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방 나와 그림으로 소통하니 정신건강에도 좋네”
‘리블라썸 시니어 작가’ 김용선·권영용·전기배씨
대인동 독거 어르신 인생 담은 작품전…예술약방 기획
12일까지 광주 동구청 “고독사 막는 프로그램 계속돼야”
2024년 01월 09일(화) 21:00
광주 동구청 로비에서 전시회를 여는 ‘리블라썸 시니어 작가 1기’ 김용선·전기배·권용영 할아버지(왼쪽부터)
전시작 중 한장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산뜻한 푸른색 양복을 차려입은 김용선(86) 할아버지, 멋진 중절모를 쓴 권영용(75) 할아버지, 환하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인 전기배(76) 할아버지가 함께 찍힌 사진이다. 이들은 최근 ‘리블라썸 시니어 작가 1기’라는 호칭을 얻었다. 김할아버지 등은 희로애락이 담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쏟아내고, 그 감정을 다양한 색으로 표현해 낸 후 그림 위에 각자의 사진을 붙여 ‘자화상’ 작품을 완성했다.

9일 오전 광주시 동구청 로비에서 특별한 전시 ‘리블라썸 시니어 예술학교’(12일까지) 개막식이 열렸다. 이번 전시회는 대인동 쪽방촌에 거주하는 독거 어르신들의 그림과 인생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기획으로 자신만의 공간에서 단절된 삶을 살아온 어르신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소통하는 의미있는 자리다.

리블라썸 시니어 작가 1기.<㈜예술약방 제공>
‘제1회 아웃사이더 아트 페스타-빛이 드는 ‘쪽’’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지난해 9월부터 5개월간 동구 사회적경제기업 ㈜예술약방(대표 오주현)이 진행한 기획의 결과물을 공유하는 행사로 김 할아버지를 비롯해 모두 13명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어르신들은 습식 수채화 그리기, 자화상 그리기, 내 마음속 에너지 표현하기 등의 수업에 참여했고, 글쓰기를 통해 과거의 좋았던 이야기, 가족에 대한 추억들을 털어놓았다. 살아오면서 식구들에게도, 주변에도 해본 적이 없는 진솔한 이야기들이었다.

특히 ‘블라썸 시니어 1기 작가’들에겐 자화상 작업을 위한 사진 촬영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큰 미장원에 가서 머리도 하고, 멋진 옷도 입고, 카메라로 사진도 찍고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어. 호강했지. 그림 그리는 게 재미있었어. 할 일 없이 우두커니 방안에 앉아서 TV만 보는 답답한 일상에 큰 재미였지.”

군산 출신으로 젊었을 때부터 다리미, 고무신 등 안 팔아본 것이 없고 1983년 대인동 단칸방에 살며 부산공장에서 사온 태극기를 많이 팔았다는 전기배 할아버지는 “많이 배우고 풍족하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남부끄럽지 않게 떳떳하게 살아왔다”고 말했다.

“내 앞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몰랐어. 모여서 그림도 그리고 음식도 나눠 먹으며 좋은 사람들 만나니 행복했지. 말 한마디 않고 보낼 때도 있었는데 사람도 사귀고, 나들이도 가고, 그림도 그리니 정신 건강에도 좋았어. 이런 게 고독사를 막는 방법이야. 이런 프로그램은 계속돼야 해.”

사업을 하다 IMF로 부도를 맞은 후 남해안 일대 방파제 공사장에서 일했다는 권영용 할아버지는 “서로를 챙겨주고 안부도 물어주는 사람들이 생겨 좋다”며 “잘 풀린 인생은 아니지만 후회없이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오주현 예술약방 대표는 “여러 트라우마로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 어르신들을 혼자만의 공간에서 나오게 하는 게 힘들었다”며 “하지만 살아온 연륜은 감출 수 없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그림으로 여러 감정들을 표현해내셨다”고 말했다.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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