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130주년] ‘동학 정신’과 함께 기억해야 할 무명 동학농민군들
소년 뱃사공 윤성도, 장흥서 농민군 500명을 나룻배로 피신시켜
김응문·배상옥 장군 등…전투 참여·군량 조달 이유로 처형당해
선봉에 선 ‘녹두장군’ 전봉준과 함께 각지역 대접주 활약 되새겨야
2024년 02월 26일(월) 19:05
동학연구자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는 “대접주 중심, 이름이 난 인물중심의 동학농민혁명에서 한 걸음 들어가 접주들, 즉 소두목의 역할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홍규 화백의 목판화 ‘동학농민혁명군 장흥부 7렬사도. 김학삼(관산), 구교철(웅치), 이사경(용반), 이인환(대흥), 청년장수 최동린, 여성전사 이소사, 남도장군 이방언(왼쪽부터) <박홍규 화백 제공>


“…시방이야 이렇게 당하지만 후세에 사람들이 똑바로 밝혀줄 것이여. 그거라도 믿었응께 우리가 이렇게 싸운 것이 아니것냐.”

장흥 출신 이판식 전 광주 지방국세청장이 지난 2022년 출간한 장편소설 ‘탐진강’의 일부다. ‘남도 장군’ ‘장태장군’이라는 별호로 불린 대접주 이방언이 옥중에서 아들 성호에게 하는 말이다. 이방언은 1894년 5월 27일(음력 4월 23일), 장성 황룡강을 사이에 두고 결전을 벌였던 ‘황룡강 전투’때 장태를 고안해 승리로 이끌었다. 석대들 전투 이후에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됐으나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관군과 민보군에 의해 다시 붙들려 이듬해 4월 25일(음력 3월 31일) 아들 성호와 함께 장흥 장대(장흥 서초등학교 일대)에서 처형됐다.

장흥 동학농민혁명을 주제 로 한 장편소설과 동화.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녹두장군’ 전봉준을 기억한다. 또 김개남과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을 아울러 ‘동학 5대 지도자’로 꼽는다. 그렇지만 각 지역마다 농민군을 이끄는 대접주들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붙잡혀 참형을 당한 동학 지도자들은 이름 석 자라도 남겼지만 산야에서 산화한 수 만명의 무명(無名) 농민군들은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동학연구자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는 “대접주 중심, 이름이 난 인물중심의 동학농민혁명에서 한 걸음 들어가 접주들, 즉 소두목의 역할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흥지역 동학지도자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는 이방언, 이인환, 김학삼, 이사경, 구교철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현 용산면과 대덕읍, 관산읍, 부산면, 웅치면을 각각 맡았던 대접주들이다. 또한 여성 농민군지도자 이소사와 농민군 소년장수 최동린도 만날 수 있다. 최동린은 석대들 전투 이후 퇴각하는 농민군이 관산읍 옥산에 재집결해 1895년 1월 11일(음력 12월 16일) 벌인 ‘옥산리 전투’ 과정에서 일본군의 총에 다리를 맞고 낙마해 은신하다 체포돼 나주로 압송됐다. 이대흠 시인이 지난 2018년에 장편동화 ‘열세 살 동학대장 최동린’을 낸 바 있다. 특히 소년 뱃사공 윤성도는 회진면 덕도에 숨어있던 500여명의 농민군들을 나룻배에 태워 인근 금당도·생일도·약산도 등지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전세영 작가가 동화 ‘동학을 구한 뱃사공 순생이’(2019년)로 출간했다.

동학농민혁명지도자 김응문·김효문·김자문·김여정 현창비.
■무안 김응문 일가

무안군 몽탄면 차뫼마을(다산 2리)앞 도로변에 ‘동학농민혁명지도자 김응문·김효문·김자문·김여정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김응문(본명 김창구)·효문·자문은 형제이며, 여정은 응문의 아들이다. 이들은 고막포 전투에 참가했다가 패배한 후 체포돼 1894년 12월 8일, 9일, 12일 재판 없이 처형됐다. 2022년 4월 이장 과정에서 김응문의 두개골이 발굴됐는데 동학농민혁명 사상 신원이 확인된 최초의 유골이다. 현창비 건립 추진위는 ‘조그마한 독(돌) 하나를 세우며’에 “너무나 긴 세월을 잊고 살았습니다. 128년이 지나고 나서야 당신들의 이름을 조그마한 독(돌) 하나에 새깁니다. 당신들이 염원했던 대동세상의 꿈을 우리들이 이룩하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기록했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해주 최 씨 삼의사(三義士) 실적비.
■무안 삼의사(三義士, 최장현·선현·기현)

지난 2023년 4월 무안군 해제면 석용리 석산마을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해주 최 씨 삼의사 실적비’가 세워졌다. 앞서 1973년에 건립한 ‘삼의사 실적비’를 잇는 새 중창비이다. 삼의사는 동학접주로 무안 농민군을 이끈 장남 최장현(문빈)과 선현(이현) 형제, 사촌인 기현 세분을 일컫는다. 장현의 차남(원식)이 나주 처형장까지 따라가 불더미 속에서 장현·선현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민대들’로 불리는 마을앞 간척지 들녘은 무안 동학농민군의 훈련장이었다. 비문에는 후손들의 긍지가 담겨있다. “삼의사의 죽음은 봉건제도 개혁과 나라를 위한 값진 희생이었다. 그러고도 패가망신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나 해주 최 씨 후손들은 조상들의 애국정신을 열심히 교육하였고 생활이 어려웠을 때도 일본인에게는 전답을 팔지 않았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마을에서 농악놀이 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서남부 동학농민군 지도자 배상옥 장군

무안군 청계면 청계리에 자리한 제각 ‘청천재’(淸川霽)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집강소로 활용됐던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서남부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대접주는 배상옥(규인) 장군이다. 관군은 그를 ‘호남 하도 거괴’(下道 巨魁)라고 불렀다. 동생 규찬도 동학에 함께 참여했다. 2007년 9월 무안향교와 달성 배씨 무안 도문중(都文中)이 지난 2007년 9월에 배상옥 장군 위패를 사당(청천사)에 추배(追配·추가하여 배향함)했다. 청천재 벽면에는 추배하면서 올린 ‘답통문’(答通文)이 걸려 있다.

“무릇(夫)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 회복에 관한 법률’ 7177호에 의하여 백여 년 동안 악명 받아 구천에서 맴돌았을 원혼들에게 설원(雪寃)의 시대를 맞아서 먼저 참혹하게 살상 당하신 영령에게 삼가 명복을 빌며 유족 여러분에게 깊은 위로를 드립니다….”

배상옥 장군은 1894년 12월 고막포 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 해남으로 피신했다가 주민밀고로 붙잡혀 일본군에 의해 현장에서 총살됐다.

■영호대도소 대장 김인배·수접주 유하덕

“순천 및 광양 등지의 농민군 수천 명이 섬진강을 건어 하동으로 나아간 것은 9월 1일 이었다. 이들은 머리에 누런 수건이나 하얀 수건을 두르고 제각기 총칼을 가지고 있었으며, 붉은 바탕에 ‘보국안민’이라고 쓴 큰 깃발을 휘날리면서 나팔을 불며 말을 탄 대장을 따르고 있었다. 말을 탄 대장은 영호대도소 대장인 김인배와 부대장인 류하덕 등이었다.”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1994년)을 맞아 펴낸 ‘동학농민혁명과 광주·전남’에 실려 있는 김인배(1870~1894)에 관한 묘사다. 섬진강을 건넌 농민군은 하동과 진주를 차례로 점령하고 진주에 대도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해 광양으로 퇴각한다. 1895년 1월 6일, 관군에 붙잡혀 참형을 당한 때에 불과 스물다섯 살이었다. 순천 출신 영호 수접주(首接主) 유하덕 또한 부산에서 파견된 일본군 후비보병 6연대 4중대장 스즈키 야스타미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체포돼 김인배와 함께 같은 날 처형됐다.

■남응삼(담양), 박태로(보성), 박중진(진도), 이태형(함평)

담양 출신 남응삼은 전라좌도 농민군을 총괄했던 김개남 대접주가 이끄는 농민군의 군량을 책임진 전량관(典糧官)으로 활동했다. 보성출신 박태로 접주는 당시 보성군수 유원규와 협력을 했다. 이로 인해 두 사람 모두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됐지만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하지만 전라감사 이도재에 의해 보성에서 다시 붙잡혀 처형당했다.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홈페이지에는 “전봉준의 선봉으로서 1894년 전라도 전주 점령에 참여한 뒤 전라도 보성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5년 1월 체포됨”이라고 소개돼 있다.

박중진(1848~1894)은 진도 조도출신 동학농민군 지도자이다. 1995년 7월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서 발견된 ‘동학당 수괴’(동학농민군 지도자) 두개골의 주인공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현재 유골은 1996년 한국으로 봉환돼 2019년 6월 동학농민혁명 추모공간인 전주 완산공원 녹두관에 안치됐다.

이화진(1861~1894)은 함평의 대접주이다. 2차 봉기때 일본군의 해상 상륙에 대비해 함평에 남았고, 손화중·최경선과 함께 나주성 전투에 참여했다. 동학군 해산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관군에 붙잡혀 사형 당했다. 이태형(1841~1894) 장군은 수군 동첨절제사(종4품) 신분으로 함평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나주성 공략에 나섰다가 동료 관군(이고창)의 밀고로 체포돼 처형됐다. 아들 충범은 밀고자를 추적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4대에 걸친 집안사는 2023년 5월 전용호 작가에 의해 ‘역사에 헌신한 의인가족 4대’로 출판됐다.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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