 전남대 5·18연구소(소장 민병로)가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그램이다.

민병로 소장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에 담긴 광주의 아픔과 슬픔을 예술적으로 섬세하게 그렸듯이 김호석 화백 또한 5·18의 고통과 비극을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비유적인 붓질로 형상화했다”고 전했다.

김호석 화백의 광주 전시는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해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검은 먹, 한 점’전에서 작가는 6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며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최근 전시실에서 만난 김호석 작가는 “나는 5월 항쟁 작품전을 준비하면서 그것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에도 박동하는 생명 덩어리임을 느꼈다. 결코 오래 전 일, 과거라고 말할 수 없는 박동이 생생하게 전해온다”며 “광주항쟁을 기억하지 못하는 후세대에게 당시 ‘광주’의 의미를, 죽어갔던 이들의 숭고한 넋을 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작가는 문재학의 죽음을 담은 작품에 ‘마지막 입술’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슬픔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유적으로 절제하며 그렸다. 김 화백에 따르면 은유는 “뜻을 쥐어짜고 뭉쳐서 송곳처럼 그 의미를 전달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문자적 의미를 탈피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망 속에서 적어도 과거에 기초하되 과거가 아닌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김호석 작가가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문재학, 안종필 군을 모티브로 작업한 ‘마지막 입술’을 가리키고 있다.
전시장 작품들은 하나같이 강렬한 울림을 준다. 윤상원 열사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끝’이라는 작품도 보는 이에게 먹먹함을 준다.

김 작가는 “윤상원 열사를 볼 때마다 맑은 청년, 순진무구한 청년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분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며 “윤상원 열사의 주검은 마치 ‘죄 지은 자들을 대신해서 내가 대신 죽자’라는 깊은 의미가 투영돼 있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림을 그릴 당시는 매우 힘들었지만 윤상원 열사에서 보이는 말할 수 없는 천진성을 느끼기도 했다”며 “나는 열사가 죽은 것이 아니라 끝임없이 오늘의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전북 정읍 출신인 김 작가는 재료를 장악하고 연구하는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한지와 먹을 고집한다. 그는 평소 “재료를 장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아마추어 작가”라는 생각을 갖고 있을 만큼 재료적 물성에 천착한다.

그의 가계에는 동학과 의병 투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드리워져 있다. 고조부는 병오창의 당시 성명문을 낭독한 강직한 선비였으며 그로 인해 옥고를 치렀고 절명했다.

가계로부터의 영향은 자연스럽게 동학, 5·18, 6월항쟁 등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는 지난해 광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떠난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이 연대하는 것, 그것은 광주이니까 가능합니다. 정의감에서 우러나온 광주의 고귀한 정신은 영원하고, 더불어 사는 대동세상을 만들어갔습니다. 광주는 한국 민주화 역사의 보루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5·18 광주정신을 바탕으로 자연의 본질과 생명의 숭고함에 초점을 맞췄다. 검은 먹으로 형상화되고 예술로 승화된 고통은 의미를 깊이 있게 한다.

전시 큐레이팅을 맡은 김허경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는 “김호석은 현상과 본질을 표현하기 위한 회화의 원리로서 무와 유, 여백과 바람을 가로지르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으로 한국 수묵화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18일 용지관 컨벤션홀에서는 ‘평론가와 함께하는 광주정신을 묻다-김호석의 검은 울음’을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5·18연구소와 법학연구소 동아시아법센터가 주최·주관한 심포지엄에서는 모두 9명의 평론가, 미술 전문가 등이 참석했으며 발표 이후에는 김호석 작가와 박구용 철학과 교수의 대담이 펼쳐졌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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