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경혜의 호남 극장 영화사] 통금 해제 후 등장 ‘심야극장’ 80년대 소극장 전성시대 주도
<6> 1980년대 소극장을 추억하며
1981년 개정 공연법 따라 신고만으로도 극장 운영
광주 첫 소극장 ‘성도극장’…호남동에 184석 갖춰
1984년 한 해 한성·피카디리 등 15개 개관 인기 폭발
유동인구 많은 터미널·충장로·금남로 일대 성업
관람료 500~1000원 더 저렴…1980년대 총 27곳 운영
영화 관람 경로 다양해져…비디오 등 사적 영역으로 확산
2024년 08월 28일(수) 12:00
1983년 개관한 광주 최초 소극장 성도극장(동구 호남동 ‘광주세무서 징세계’ 길 건너편). <광주일보 DB>
광주의 현대사 가운데 1980년대는 특별하다. 한국영화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국영화계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은 1985년 제5차 개정 영화법에 따른 제작 자유화 바람과 1987년 제6차 개정 영화법에 따른 미국영화 직접 배급이라는 세계화 바람이었다. 이전까지 국가가 허가한 20개의 영화사만이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해당 회사들이 외국영화를 수입하도록 법률로 정한 조치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이다. 이전과 달리 새로운 영화사가 등장하면서 한국영화 제작은 활기를 보였으며, 외국영화의 수입 증가는 더 많은 상영 공간을 원했다.

양차 개정 영화법은 극장가의 변화를 추동했다. 이전까지 스크린을 한 개만 갖춘 단관(單館) 극장 체제에서 2개 이상의 스크린을 갖춘 복합관(複合館)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1989년 서울의 대표 개봉관 서울극장이 3개관을 갖추고 서울시네마타운으로 재개관했다.

광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동구 충장로 5가 아카데미극장이 1관과 2관이라는 복합관으로 바뀌었다. 1982년 9월 개관 당시 아카데미극장은 서울을 벗어난 지역에서 최초로 최신 음향 재생 장치인 돌비 스테레오 시스템(Dolby Stereo System)을 갖춘 극장으로 호평을 받은 곳이었다. 480석을 갖춘 1관과 200여 석을 보유한 2관 덕분에 관객은 아카데미극장에서 영화를 골라볼 수 있었다. 앞선 상영 기술 환경을 갖춘 덕분인지 1990년대까지 복합관 아카데미극장은 관객들로 북적였다. 현재 ‘문화예술복합공간 충장22’ 건물 맞은편에 있었다.

복합관 못지않게 극장문화의 혁신을 가져온 것은 소극장의 개관이었다. 1981년 12월 31일 개정 공연법에 따라서 객석 300석 이하 또는 객석 면적 300㎡ 이하 공연장은 설치 허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신고만으로도 극장을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형 극장을 개관할 때보다 소자본으로 극장을 운영할 수 있었고 기존의 건물을 변경하여 영화를 상영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극장은 우후죽순처럼 문을 열었다. 서울의 경우, 1982년 9월 서울 강남의 영동극장이 최초의 소극장으로 개관했는데, 이는 마침 시작된 부도심 개발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었다.

광주에서 최초로 개관한 소극장은 성도극장이었다. 1983년 4월 동구 호남동 35-3번지에서 184석을 갖추고 문을 열었다. 현재 광주세무서 징세계 길 건너편에 있었다. 성도극장의 상영 첫 작품은 버트 레이놀즈 주연의 ‘샤키 머신(Sharky’s Machine·1981)이었다.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마약반의 유능한 형사 샤키가 어느 날 마약 밀매범을 잡으려다 동료의 방해로 일을 망치게 된다. 게다가 범인을 추격하던 도중 발생한 사고 때문에 마약반에서 형사반으로 좌천을 당한다. 이후 범죄를 캐기 위해 암흑가의 보스와 한판의 승부를 다투게 된다. 소재만으로도 흥미로운 액션과 범죄 장르가 혼재된 영화였다.

성도극장이 성업을 이루자 해당 극장의 운영자는 1984년 또 다른 소극장 한성극장을 열었다. 당시 개봉관이었던 시민관 옆 건물 3층에 자리한 곳이었다. 인근 대인시장 덕분에 손님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소극장의 전성기가 도래한 것이다.

동구 금남로 5가 177-3번지에 있었던 소극장 궁전아트홀 매표소. 궁전아트홀은 1988년 9월 개관한 다모아극장의 후신이다. 매표소 위에 걸쳐진 분식집 메뉴판이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사진 촬영:위경혜>
1980년대 소극장에 대한 인기는 신설 극장 개관에 멈추지 않았다. 기존 대극장 가운데 일부가 소극장으로 재개관했기 때문이다. 금남로 5가 중앙극장이 중앙소극장으로 변했고, 양림동 파출소 앞 천변 건너편의 남도극장이 남도소극장이 되었다. 모두 1983년과 1984년 2년 동안 발생한 일이었다.

특히, 1984년 광주에 소극장이 폭발적으로 등장했다. 무려 15개의 극장이 문을 열었다. 극장의 이름을 열거하면 독자들 가운데 일부는 옛 기억을 떠올릴법한 이름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극장은 동구 대인동 로얄극장과 한성극장, 황금동 명보극장, 충장로 푸른극장과 허리우드극장, 금남로 5가 스카라극장, 호남동 피카디리극장, 북구 풍향동 대원극장, 우산동 코리아극장, 유동 명화극장 그리고 서구 남도소극장이다. 이외에 소재지가 명확하지 않지만 국도극장, 충일극장, 아성극장 그리고 평화극장 등이 있었다.

1984년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소극장의 증가 추세는 1985년에 들어서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당시 전남 광산군 광산군청 뒤에 있었던 동방극장을 비롯해 광주은행 본점 인근 삼호 빌딩의 삼호극장과 동해극장 그리고 신동아극장 세 곳만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후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1986년 6월과 9월에 각각 서울극장과 한미극장 두 곳만 선을 보였다. 다른 소극장과 비교하여 후발 주자로 등장한 한미극장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9월 한 달 동안 ‘광주일보’에 무려 13번이나 광고를 게재했다.

1980년대 서울과 같은 대도시 소극장이 부도심 또는 주거지역에 주로 등장한 것과 달리, 광주의 소극장은 터미널이라는 특정 공간을 중심으로 문을 열었다. 1976년부터 이용을 시작한 ‘광주시외버스종합터미널’(약칭 터미널) 주변으로 소극장이 몰려든 것이다. 현재 광주은행 본점과 롯데백화점 광주점이 자리한 곳이다. 터미널 주변의 소극장은 락희극장, 로얄극장, 스카라극장, 한성극장 그리고 삼호극장 등이었다. 1987년 개관한 다모아극장(이후 궁전아트홀), 라인극장 그리고 뉴코아극장까지 포함하면 터미널 주변 어디에서든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터미널이 위치한 자리는 자동차 정비를 비롯해 기계 부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몰린 곳이었다. 게다가 터미널은 숙박업소와 유흥업소의 성업을 가져오기에 최적의 사회 지리적 환경을 제공했다. 그만큼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동하는 장소였다. 1985년 당시 터미널을 이용한 승객의 숫자는 하루 평균 5만여 명에 달했다. 전남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바쁜 농번기에 4만 명으로 줄었지만, 주말 또는 관광 시즌이 되면 6만 명을 훌쩍 넘어서는 사람들이 터미널을 이용했다.

소극장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한 ‘애마부인’ 시리즈.
터미널 인근의 소극장은 당연히 버스 승차 시간을 기다리는 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했다. 하지만 재개봉관이었던 까닭에 경제적 소비 능력이 낮은 관객 예를 들어, 젊은 연인들 또는 실직자들이 빈번히 드나들었다. 그곳에서 1편의 입장료에 2편의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렴한 가격에 여러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장점이 호객의 요인이었다. 현재와 같이 영화를 동시에 개봉하여 동시에 종영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개봉관에서 신작 상영을 마친 이후에야 재개봉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던 시절의 극장가 풍경이었다.

소극장은 광주의 상권이 형성된 충장로와 금남로 일대에서도 영업을 하였다. 행정과 금융 그리고 유통업체가 몰린 광주 도심에서 영업한 소극장은 ‘충장파출소’(현재 충장치안센터) 건너편 피부과 건물 3층에 있었던 허리우드극장을 들 수 있다. 이후 해당 극장은 ‘예술극장 ADM’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외에 황금동 명보극장과 광주중앙우체국 근처 푸른극장이 소극장으로 자리하였다. 30~40대 관객이 주로 찾았던 푸른극장은 1996년 폐관되었다가 이후 코아아트홀이라는 개봉관으로 재탄생했다. 즉, 1980년대 전체를 통틀어 27개의 소극장이 문을 열고 영업을 했었다. 이들 가운데 20여 개 극장은 1990년대 초반까지 남아 있었다. 소극장의 입장료가 대규모 개봉관보다 500원에서 1000원 정도 저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이들 극장은 모두 사라졌다.

1980년대 소극장의 성업은 제5공화국이 취한 정책 변화에서 기인했다. 당대 일상생활의 가장 큰 변화는 야간통행 금지의 해제였다. 1945년부터 37년 동안 묶여 있었던 야간 활동이 1982년 1월 5일부터 풀리게 된 것이다. 연이어 발생한 영화계의 사건은 통금이 해제된 한 달 뒤에 개봉한 ‘애마부인’(정인엽, 1982)이었다. 서울극장에서만 넉 달 동안 31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다. 24시간이 자유로워진 상황에 부응하여 ‘애마부인’은 심야 상영 영화 목록에 들어갔다. 1983년 심야극장은 서울의 12개 개봉관을 비롯해 전국 대도시로 확산하였다.

심야극장의 덕택을 톡톡히 본 것이 소극장이었다. ‘애마부인’ 이후 제작된 ‘애마부인’ 시리즈의 열풍은 광주에서 성도극장을 위시한 여타 소극장으로 퍼져갔다. 당시 지역 신문 광고에서 ‘매주 토요일 심야 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를 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1980년대 영화 상영 환경의 변화는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해졌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전까지 이벤트로 느꼈던 ‘극장 구경’은 일상의 문화가 되었다. 그것은 복합관과 소극장과 같은 공적 공간으로 넘어서 사적인 영역으로 확산하였다. 보통 비디오테이프로 불린 VCR(Video Cassette Recorder)의 출현과 이를 통한 ‘비디오 영화’의 관람이었다.



위경혜 : 영상예술학 박사이자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이다. 극장을 중심으로 문화 수용의 지역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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