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누정-광주 <20> 휴식·사색·학문·교유·시문…옛 정신 찾아나선 여정
광주 향약 시원지 ‘부용정’, 사직공원 활터에 ‘관덕정’
무등산 자락 ‘취가정’, 김덕홍·덕령 기리는 ‘풍암정’ 등
누정에 깃든 역사·건축·학술 다양한 콘텐츠 활용 기대
2023년 12월 03일(일) 18:45
부용정
1년여에 걸친 누정 기행이 끝이 났다. 이번 시리즈는 우리 지역 누정을 찾아 나선 여정이었다. 옛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오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되새기는 기회였다. 정신과의 대면, 문화와의 대면이라는 수사를 넘어 ‘오래된 미래와의 대화’이기도 했다.

우리 역사서에는 누정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다. 삼국유사에는 636년(백제 무왕 37년) “신하들과 망해루에서 잔치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누(樓)ㆍ정(亭)ㆍ사(寺)ㆍ사(社)ㆍ역(驛)ㆍ원(院)ㆍ교량(橋梁), 명현의 사적과 문인의 제영(題詠)의 섬세하고 은미한 것까지도 두루 기록해서 비록 시대가 오래된 것이나 사경(四境)의 먼 것이라도 한번 책을 펼치면 환히 손바닥에 놓고 가리키는 것과 같으니…”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누정은 휴식과 사색, 학문, 교유, 시문의 공간을 대변한다. 가르침과 시국에 대한 담론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며 당쟁 등의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자신만의 ‘이상향’을 추구하기도 했던 선비도 있다.

가장 먼저 찾은 누정은 남구 칠석동에 자리한 부용정이었다. 부용 김문발은 만년인 1416년 지역의 인재를 기르고 향촌 규율을 위해 정자를 건립했다. 광주 향약의 시원지로서의 부용정은 누정이 여가와 휴식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풍영정
“시가(詩歌)를 읊조린다”는 의미가 담긴 풍영정(風詠亭)은 광산 출신 칠계(漆溪) 김언거 선생(1503~1584)이 벼슬을 마치고 낙향해 지은 정자다. 앞으로 영산강이 흐르고 있어 풍광이 뛰어나다. 신가지구가 개발된 후로 예전의 정취는 많이 사라졌지만 소리 없이 흘러가는 강물은 일상에 지친 마음을 다독여준다.

양과동정
양과동정은 남구 양과동에 자리한 정자다. ‘양과’라는 명칭은 ‘세종실록지리지’ 무진군조에 “예전에 속한 부곡이 둘이니 양과와 경지다”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조선후기 고의상의 ‘양과동정중수기’에 따르면 정자의 정확한 설립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삼한시대로 추정되는데 일대에서 삼한시대 토기나 삼국시대 유물 등이 출토됐다.

만귀정
만귀정(晩歸亭)은 조선 중기 무렵인 1670년 경 만귀(晩歸) 장창우가 건립했으며 호가 만귀인 것은 늦게 돌아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서구 8경 중 제 1경’으로 경내에는 만귀정 원운, 팔경, 중건상량문, 중건기, 중수기 등 다양한 시문의 현판이 걸려 있다.

사직공원 내 궁도장에 있는 사정(射亭)인 관덕정(觀德亭)은 활터에 세운 정자다. 문헌에 따르면 조선시대 중기 광주에는 사장(射場·활쏘기 장)이 있었다. 1895년 ‘광주읍지’ 지도에는 동오층석탑 옆에 사정(射亭)이 표기돼 있었다. 현재의 관덕정은 1961년 현재의 자리에 문을 연 후 광주 활터의 중심지로 맥을 이어왔다.

문인들 교유의 공간이자 일제 강점기 소년운동의 태동지인 양파정은 광주 이름난 부자 정낙교가 1914년 건립했다. 고려후기 광주천에 있던 석서정의 옛터에 자리한다. 전국한시대회 계기로 양파정 사단이 형성되기도 했으며 아동문학가·시인 김태오가 소년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취가정
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취가정(醉歌亭)은 ‘취하여 노래하다’라는 뜻이 담긴 정자다. 무등산 아래 충효동 환벽리에 위치한 곳으로 김덕령이 어린시절 보냈던 성장지다. 후손 김만식과 문족들이 1890년 창건했으나 6·25때 병화로 1955년 후손 김희준이 재건했다.

‘푸르름 사방에 두른’ 정자라는 뜻을 담은 환벽당(環碧堂)은 사촌 김윤제가 고향 충효동 무등산 자락에 건립했다. 김윤제는 충장공 김덕령 종조부이자 김성원·정철의 스승이다. 정철·임억령·김인후·백광훈 등이 교류를 했던 곳으로 식영정, 소쇄원과 함께 ‘일동삼승’으로 알려져 있다.

풍암정(楓岩亭)은 김덕보가 두 형인 김덕홍과 김덕령을 기리기 위해 원효계곡에 지은 정자다. 큰형 김덕홍은 임진왜란 때 전사했으며, 작은형 덕령은 옥사를 했다. 동생 덕보는 무등산 자락에 정자를 짓고 은거한다.

만취정(晩翠亭)은 구한말 대학자 만취(晩翠) 심원표가 건립한 누정이다. 일제 침략에 김준·심수택 등과 항쟁을 도모했으며 의병을 돕다 헌병대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내부에 당대 문사·학자들의 문장이 걸려있으며 정자 정원에는 수십종의 나무와 화초 등이 우거져 있다.

관수정은 조선 후기에 광산재(廣山齋) 오응석이 1690년 지었다. 조선조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나주오씨 오겸을 기리는 의미로 건립됐으며, 1941년 다시 중건했으며 1987년 개축했다.

괘고정수(掛鼓亭樹)는 광산 이씨 중조 필문 이선제가 심은 원산동 만산마을 입구 왕버들나무를 일컫는다. 왕버들나무는 수령이 600여 년으로 추정되는데 필문은 나무를 심을 당시 ‘나무가 죽으면 가문이 쇠락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전해온다. 후손들은 과거에 급제하면 북을 걸어두고 잔치를 했다.

칠송정
광산동 광곡마을 백우산 아래에 있는 칠송정(七松亭)은 고봉 기대승 장남 기효증이 1650년대 건립한 누정이다. 정면 3칸·측면 2칸 팔작지붕 형태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의곡 모아 의병 활동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호가정
호가정은 유유자적 자연과 벗하며 세상을 향해 ‘浩歌’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 중기 선비 유사가 1558년 영산강변에 건립했으며 1871년 재건했다. 당대 거유로 꼽히는 문사인 오겸, 이안눌, 김성원 등의 누정제영을 새긴 편액들을 만날 수 있다.

불환정
이밖에 조선말 학자 야은 김용훈이 관직 포기하고 ‘은일’의 삶을 지향했던 야은당(野隱堂), 아름다운 강산은 삼공의 벼슬과도 바꿀 수 없다는 뜻이 담긴 불환정(不換亭), 추운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푸른 대나무 같은 절개가 투영된 균산정(筠山亭), 매곡동 하백마을 ‘김용학 가옥’ 안에 자리한 누정 하은정(荷隱亭)이 주는 정취와 가르침, 의미 등도 둘러볼 수 있었다.

하은정
1년간에 걸쳐 둘러본 누정의 면모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채롭고 방대했다. 광주 누정 안에 깃든 역사와 문화, 건축과 학술 등은 문화유산자원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깊고 넓었다. 누정을 근거로 문화 프로그램이 활성화된다면 향후 다채로운 콘텐츠 생산과 전이 등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끝>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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