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과 함께하는 영화산책]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6>종이로 만든 호랑이, 부유하는 물고기들이 남기는 선
‘절망’과 ‘환희’가 공존하는 애증어린 사랑의 그림자
‘절망’과 ‘환희’가 공존하는 애증어린 사랑의 그림자
![]() 조금 더 밝은 색을 입은 사랑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애니메이션 버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추천한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한때 스쳐 간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던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제목이다.
그때부터 브람스를 좋아했고, 그로부터 잠시나마 방에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같은 것도 흘렀다. 대표작 ‘한 달 후, 일 년 후’는 물론 시리즈의 마지막 ‘잃어버린 옆모습’까지…… 한동안 사강의 페르소나 ‘조제’가 등장하는 세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사강의 이야기들도 궁금했지만, 그런 소설을 선물한 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은 나름의 관심에서였는지 모른다. 20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적 경향이 배어나는 소설들은 위태로웠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매력적이었다. 특히 누군가를 가슴에 품고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절망하는 여인 조제를 관조적 어조로 그린 ‘한 달 후, 일 년 후’는 여운으로 남는다.
오랜 시간이 흘러 우연히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영화로 다시 만났다. 공교롭게도 작중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한 달 후, 일 년 후’다. 여주인공의 이름 마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인 것은 우연은 아닐 거다. 사강의 비극적 세계를 오마주해 아슬아슬한 사랑의 단면과 그 잔향을 그리겠다는 복선처럼 다가왔다.
작품은 한지민·남주혁 주연의 ‘조제’로 리메이크됐으며 2020년에는 타무라 코타로 감독에 의해 동명의 애니메이션 작품으로도 개봉했다. 제18회 바르셀로나 빅 아시안 섬머 필름페스티벌에서 특별 언급됐고 같은 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는 등 나름의 주목을 받았다. 현재 OTT 플랫폼 넷플릭스, 웨이브, 티빙에서 상영 중.
조제에게 세상이란 ‘호랑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갖고 있음에도 집 밖을 둘러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유모차에 탄 채 할머니와 외출을 한 어느 날, 할머니가 한눈판 사이 내리막길에서 굴러떨어지다 낯선 남자 츠네오를 만난다.
불편한 몸으로 인해 세상은 호랑이처럼 위협적일 뿐이지만 츠네오와 함께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연민과 호기심에서 시작된 둘의 관계는 점차 사랑으로 번졌다.
두 사람은 동물원에 가 진짜 호랑이를 본다. 두려움과 환상의 대상 호랑이를 직면하니 예상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몸이 불편한 조제를 겁박하며 으르렁대던 세계의 공포가 사실은 허상이라는 일종의 메타포인 것일까? 그녀의 ‘닫힌 문’을 따뜻한 마음으로 열어준 츠네오는 타의적으로 히키코모리가 됐던 조제의 어항 속에 이끼를 뚫고 쏟아지는 유일한 빛이다.
그러나 영화 속 현실은 녹록지 않다. 조제의 다리는 호전될 기미가 없었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연애가 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호랑이가 두려운 세상을 은유한 것이라면, 물고기들은 사랑의 실패를 염려하며 자신만의 어항에서 헤엄치던 조제의 폐쇄적 자아를 뜻하는 것 같다.
제목에서 ‘조제’와 ‘호랑이’, ‘물고기’를 나란히 열거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대목이다. 휠라이트는 수사법 중 은유를 세분하면서 그중 하나로 ‘병치은유(diaphor)’를 언급했다. 상호 연관성이 부족해 보이는 요소들을 병렬적으로 제시할 때, 그것들의 충돌이 외려 낯선 아름다움을 준다는 것.
호랑이와 물고기는 각각 조제의 공포, 닫힌 자아 등을 뜻하는 것 같다. 이들을 나란히 병치은유한 것은 ‘절망’과 ‘환희’가 공존하는 애증어린 사랑을 알레고리할 것임을 제목부터 암시한다.
수족관에 가고 싶어 하던 아이 같은 조제의 모습도 기억에 맴돈다. 비교적 쉽게 마주했던 호랑이와는 달리, 막상 불편한 몸을 이끌고 어렵게 찾아간 그곳은 휴관중이었다.
물고기가 조제를 표상한다면, “수족관에 방문하자”는 말은 “내밀한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두 사람은 가까워졌음에도 수족관으로 은유화된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조제는 결국 츠네오에게 진짜 조제를 보여주지 못한다. 본명이 따로 있지만 줄곧 자신을 ‘조제’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대신에 두 사람은 바다를 컨셉으로 한 구식 테마 여관에서 함께 잠을 잔다. 푸른 조명빛을 받으며 유영하는 이들의 에로스는 그런대로 낭만적이지만, 육체적 사랑만으로 지난한 현실을 넘어서기 어렵다. 그래도 이 장면은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쏟아지는 푸른 조명은 우울(blue)을 넘어서 그 자체로 아름답다.
두 사람이 닫힌 아쿠아리움에 들어갔다면 좋았겠다. 조제가 그려온 삶의 비늘 자국, 물고기의 옆선을 츠네오가 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유리문을 부수고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 해저 터널을 거닐었다면 결말은 달라졌을거다. 상처받은 한 인간의 내력을 모두 보여주겠다는 것은, 여관방에서 헐벗은 나신을 보는 것과는 궤가 다르다.
우중충한 페이소스가 싫다면 조금 더 밝은 색감을 입은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추천한다. 원작에 없는 공상과 환타지, 반인반수 인어 모티브가 조제의 감정을 환상풍으로 그린다. 원작의 감동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새롭다.
“헤어져도 친구로 남는 여자도 있지만 조제는 아니다. 조제를 만날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영화 속 명대사다. 헤어지고 그녀와 친구로 남을 수 없다는 츠네오의 말에 일순 고개를 끄덕여 본다. 작품의 피날레 이후에는 책장에 가 선물 받았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구석에 처박아두었다. 나는 이제 더는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주는 여흥이 현실에 만든, 작은 파문이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그때부터 브람스를 좋아했고, 그로부터 잠시나마 방에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같은 것도 흘렀다. 대표작 ‘한 달 후, 일 년 후’는 물론 시리즈의 마지막 ‘잃어버린 옆모습’까지…… 한동안 사강의 페르소나 ‘조제’가 등장하는 세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우연히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영화로 다시 만났다. 공교롭게도 작중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한 달 후, 일 년 후’다. 여주인공의 이름 마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인 것은 우연은 아닐 거다. 사강의 비극적 세계를 오마주해 아슬아슬한 사랑의 단면과 그 잔향을 그리겠다는 복선처럼 다가왔다.
![]() 다리가 불편한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는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의 등에 업혀 세상을 조우한다. |
그녀는 어려서부터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갖고 있음에도 집 밖을 둘러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유모차에 탄 채 할머니와 외출을 한 어느 날, 할머니가 한눈판 사이 내리막길에서 굴러떨어지다 낯선 남자 츠네오를 만난다.
불편한 몸으로 인해 세상은 호랑이처럼 위협적일 뿐이지만 츠네오와 함께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연민과 호기심에서 시작된 둘의 관계는 점차 사랑으로 번졌다.
두 사람은 동물원에 가 진짜 호랑이를 본다. 두려움과 환상의 대상 호랑이를 직면하니 예상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몸이 불편한 조제를 겁박하며 으르렁대던 세계의 공포가 사실은 허상이라는 일종의 메타포인 것일까? 그녀의 ‘닫힌 문’을 따뜻한 마음으로 열어준 츠네오는 타의적으로 히키코모리가 됐던 조제의 어항 속에 이끼를 뚫고 쏟아지는 유일한 빛이다.
그러나 영화 속 현실은 녹록지 않다. 조제의 다리는 호전될 기미가 없었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연애가 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호랑이가 두려운 세상을 은유한 것이라면, 물고기들은 사랑의 실패를 염려하며 자신만의 어항에서 헤엄치던 조제의 폐쇄적 자아를 뜻하는 것 같다.
제목에서 ‘조제’와 ‘호랑이’, ‘물고기’를 나란히 열거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대목이다. 휠라이트는 수사법 중 은유를 세분하면서 그중 하나로 ‘병치은유(diaphor)’를 언급했다. 상호 연관성이 부족해 보이는 요소들을 병렬적으로 제시할 때, 그것들의 충돌이 외려 낯선 아름다움을 준다는 것.
호랑이와 물고기는 각각 조제의 공포, 닫힌 자아 등을 뜻하는 것 같다. 이들을 나란히 병치은유한 것은 ‘절망’과 ‘환희’가 공존하는 애증어린 사랑을 알레고리할 것임을 제목부터 암시한다.
![]() 알바로 학비를 벌던 츠네오는 조제를 돕는 일을 맡으면서 그녀와 가까워진다. |
물고기가 조제를 표상한다면, “수족관에 방문하자”는 말은 “내밀한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두 사람은 가까워졌음에도 수족관으로 은유화된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조제는 결국 츠네오에게 진짜 조제를 보여주지 못한다. 본명이 따로 있지만 줄곧 자신을 ‘조제’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대신에 두 사람은 바다를 컨셉으로 한 구식 테마 여관에서 함께 잠을 잔다. 푸른 조명빛을 받으며 유영하는 이들의 에로스는 그런대로 낭만적이지만, 육체적 사랑만으로 지난한 현실을 넘어서기 어렵다. 그래도 이 장면은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쏟아지는 푸른 조명은 우울(blue)을 넘어서 그 자체로 아름답다.
두 사람이 닫힌 아쿠아리움에 들어갔다면 좋았겠다. 조제가 그려온 삶의 비늘 자국, 물고기의 옆선을 츠네오가 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유리문을 부수고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 해저 터널을 거닐었다면 결말은 달라졌을거다. 상처받은 한 인간의 내력을 모두 보여주겠다는 것은, 여관방에서 헐벗은 나신을 보는 것과는 궤가 다르다.
우중충한 페이소스가 싫다면 조금 더 밝은 색감을 입은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추천한다. 원작에 없는 공상과 환타지, 반인반수 인어 모티브가 조제의 감정을 환상풍으로 그린다. 원작의 감동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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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명대사다. 헤어지고 그녀와 친구로 남을 수 없다는 츠네오의 말에 일순 고개를 끄덕여 본다. 작품의 피날레 이후에는 책장에 가 선물 받았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구석에 처박아두었다. 나는 이제 더는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주는 여흥이 현실에 만든, 작은 파문이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