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경혜의 호남 극장 영화사] 그 시절 단관극장, 새로운 기술과 문물의 전시장
<4> ‘벤허’와 제일극장의 70㎜ 영사기
1959년 영화 ‘벤허’ 美서 70㎜ 필름 제작
두배 커진 음향·스크린…생동감 그대로
영화산업, 새로운 기술로 전환점 맞아
한국 영화관 70㎜ 영사기 앞다퉈 설치
광주에는 ‘제일극장’이 유일
900석 정원에 관객 1800여명 몰리기도
1959년 영화 ‘벤허’ 美서 70㎜ 필름 제작
두배 커진 음향·스크린…생동감 그대로
영화산업, 새로운 기술로 전환점 맞아
한국 영화관 70㎜ 영사기 앞다퉈 설치
광주에는 ‘제일극장’이 유일
900석 정원에 관객 1800여명 몰리기도
![]() 1992년 홍콩 영화 ‘폴리스 스토리’가 상영중인 황금동 제일극장. |
1962년 6월 초순 서울 충무로 4가에 자리한 극장 2층에서 영화를 관람하던 중학생이 아래층으로 떨어져 중태에 빠진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를 당한 학생은 경주에서 서울로 수학여행을 온 180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학생들은 6월 1일 밤 기차를 타고 경주에서 출발해서 다음 날 새벽 6시 서울역 도착, 여관에서 잠깐 머물다 아침부터 견학을 다닌 터였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서울 도착 당일 비가 내리는 바람에 학생들은 예정된 박람회 관람을 취소하고 대신에 극장으로 ‘영화 구경’을 갔다. 아침 일찍부터 돌아다니느라 피곤했던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이 영화를 보던 중 졸게 되었고, 그 학생은 해상 전투를 벌이는 배들의 충돌 장면에 사용된 음향에 놀라 굴러떨어졌다. 흥미롭게도, 나머지 학생들은 낙상 사고를 한동안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고 발생 이후 어느 일간지는 안전사고에 부적합한 극장 건물을 사고 발생의 원인으로 지적하면서, 동시에 “62년은 OO의 해”라고 신문에 전면광고를 실은 해당 영화의 “과대 선전”을 문제로 삼았다. 하지만 사고 소식에도 불구하고 “62년은 OO의 해”로 불린 영화에 관한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광주에서 개봉관 극장 간판을 그리던 1932년생 K씨 역시 서울에 ‘일을 보러 간 김에’ 을지로에 숙소를 정하고 해당 영화를 관람했다. 일터가 극장이었기 때문에 평소 영화를 자주 마주한 K씨였지만 객석 2000석을 넘는 대형 극장에서 스크린을 뚫을 듯한 장면과 입체음향에 압도당했다. 관객 모두의 감각을 사로잡은 영화는 1962년 2월 1일 서울 대한극장에서 개봉한 ‘벤허 Ben-Hur’(윌리엄 와일러, 1959)였다. 1959년 11월 18일 뉴욕에서 개봉한 지 몇 달 만에 서울에 도착한 신작이었다. ‘벤허’는 미국의 메이저 영화사 MGM이 70mm 필름으로 제작한 영화인데, 필름의 비율과 해상도에 있어서 35mm 필름과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광주의 K씨는 영화만 보기 위해서 상경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일을 보러 간’ 것은 1962년 4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경복궁에서 열린 ‘5·16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약칭 박람회)’ 관람이었다. 앞서 경주의 중학생들이 서울로 수학여행을 온 것도 ‘박람회’ 관람이 주된 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람회’는 박정희 집권 1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되었으며, ‘경제 5개년 계획’과 미국의 우주 개발 그리고 한국의 원자로 모형 등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였다. ‘박람회’는 8만여 평의 대지에 세워진 150여 동의 건물에서 국내외 특산품 17만여 점을 전시한 행사였다. 관람 인원도 만만치 않아서 45일 동안 250만 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따라서 ‘제대로’ 말한다면 ‘1962년은 박람회와 ‘벤허’의 해’였다.
스펙터클을 자랑한 ‘박람회’ 못지않은 영화가 ‘벤허’였다. 기독교 수난과 성령(聖靈)의 은혜로 읽히는 종교를 앞세운 오락영화 ‘벤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즉, 예루살렘의 명문가 왕자이자 대부호 유다 벤허(Judah Ben-Hur)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이때 친구이자 로마인 메살라(Messala)가 군대 사령관이 되어 돌아온다. 그는 로마의 영광과 황제의 권력을 추종하는 사람으로 변하여 벤허에게 자신의 협력자가 되기를 요청한다. 하지만 벤허는 유대 민족의 자유와 유일신 사상을 따르는데,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사고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이 난다. 벤허는 노예로 끌려가고 그의 가족은 나병 환자가 되어서 동굴에 갇혀 지낸다. 이에 벤허는 메살라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되고, 노예선에서 다른 생명을 구하면서 노예 신분을 벗어난다. 벤허는 전차경주에 참여해서 메살라의 만행을 복수하고 마침내 나병을 치유한 모친과 여동생을 만나게 된다.
‘벤허’는 제작 당시 역대 가장 거대한 규모의 세트장에서 촬영되고 가장 많은 제작비를 투자한 영화였다. ‘벤허’의 압권은 9분 분량의 전차경주 장면이다. 살인 병기에 가까운 메살라의 마차가 다른 참가자의 바큇살을 박살내지만, 메살라의 공격을 막아내는 벤허의 마차는 문자 그대로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특히, 속도감 있는 경주마의 달리는 속도와 그에 동반된 소리는 마치 경주장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인지 ‘벤허’는 1959년도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모두 11개 부문을 휩쓸었다. 이 기록은 1997년 개봉한 ‘타이타닉 Titanic’(제임스 카메론)에 와서야 깨질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게다가 1962년 대한극장에서 개봉한 이래 서울에서만 연간 150만 명을 동원할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대한극장에서 상영한 ‘벤허’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일차적으로 극장 건물에 내건 홍보용 간판 때문이었다. 해당 영화의 개봉 이전까지 극장 간판 화가들은 주로 영화에 출연한 배우의 얼굴을 간판에 그렸다. 이에 반하여 대한극장의 간판은 말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마차경주 장면을 “통째로” 그려내고 “1962년은 벤허의 해”라는 문구를 포함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흥미롭게도 ‘벤허’의 간판을 그린 사람은 광주의 동방극장(일제강점기 제국관의 후신 및 이후 무등극장으로 개명)에서 일한 김영채였다. 1950년대 초반 그는 서울로 자리를 옮겨 대한극장에서 간판을 그렸고, ‘벤허’를 마지막으로 국제극장과 허리우드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엇보다도 ‘벤허’에 대한 주목은 70mm 필름으로 제작된 사실에서 기인했다. 70mm 영화를 상영하려면 70mm 영사기가 필요했다. 선진 기술 문화에 대한 경험은 그만한 자본의 투자를 요청했지만 모든 극장이 그것에 응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1960년대 초반 70mm 영사기를 보유한 극장은 서울의 대한극장과 스카라극장, 전주의 코리아극장과 삼남극장 그리고 광주의 제일극장에 국한되었다. 1962년 3월 각각 개관한 전주의 코리아극장과 삼남극장은 70mm 영사기를 설치하기 위하여 ‘신축 싸움’으로 불릴 정도로 규모를 견주면서 극장 건물을 지었다. 삼남극장은 영사기 설치를 위해 건축 설계를 변경했고, 코리아극장은 새로운 화면 비율과 음향 기술을 익히도록 영사기사를 일본으로 출장을 보냈다. 이들 극장의 결정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들 극장은 900~1000석을 갖췄는데, 입석까지 합하면 최소 정원의 2배까지 관객을 입장시킬 수 있었다. 관객이 몰리면 서서 관람하는 것은 물론이고 극장 무대 위까지도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 영화를 관람하던 시절이었다.
‘벤허’에 대한 인기는 광주 역시 만만치 않았다. 대한극장으로 관람 원정을 떠났던 K씨의 구술 증언에 따르면, ‘벤허’는 광주의 중앙극장에서 3개월 그리고 제일극장에서 1개월 동안 상영되었다. 70mm 영사기를 갖추지 않았음에도 중앙극장에서 오랫동안 상영된 이유는 중앙극장의 운영자이자 구월영화사 대표인 이월금 여사가 해당 필름의 상영권을 구매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화 상영은 판권(版權)에 따라서 상영순서를 정하던 때였다.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벤허’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은 제일극장이었다. 1961년 황금동 11-2번지에서 개관한 제일극장은 다른 극장과 차별적인 시각적 즐거움은 물론 쾌적한 환경의 휴게실을 갖추면서 광주시민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광주 제일극장의 ‘벤허’ 상영은 단지 한 달에 그쳤지만, 70mm 필름의 매력은 이듬해로 이어졌다. 1963년 1월 ‘캉캉 Can-Can’(월터 랑, 1960)이 2주 동안 상영되었고, 두 달 뒤인 3월 1일 ‘십계 The Ten Commandments’(세실 B. 드밀, 1956)가 개봉해서 한 달 동안 인기를 누렸다. 또한, 1964년 7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빅터 플래밍, 1939)가 2주 동안 관객을 만나면서 70mm 영화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했다. 정원 900여 석에 가까운 제일극장에 회당 최고 1700~1800여 명에 이르는 관객이 몰려든 일은 예사였다. 극장이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전시장 역할을 톡톡히 보여준 사례였다. 그것은 ‘벤허’가 개봉하던 해 열린 ‘박람회’에 전시된 신문물의 전시와 같은 맥락이었다.
*위경혜-영상예술학 박사이자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이다. 극장을 중심으로 문화 수용의 지역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 1959년 제작돼 1962년 국내 개봉된 영화 ‘벤허’ |
스펙터클을 자랑한 ‘박람회’ 못지않은 영화가 ‘벤허’였다. 기독교 수난과 성령(聖靈)의 은혜로 읽히는 종교를 앞세운 오락영화 ‘벤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즉, 예루살렘의 명문가 왕자이자 대부호 유다 벤허(Judah Ben-Hur)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이때 친구이자 로마인 메살라(Messala)가 군대 사령관이 되어 돌아온다. 그는 로마의 영광과 황제의 권력을 추종하는 사람으로 변하여 벤허에게 자신의 협력자가 되기를 요청한다. 하지만 벤허는 유대 민족의 자유와 유일신 사상을 따르는데,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사고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이 난다. 벤허는 노예로 끌려가고 그의 가족은 나병 환자가 되어서 동굴에 갇혀 지낸다. 이에 벤허는 메살라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되고, 노예선에서 다른 생명을 구하면서 노예 신분을 벗어난다. 벤허는 전차경주에 참여해서 메살라의 만행을 복수하고 마침내 나병을 치유한 모친과 여동생을 만나게 된다.
‘벤허’는 제작 당시 역대 가장 거대한 규모의 세트장에서 촬영되고 가장 많은 제작비를 투자한 영화였다. ‘벤허’의 압권은 9분 분량의 전차경주 장면이다. 살인 병기에 가까운 메살라의 마차가 다른 참가자의 바큇살을 박살내지만, 메살라의 공격을 막아내는 벤허의 마차는 문자 그대로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특히, 속도감 있는 경주마의 달리는 속도와 그에 동반된 소리는 마치 경주장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인지 ‘벤허’는 1959년도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모두 11개 부문을 휩쓸었다. 이 기록은 1997년 개봉한 ‘타이타닉 Titanic’(제임스 카메론)에 와서야 깨질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게다가 1962년 대한극장에서 개봉한 이래 서울에서만 연간 150만 명을 동원할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 1962년 경복궁에서 열린 5·16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장 가운데 경제 5개년 계획관. |
무엇보다도 ‘벤허’에 대한 주목은 70mm 필름으로 제작된 사실에서 기인했다. 70mm 영화를 상영하려면 70mm 영사기가 필요했다. 선진 기술 문화에 대한 경험은 그만한 자본의 투자를 요청했지만 모든 극장이 그것에 응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1960년대 초반 70mm 영사기를 보유한 극장은 서울의 대한극장과 스카라극장, 전주의 코리아극장과 삼남극장 그리고 광주의 제일극장에 국한되었다. 1962년 3월 각각 개관한 전주의 코리아극장과 삼남극장은 70mm 영사기를 설치하기 위하여 ‘신축 싸움’으로 불릴 정도로 규모를 견주면서 극장 건물을 지었다. 삼남극장은 영사기 설치를 위해 건축 설계를 변경했고, 코리아극장은 새로운 화면 비율과 음향 기술을 익히도록 영사기사를 일본으로 출장을 보냈다. 이들 극장의 결정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들 극장은 900~1000석을 갖췄는데, 입석까지 합하면 최소 정원의 2배까지 관객을 입장시킬 수 있었다. 관객이 몰리면 서서 관람하는 것은 물론이고 극장 무대 위까지도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 영화를 관람하던 시절이었다.
‘벤허’에 대한 인기는 광주 역시 만만치 않았다. 대한극장으로 관람 원정을 떠났던 K씨의 구술 증언에 따르면, ‘벤허’는 광주의 중앙극장에서 3개월 그리고 제일극장에서 1개월 동안 상영되었다. 70mm 영사기를 갖추지 않았음에도 중앙극장에서 오랫동안 상영된 이유는 중앙극장의 운영자이자 구월영화사 대표인 이월금 여사가 해당 필름의 상영권을 구매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화 상영은 판권(版權)에 따라서 상영순서를 정하던 때였다.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벤허’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은 제일극장이었다. 1961년 황금동 11-2번지에서 개관한 제일극장은 다른 극장과 차별적인 시각적 즐거움은 물론 쾌적한 환경의 휴게실을 갖추면서 광주시민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광주 제일극장의 ‘벤허’ 상영은 단지 한 달에 그쳤지만, 70mm 필름의 매력은 이듬해로 이어졌다. 1963년 1월 ‘캉캉 Can-Can’(월터 랑, 1960)이 2주 동안 상영되었고, 두 달 뒤인 3월 1일 ‘십계 The Ten Commandments’(세실 B. 드밀, 1956)가 개봉해서 한 달 동안 인기를 누렸다. 또한, 1964년 7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빅터 플래밍, 1939)가 2주 동안 관객을 만나면서 70mm 영화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했다. 정원 900여 석에 가까운 제일극장에 회당 최고 1700~1800여 명에 이르는 관객이 몰려든 일은 예사였다. 극장이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전시장 역할을 톡톡히 보여준 사례였다. 그것은 ‘벤허’가 개봉하던 해 열린 ‘박람회’에 전시된 신문물의 전시와 같은 맥락이었다.
*위경혜-영상예술학 박사이자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이다. 극장을 중심으로 문화 수용의 지역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