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돌부처에 담긴 민초들의 염원 표현하고 싶었죠”
65년 화업 김준호 ‘돌부처 드로잉’전…20~26일 갤러리 관선재
화순 운주사 돌부처·소나무 등 50여 점 화폭에…먹그림 첫 도전
2024년 08월 19일(월) 19:15
김준호 화백이 20일부터 26일까지 갤러리 관선재에서 전시를 연다.
예술이 다른 분야와 다른 점을 꼽는다면 나이와 세대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양한 직업들이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일정 나이에 도달하면 은퇴를 하게 된다.

그러나 예술가에게는 정년이 없다. 물론 스스로가 정한 ‘기한’은 있을 수는 있다. 예술가가 예술가로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현역을 꿈꾸며 창작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소설가는 죽는 날까지 작품을 쓸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배우는 무대에서 눈을 감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기도 한다. 또 어떤 화가는 붓을 들 수 있는 한 캔버스를 자신만의 색으로 채우고 싶다고 염원하기도 한다.

우리 나이로 여든 여섯인 김준호 화백. 올해로 화업 65년째인 김 화백은 여전히 붓을 들고 있다. 원로화가는 적어도 외관상으론 건강해 보이며 흐트러짐이 없다. 예술에 대한 열정, 결기가 있었기에 ‘험난한 세월’을 버텨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김 화백이 20일부터 26일까지 예술의거리 갤러리 관선재에서 ‘돌부처 드로잉전’을 연다.(개막식 20일 오후 2시) 23회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는 돌부처 30여점과 소나무 20여점 등 모두 50여 점이 출품됐다.

최근 전시를 앞두고 김 화백을 만났다. 그동안의 예술 인생, 개인전을 열기까지의 과정 등을 들었다.

전시에서는 운주사의 ‘못생긴’ 돌부처들이 다수 선보일 예정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있는데, 왜 원로작가는 주목받지 못하는 돌부처들을 주목한 것일까.

“잘 다듬어진 탁월한 조각 작품보다 평범하면서도 소박한 돌부처에 유독 눈길이 갔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잘 생긴 것, 잘 나가나는 것, 잘 만들어진 조형물에 환호를 하고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소박한 것의 이면에는 진정성이 깃들어 있지요. 꾸미지 않는 날 것이 주는 감동, 감성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서 추구하는 예술 세계가 어떠한지 다소 가늠이 되었다. ‘등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일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물이 의미있는 작업에 쓰임을 받는다는 뜻이다.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김 화백의 고향은 나주 반남면이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광주와 전남에 초기 기독교가 전파될 무렵 신앙을 받아들였다. 목포와 나주, 장흥 등지로 선교를 온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김 화백은 “이번 돌부처를 모티브로 하는 전시는 종교적 이념이나 접근이 아닌 민초들의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며 “오랜 세월 풍우에 깎이고 닳아진 부분 등을 표현할 때의 감회가 다르다”가 전했다.

그동안 작가는 남도 풍광을 모티브로 한 사실주의 서양화를 선보여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먹그림에 도전했다. 물론 김 작가는 연필 모양의 콩테나 붓펜으로 드로잉을 연마해왔다.

많고 많은 소재들 가운데 운주사 돌부처를 택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땐 화순 운주사를 찾곤 했습니다. 사찰의 많은 돌부처를 보다 화폭에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앞에 앉아 연필이랑 콩테로 밑그림을 그리는데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죠. 사진을 찍어 작업실에서 그것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구요.”

그는 젊은 시절 대장암에 걸려 큰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 건강의 중요성을 절감한 시기였다. 무등산 현장 답사를 비롯해 한라산 종주도 했다. 당시에는 방사선 치료 외에는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기에 시간이 나면 그렇게 산을 찾아 품에 안겼다.

“산을 가장 많이 찾아 사생을 한 화가가 아닐까”라는 말에서 자부심 같은 게 느껴졌다. 김 작가는 “광주에서 활동하는 화가들 중에는 금강산을 가장 먼저 다녀왔다”고도 했다. “금강산의 수려하면서도 기묘한 만물상을 그리기 위해 사전에 월출산에 올라 현장 사생을 했다”는 것은 예술에 대한 자신만의 엄정한 철칙이 있다는 것을 함의했다.

유화 작업으로 출발해 드로잉 전시회를 갖기까지는 그런 숨은 노력이 있었다. 젊은 시절 교직에 몸담았던 적도 있었다. 광주사범대학 미술과를 졸업하고 학교에서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했지만 그림에 전력하기 위해 교단을 떠났다.

그러나 예술은 오롯이 ‘빵’으로 전이되지 않았다. 저간의 어려움과 고난의 시간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 화백의 작품에서는 한국적 서정, 민중적 정한이 느껴진다. 우리 민초들이 지난 질박하면서도 간절한 염원은 기독교 철학의 토대 위에 불교적 관점 등을 두루 공부했던 작가의 예술적 열정과 맞물려 울림을 준다.

한편 지형원 문화통 발행인은 “평생을 한국적 정한에 천착해온 김준호 선생은 세상살이가 힘들 때마다 운주사를 찾아 돌부처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눴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다”며 “담묵으로 그려낸 돌부처와 석탑은 이웃집 아재처럼 포근함과 정감이 느껴진다”고 평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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