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배’ 박용철 시인을 기리는 일 - 김용하 용아 박용철 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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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장마와 예상을 불허하는 집중호우에 이어 지금은 무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극심한 자연재해는 우리의 일상 뿐아니라 인류의 귀중한 유산인 유물과 유적 등 문화재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문화재는 오랜 역사성과 그 속에 함유된 보편적 가치의 존속이 필요해 후에 재건된다고 해도 본래적 의미를 회복할 수 없기에 그 보존의 엄중함이 높다 할 것이다.
근래에 우리 주변의 문화재를 돌아보면 허술하게 관리되는 곳이 적지 않다. 우리 고장의 문화적 기념물로 지정된 많은 유적과 유물들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여러 채의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전통가옥인 용아 박용철선생의 생가도 장마철 침수가 우려된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용아(龍兒) 박용철(朴龍喆) 선생은 광주 광산구 소촌동에서 출생했고 본관은 충주이다. 1916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바로 배재학당으로 전학했다. 그러나 1920년 배재학당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 귀향했다.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문학은 아오야마학원 재학 때 사귄 김영랑과 교유하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사재로 문예잡지 ‘시문학’ 3권, 1931년에는 ‘문예월간’ 4권, 1934년에는 ‘문학’ 3권 등 도합 10권을 간행했다. ‘떠나가는 배’ 등 식민지 설움을 묘사한 시 등을 발표하며 민족문예작가로서 당시 유행하던 이데올로기적 모더니즘을 지양하고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파를 형성해 순수시 문학활동을 했다.
또한 그가 경영한 시문학사에서 1935년 같은 시문학 동인이었던 정지용의 ‘정지용시집’과 김영랑의 ‘영랑시집’을 간행했으며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해 입센 원작의 ‘인형의 집’ 등 연극공연을 위한 희곡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정지용 등 동인들의 시집과 문예지를 간행해 주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고 1938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그의 시나 작품은 많지 않지만 일제치하의 척박한 현실에서 사비를 들여가며 문예지를 간행해 우수한 문인들을 소개·후원했다. 릴케, 하이네, 괴테 등 360여편의 서구 문학작품을 번역·소개하는 역할을 한 점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공적이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시, 출판, 평론, 번역,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서정성과 문학적 감성으로 문학지 출판 등 문화발전을 도모하고 우리 말과 글을 통해 민족의 얼을 선양한 민족주의적 선구적인 활동을 전개한 용아 박용철선생을 기리고 본받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 지역에서는 시민들이, 용아 박용철기념사업회라는 사단법인을 창립해 초대 고(故) 문병란 이사장을 비롯해 제2대 최상준 이사장, 제3대 김보곤 이사장을 추대해 메세나 운동과 십시일반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이 고장의 탁월한 문화 선구자인 용아 박용철 선생을 현창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순수한 민간 활동만으로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광주시 지방문화재 13호로 지정된 용아 박용철 생가의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이나 기념관 건립 등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실정이다.
실질적으로 용아 선생의 주도와 재정지원으로 활성화된 시문학기념관이 오히려 전남의 타 지역에 이미 설치돼 있고 시문학파로 같이 활동했던 정지용, 신석정, 이하윤, 김영랑 등은 이미 그 지역에 기념관이나 문학관이 자리해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며 문화적 자부심을 드높이고 있다. 또한 관련 상품 등을 개발하고 브랜드로 활용해 일자리와 소득창출에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니 예술의 본향이니 하는 수사에 걸맞게 문화의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선구자인 용아 박용철 선생을 더 현창하는 게 필요하다. 그를 통해 광주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관광자원화 해 이 지역의 경제발전에도 일조하도록 행정기관과 시민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용아(龍兒) 박용철(朴龍喆) 선생은 광주 광산구 소촌동에서 출생했고 본관은 충주이다. 1916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바로 배재학당으로 전학했다. 그러나 1920년 배재학당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 귀향했다.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또한 그가 경영한 시문학사에서 1935년 같은 시문학 동인이었던 정지용의 ‘정지용시집’과 김영랑의 ‘영랑시집’을 간행했으며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해 입센 원작의 ‘인형의 집’ 등 연극공연을 위한 희곡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정지용 등 동인들의 시집과 문예지를 간행해 주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고 1938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그의 시나 작품은 많지 않지만 일제치하의 척박한 현실에서 사비를 들여가며 문예지를 간행해 우수한 문인들을 소개·후원했다. 릴케, 하이네, 괴테 등 360여편의 서구 문학작품을 번역·소개하는 역할을 한 점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공적이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시, 출판, 평론, 번역,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서정성과 문학적 감성으로 문학지 출판 등 문화발전을 도모하고 우리 말과 글을 통해 민족의 얼을 선양한 민족주의적 선구적인 활동을 전개한 용아 박용철선생을 기리고 본받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 지역에서는 시민들이, 용아 박용철기념사업회라는 사단법인을 창립해 초대 고(故) 문병란 이사장을 비롯해 제2대 최상준 이사장, 제3대 김보곤 이사장을 추대해 메세나 운동과 십시일반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이 고장의 탁월한 문화 선구자인 용아 박용철 선생을 현창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순수한 민간 활동만으로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광주시 지방문화재 13호로 지정된 용아 박용철 생가의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이나 기념관 건립 등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실정이다.
실질적으로 용아 선생의 주도와 재정지원으로 활성화된 시문학기념관이 오히려 전남의 타 지역에 이미 설치돼 있고 시문학파로 같이 활동했던 정지용, 신석정, 이하윤, 김영랑 등은 이미 그 지역에 기념관이나 문학관이 자리해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며 문화적 자부심을 드높이고 있다. 또한 관련 상품 등을 개발하고 브랜드로 활용해 일자리와 소득창출에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니 예술의 본향이니 하는 수사에 걸맞게 문화의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선구자인 용아 박용철 선생을 더 현창하는 게 필요하다. 그를 통해 광주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관광자원화 해 이 지역의 경제발전에도 일조하도록 행정기관과 시민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