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130주년] “항일 2차 동학농민 참여자들 독립유공자 서훈돼야”
동학군 최초 승전지 정읍 황토현에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조성
전봉준 장군과 농민군 군상 조형물
신중리 대뫼마을에 위령탑
130주년 맞아 고부봉기 재현행사도
‘장흥 동학농민혁명군 묘역’
2024년 02월 26일(월) 19:35
장흥 공설 공원묘지 4묘역(장흥 동학농민혁명군 묘역)에 설치된 2020 공공미술 프로젝트 작품 ‘동학군상과 랜드마크 1894’(작품제작 꿈두레 설치미술팀). 1989년 장흥 공설운동장을 만들면서 이장한 무명 동학농민군 1699기가 모셔져 있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다. 1894년, 의로운 깃발을 들었던 동학농민혁명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지난 2020년 타계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은 인간평등을 추구하고 자주 국가를 건설하려는 용트림이었다”고 평가했다. 동학의 정신은 항일 의병과 5·18민주화운동, 촛불혁명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독립유공자 서훈 등 여러 미완의 과제가 아직 남아있다.

지난 2월 19일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예동마을 ~말목장터에서 열린 ‘고부봉기’ 재현행사.
◇1894년 2월 고부에서 혁명의 횃불 타올라

지난 19일 오전 10시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예동마을.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정읍’이라 쓰인 대형 깃발과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등 구호가 쓰인 수십 개의 깃발을 든 주민들이 집결했다.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고부봉기 재현행사이다. 주민들은 선조들처럼 예동에서 말목장터까지 1.5㎞ 구간을 행진했다. 이평면사무소 맞은편 말목장터 감나무에 도착한 전봉준·최경선·김도삼 등 (대역)지도자들은 ‘백산봉기 격문’을 낭독했다.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요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함이며,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축멸코자 함이라….”

올해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았다. 용어 역시 ‘동학란’, ‘갑오농민전쟁’ 등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뀌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2004년)과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2019년),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2023년) 등도 괄목할만한 성과다. 정읍 황토현과 장흥 석대들 등 광주, 전남·북의 동학 유적지를 직접 답사하며 동학의 의의와 미완의 과제를 살펴본다.

1894년 5월 11일 동학농민군이 첫 승전보를 전한 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조형물 ‘불멸-바람길’(작가 임영선).
◇첫 승리 거둔 황토현에 ‘기념공원’ 조성

1894년 5월 10~11일(음력 4월 6~7일)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을 격파한 황토현 일대는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2021년 완공된 기념공원 내에는 기념관과 전시관, 추모관을 비롯해 전투 당시의 자연환경을 되살린 ‘기억의 들판’, 90개 봉기지역을 보여주는 상징 조형물 ‘울림의 기둥’ 등이 다채롭게 꾸며져 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1층 로비에 들어서면 ‘말목장터 감나무’와 마주하게 된다. 고부봉기의 첫 집결지였던 말목장터에 서 있던 감나무다. 지난 2003년 9월 강타한 태풍 ‘매미’때 그만 쓰러져 버렸다. 이후 기념관에서 보존처리(방부 및 경화처리)한 후 기념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제세문을 지나 ‘정읍 황토현 전적’에 들어서면 황금색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 군상(群像)이 시선을 압도한다. 오른 손에 갓을 벗어 든 녹두장군이 두 갈래의 대오를 이룬 수백 명의 무장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힘차게 진군하는 모습을 입체와 부조로 표현한 조형물이다. 농민군 한 명 한 명 마다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다. 조형물을 지나 나지막한 구릉에 오르면 ‘갑오동학혁명 기념탑’이 우뚝 서있다.

다시 ‘사발통문’(沙鉢通文)이 작성된 고부면 신중리 대뫼마을로 향한다. 마을 동학농민혁명 홍보관 앞에는 100주년 때 건립한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산화한 무명 동학농민군을 상징하는 석조물 앞에 얼어붙은 듯 서있다 보면 금세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최후의 석대들 전투…무명 농민군 묘역 남아있어

1894년 6월 관군과 ‘전주화약’(化約)을 체결하고 해산했던 농민군은 1894년 10월 8일(음력 9월 10일) 2차 봉기를 한다.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이 7월 23일(음력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한 뒤 고종을 압박해 친일 개화정권을 출범시키는 등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농민군 2차 봉기후 동학 2대 교조 최시형은 남·북접이 손을 잡고 항일 전선에 나서라는 ‘대동원령’을 내렸다. 11월초 논산에 집결한 남·북접 농민군은 연합전선을 형성해 한양을 향해 북상을 하게 된다. 이에 일본은 동학농민군 토벌을 전담하는 700여 명 규모의 ‘후비(後備) 보병독립 19대대’를 파견한다.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 진을 친 관군·일본군과 공방전을 벌인다. 하지만 화승총과 죽창만으로 현대식 소총과 기관총을 이길 수 없었다. 농민군은 남으로 후퇴하면서 원평 구미란(12월 21일)과 태인(12월 23일)에서 전투를 벌이지만 패배한다. 12월 말~1월 초에는 전봉준·김개남·손화중·최경선·김덕명 등 주요 지도자들마저 밀고로 붙잡히고 만다.

해를 넘긴 1895년 1월 9~10일(음력 12월 14~15일), 농민군 3만여 명은 조·일 연합군과 장흥 석대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그러나 우금치와 마찬가지로 화력의 열세로 농민군은 큰 타격을 입고 남쪽으로 퇴각한다. 1월 12일(음력 12월 17일) 관산읍 남송리 옥산전투에서도 100여 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생포됐다.

특히 장흥 공설 공원묘지 4묘역은 ‘장흥 동학농민혁명군 묘역’이다. 묘역 뒷면에는 “1989년 공설 운동장을 만들면서 1699기를 이장했다”며 “현장 보존에 대한 자세한 검토를 못한 채 옮겼지만 국내 동학농민군 묘역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고 표기해 놓았다. 묘역 제단 앞에 2020년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하나로 설치된 ‘동학군상과 랜드마크 1894’(제작 꿈두레 설치미술팀)가 눈길을 끈다.

무명 농민군 묘역은 장흥 공설 공원묘지 외에도 관산읍 남송리 공동묘지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석대들에서 퇴각하던 농민군은 이곳에서 재집결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농민군 묘역은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안겨준다. 하나는 이름없는 농민군 묘소가 남아있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 또 하나는 130년의 세월동안 너무나 농민군 묘소를 방치해왔다는 생각이다. 빠른 시일내 ‘내 부모를 모시듯’ 무명의 농민군 묘역을 성역화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일본인 사진사가 촬영한 전봉준 장군. (1895년 3월 27일)
◇농민군 독립유공자 서훈 등 미완의 과제 남아=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문제는 여전히 답보상태에 놓여있다. 전봉준은 ‘공초’(심문조서)에서 농민군의 2차 봉기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갑오변란) 등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 일본에 맞서는 ‘항일’(抗日)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일본인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진을 치고 체류하는고로 우리나라 영토를 침략하려는데 있을 것으로 의심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전국 동학 관련 40개 단체는 지난 1월 12일 장흥읍 공설 공원묘지 4묘역에서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기념하는 ‘장흥 취회(집회)를 개최했다. 전국 차원의 추모행사를 갖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단체 관계자들은 (가칭)’전국동학농민혁명 연대 장흥취회‘를 창립하고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촉구했다.

박용규 ‘2차 동학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국민연대’ 상임대표·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 친일 개화파 정권을 세웠고, 8월 17일(음력 7월 17일)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조선 보호국가 정책’을 결정했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은 이러한 일본의 국권침탈에 맞서기 위한 항일투쟁이었다. 무명 동학농민군들이 묻힌 장흥 지역 묘역이 성역화 되려면 2차 동학농민 참여자들이 독립유공자 서훈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글=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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