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정신대 소녀들의 “아라리요~ 아라리요~” 뭉클
광주문화재단 연극 ‘봉선화Ⅲ’ 리뷰
일본 나고야 시민연극단 협력작
강제노역 할머니들 투쟁 그려져
우리 정신 다음 세대로 계승될 것
2024년 02월 25일(일) 19:30
연극 ‘봉선화Ⅲ’이 지난 24일 빛고을시민문화관 대공연장에서 펼쳐졌다. <광주문화재단 제공>
붉은 봉선화가 스크린에 피어 오른다. 한겨울 북풍 한설을 이겨내며 꽃망울을 틔워낸 가녀린 꽃봉오리.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강제노역을 떠났던 조선 소녀들의 피멍을 보는 듯하다.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꽃말마저 유독 애달프다.

공연 중반, 일본인들이 서투른 발음으로 “아라리요, 아라리요”라고 읊조리는 곡소리가 아득히 허공으로 퍼진다. 발음의 정확성은 중요치 않다. 소녀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긴 일본이었지만, 8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일본 시민배우들이 고발하는 일제강점기 인권유린의 역사는 보는 이를 먹먹하게 했다.

지난 24일 빛고을시민문화관 대공연장에서 펼쳐진 연극 ‘봉선화Ⅲ’는 38년 동안 이어져 온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진상규명과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극화한 작품이다. 광주문화재단과 일본 나고야 시민연극단의 협력작으로, 이번 광주 공연은 해외 무대로는 첫 선을 보이는 자리였다.

“금요일 사다가와 역은 빛으로 가득합니다, 결코 잊지 않는 인간의 따뜻함이 당신에게서 전해져요.”

공연은 부드러운 노래와 함께 역사(驛舍)에 떨어진 전단지 한 장을 학생 후지 하루카(이마이 미츠코 분)가 주워들며 시작된다. 전단에는 ‘피스 아이치’라는 역사·치유 봉사팀에서 교과서 밖 역사교육을 진행한다는 내용이 써 있다. 이후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무대 위에서 생생한 역사를 보여주며, 태평양전쟁 종식 10여 년 전인 1944년 식민지 조선 탈취의 참혹한 현장을 재현한다.

극은 일본 여학교 진학을 빌미로 조선 여학생들을 ‘정신대원’으로 현혹하는 내용도 다룬다. 아버지 인감도장을 가져오라는 일본 헌병과 교장의 협박·회유에 소녀들은 눈물을 머금고 나고야 미쓰비시 중공업 도덕공장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모진 핍박과 중노동. “‘반도인’ 들은 행동이 느리다”는 감독관들의 폭언과 겁박은 여린 소녀들의 가슴에 피멍을 남긴다.

조선인 근로정신대원은 연장자라 해도 14살에 불과했다. 이들은 매실 장아찌만 먹으면서 하루하루 버텼고, 작업 중 손가락 관절이 끊어지는 비극 등을 겪었다. 작중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 역을 맡은 배우가 “일인들은 그 손가락 마디를 공기놀이하듯 주고 받으며 놀았다”는 증언을 할 때,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한숨을 삼켰다.

1944년 12월 7일 발생한 규모 8의 동남해지진의 피해 현장도 재현됐다. 이 사고로 조선인 노동자 최정례가 공장 잔해에 깔려 사망하는 등 여학생 6명이 희생됐다. 일제가 방직공장을 ‘항공기 군수시설’로 개조하며 세웠던 가벽 등이 무너지며 피해가 더 컸다.

작품 후반부는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회’의 법정 투쟁기를 다뤘다. 1100여 명의 원고가 동참한 ‘천인 소송’의 지난한 과정 등이 담겨 있어 당시 아픔의 역사가 가늠되었다. 총 22회의 구두 변론과 12회의 원고 변론 등의 과정을 극으로 톺아보는 과정이었다.

이 같은 소송에도 불구하고 인권회복을 위한 원고들의 투쟁, 변호인단의 노력은 일본 법정에서는 ‘패소’했다. 그러나 국내 판결은 2013년 광주지법에서 피고 미쓰비시중공업에 ‘배상’을 선고했으며, 지난해 12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고 판결을 내렸다.

다만 현재까지도 일본과 미쓰비시 측은 대한민국 정부와 협의한 ‘한일청구권 협정’을 근거 삼아 직접적인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은 문제의식을 환기했다.

“나고야와 광주의 바보’들의 싸움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우리의 정신이 다음 세대로 계승되고 기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연 말미에 울려 퍼진 일본인 배우들의 구호는 울림을 준다. 물론 일본 내에서 기적 같은 ‘역전 재판’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작품은 ‘나고야의 물결’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했다. 광주에서도 지난해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회장 이금주) 활동이 활발하게 진척될 정도로 ‘나비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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