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호남 누정-광주 <13> 괘고정수
“나무가 죽으면 가문 쇠락할 것” 선조의 전설 깃들다
광산 이씨 중조 필문 이선제가 심은
원산동 만산마을 입구 왕버들나무
후손들 과거 급제하면 나무에 북을 걸고 축하연
정여립모반사건 때 이선제의 5대손 이발 연루
그의 일족이 죽음을 당하면서 나무도 말라죽어
이후 이발의 억울함 밝혀지자 다시 새 잎 돋아
광산 이씨 중조 필문 이선제가 심은
원산동 만산마을 입구 왕버들나무
후손들 과거 급제하면 나무에 북을 걸고 축하연
정여립모반사건 때 이선제의 5대손 이발 연루
그의 일족이 죽음을 당하면서 나무도 말라죽어
이후 이발의 억울함 밝혀지자 다시 새 잎 돋아
![]() 광주시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입구에 있는 왕버들나무인 ‘괘고정수’는 조선시대 대학자 필문 이선제가 심은 것으로 전해온다. |
가을이 소리없이 깊어가고 있다. 매번 그렇다. 가을은 그저 사뿐히 왔다 가버린다. 가고 난 뒤에 비로소 가을의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올해도 그러할 것이다. 가을을 느끼려나 싶으면 가뭇없이 꼬리를 감추고 사라져버린 뒤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시인은 “계절이 지나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라고 읊었다. 일제 강점기 아픔의 시대를 순수한 영혼의 시인은 그렇게 별을 헤며 노래했다.
오늘의 시대 “가을속의 별들을” 셀 시인이 있을까 싶다. 더욱이 아파트 숲과 고층 빌딩으로 뒤덮인 도심에서 말이다. 그러나 한번쯤 가을 하늘을 보자. 혹여 가을이 지나는 길목에서 빛나는 별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별은 여전히 밤하늘 깊은 곳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고 사라진 것으로 착각했을지 모른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이 있다. 고흐가 정신요양원에 입원한 후 그린 작품 가운데 하나다. 격렬하게 빛을 발하는 별들이 사뭇 인상적이다. 일렁이는 불꽃같은 나무가 하늘의 별들과 교신을 하는 듯하다. 별들은 고흐의 내면에 잠재된 감정이 투사된 것으로 보인다.
가을은 나무와 별의 계절이다. 그 누정을 찾아가면서, 아니 정확히는 그 노거수를 찾아가면서 가을과 나무와 별을 생각했다. 이번 누정 주인공은 괘고정(광주시 기념물 제24호)으로 불리는 왕버들나무다. 광주시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입구에 서있는 나무가 이번 누정의 목적지다.
노거수가 어찌하여 정(亭)이 되었을까. 실존하는 건물이 정자일 텐데 고목을 누정이라 칭한 것은 필경 그만한 연유가 있을 거였다. 특히 괘고(掛鼓)라는 말에는 ‘나뭇가지에 북이나 장구를 건다’는 뜻이 담겨 있다. 왕버들나무는 광산 이씨 중조인 필문(畢文) 이선제(1389~1454)가 심었다 전해온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괘고정이 있는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여 있어 만산(萬山)이라 불린다. 바야흐로 때는 15세기 초로 거슬러간다. 이선제는 만산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1419년 과거에 급제했고 이후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고려사’와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강원도 관찰사를 비롯해 예문관 제학 등을 역임한 대학자다.
특히 그의 지역에 대한 사랑은 극진하였다. 1451년 고향 원로들과 무진군으로 강등돼 있던 광주를 광주목(光州牧)으로 복원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또한 향품 진작과 인재양성을 위해 향약을 확대하는데도 앞장섰다.
왕버들나무는 수령이 600여 년으로 추정된다. 이선제는 나무를 심을 당시 ‘나무가 죽으면 가문이 쇠락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전해온다. 후손들은 과거에 급제하면 북을 걸어두고 잔치를 했다. 이선제의 후손들은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과거에 합격했다. 그러나 5대손인 이발(1544~1589)이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된다.
시대를 떠나 ‘이념’은 더러 생사를 건 싸움을 촉발한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이 대동계를 토대로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으로 시작됐다. 결과는 참혹하고 가혹했다. 1000여명의 동인들이 유배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당쟁에 따른 권력투쟁의 다툼인 것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진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나무에도 신령한 기운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선제의 5대손 이발이 연루돼 멸문지화를 당하자, 마을의 왕버들나무도 말라죽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났다. 이발의 신원이 회복되면서 나무가 살아났다 한다. 잎이 돋고 생기가 돌았다.
가까이서 보니 나무는 규모가 큰 누정과 같은 형상이다. 정자의 지붕이 나무를 덧씌운 모습을 닮았다. 여름이면 큰 그늘을 만들어 오가는 이들에게 쉼을 준다. 봄이면 새순을 틔워 활기를 전하고 가을이면 낙화와 낙엽의 시간을 일깨운다. 겨울이면 떠남과 비움의 미학을 사유하게 한다.
남광주오거리에서 산수오거리를 지나 서방사거리에 이르는 ‘필문로’는 이선재의 호 필문에서 따왔다. 2009년에는 ‘필문대로’로 고시해 필문의 학덕을 추모해오고 있다.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를 곧잘 꽃과 식물에 빗댄다.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시들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환이 한해에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이보다 순환과 시간의 흐름을 확장해 사유를 정치하게 견인해주는 대상이 있다면 나무를 꼽을 수 있다.
시인이자 언론인인 고두현은 ‘나무 심는 CEO’(더숲, 2022)에서 이렇게 나무를 예찬한다. “나뭇가지는 하늘을 향한 고성능 안테나다. 두 팔을 힘껏 벌리고 섬세한 촉수로 지혜의 빛을 잡아낸다. 광합성 과정에서 새로운 영감을 포착하면 푸른 잎사귀를 차르르 흔든다. 그럴 때 나무의 두 발은 더 깊은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다. 대지에 발을 딛고 서서 우주로 팔을 벌린 형상이 나무(木)다. 그 밑둥에 한 일(一) 자를 받치면 세상의 근본(本)이 된다. 나무는 이렇게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상과 천상을 연결한다.”
이선제 사후 포충사 뒤쪽 산기슭에 부조묘와 신도비가 세워졌다. 괘고정이 있는 곳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부조묘와 신도비를 볼 수 있다.
천득염 한국학호남진흥원장은 “부조묘란 왕의 허락으로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이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한 사당이며, 신도비는 정2품 이상의 공적과 학덕이 높아 후대에 사표가 될 만한 이의 묘 앞에 세운 비”라며 “광주의 주요 도로 명칭이 ‘필문대로’인 것만 봐도 이선제의 지고한 위치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필문 선생 사후에는 그의 행적을 적은 묘지(墓誌·국가지정 보물 제 1993호)가 함께 묻혔다. 묘지란 죽은 이의 업적을 새긴 도판을 일컫는다. 그러나 묘지(墓誌)는 지난 1998년 6월 국내 문화재밀매단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그러다 2014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노력으로 묘지의 소재가 알려졌다. 불법 반출유물 사실을 모르고 구입했던 일본인 소장자와 재단의 면담이 이루어졌고, 2016년 소장자가 사망한 후 고인의 유지에 따라 2017년 9월 유족이 기증했다. 묘지는 지난 2018년 광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괘고정이 품은 이야기는 그렇게 세월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다. 광주 남구에서는 조선의 과거급제 행렬을 재현한 ‘괘고정수 축제’을 열고 있다. 지난 2005년부터 남구문화원이 이선제 부조묘 일대에서 우리 것에 대한 창조적 계승이라는 취지에서 진행해오고 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시인은 “계절이 지나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라고 읊었다. 일제 강점기 아픔의 시대를 순수한 영혼의 시인은 그렇게 별을 헤며 노래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이 있다. 고흐가 정신요양원에 입원한 후 그린 작품 가운데 하나다. 격렬하게 빛을 발하는 별들이 사뭇 인상적이다. 일렁이는 불꽃같은 나무가 하늘의 별들과 교신을 하는 듯하다. 별들은 고흐의 내면에 잠재된 감정이 투사된 것으로 보인다.
![]() ‘괘고정수’ 표지석 |
노거수가 어찌하여 정(亭)이 되었을까. 실존하는 건물이 정자일 텐데 고목을 누정이라 칭한 것은 필경 그만한 연유가 있을 거였다. 특히 괘고(掛鼓)라는 말에는 ‘나뭇가지에 북이나 장구를 건다’는 뜻이 담겨 있다. 왕버들나무는 광산 이씨 중조인 필문(畢文) 이선제(1389~1454)가 심었다 전해온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괘고정이 있는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여 있어 만산(萬山)이라 불린다. 바야흐로 때는 15세기 초로 거슬러간다. 이선제는 만산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1419년 과거에 급제했고 이후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고려사’와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강원도 관찰사를 비롯해 예문관 제학 등을 역임한 대학자다.
특히 그의 지역에 대한 사랑은 극진하였다. 1451년 고향 원로들과 무진군으로 강등돼 있던 광주를 광주목(光州牧)으로 복원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또한 향품 진작과 인재양성을 위해 향약을 확대하는데도 앞장섰다.
왕버들나무는 수령이 600여 년으로 추정된다. 이선제는 나무를 심을 당시 ‘나무가 죽으면 가문이 쇠락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전해온다. 후손들은 과거에 급제하면 북을 걸어두고 잔치를 했다. 이선제의 후손들은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과거에 합격했다. 그러나 5대손인 이발(1544~1589)이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된다.
시대를 떠나 ‘이념’은 더러 생사를 건 싸움을 촉발한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이 대동계를 토대로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으로 시작됐다. 결과는 참혹하고 가혹했다. 1000여명의 동인들이 유배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당쟁에 따른 권력투쟁의 다툼인 것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진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 필문 이선제 부조묘. |
가까이서 보니 나무는 규모가 큰 누정과 같은 형상이다. 정자의 지붕이 나무를 덧씌운 모습을 닮았다. 여름이면 큰 그늘을 만들어 오가는 이들에게 쉼을 준다. 봄이면 새순을 틔워 활기를 전하고 가을이면 낙화와 낙엽의 시간을 일깨운다. 겨울이면 떠남과 비움의 미학을 사유하게 한다.
남광주오거리에서 산수오거리를 지나 서방사거리에 이르는 ‘필문로’는 이선재의 호 필문에서 따왔다. 2009년에는 ‘필문대로’로 고시해 필문의 학덕을 추모해오고 있다.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를 곧잘 꽃과 식물에 빗댄다.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시들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환이 한해에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이보다 순환과 시간의 흐름을 확장해 사유를 정치하게 견인해주는 대상이 있다면 나무를 꼽을 수 있다.
시인이자 언론인인 고두현은 ‘나무 심는 CEO’(더숲, 2022)에서 이렇게 나무를 예찬한다. “나뭇가지는 하늘을 향한 고성능 안테나다. 두 팔을 힘껏 벌리고 섬세한 촉수로 지혜의 빛을 잡아낸다. 광합성 과정에서 새로운 영감을 포착하면 푸른 잎사귀를 차르르 흔든다. 그럴 때 나무의 두 발은 더 깊은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다. 대지에 발을 딛고 서서 우주로 팔을 벌린 형상이 나무(木)다. 그 밑둥에 한 일(一) 자를 받치면 세상의 근본(本)이 된다. 나무는 이렇게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상과 천상을 연결한다.”
![]() ‘필문 이선제 묘지’(墓誌). |
천득염 한국학호남진흥원장은 “부조묘란 왕의 허락으로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이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한 사당이며, 신도비는 정2품 이상의 공적과 학덕이 높아 후대에 사표가 될 만한 이의 묘 앞에 세운 비”라며 “광주의 주요 도로 명칭이 ‘필문대로’인 것만 봐도 이선제의 지고한 위치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필문 선생 사후에는 그의 행적을 적은 묘지(墓誌·국가지정 보물 제 1993호)가 함께 묻혔다. 묘지란 죽은 이의 업적을 새긴 도판을 일컫는다. 그러나 묘지(墓誌)는 지난 1998년 6월 국내 문화재밀매단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그러다 2014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노력으로 묘지의 소재가 알려졌다. 불법 반출유물 사실을 모르고 구입했던 일본인 소장자와 재단의 면담이 이루어졌고, 2016년 소장자가 사망한 후 고인의 유지에 따라 2017년 9월 유족이 기증했다. 묘지는 지난 2018년 광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괘고정이 품은 이야기는 그렇게 세월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다. 광주 남구에서는 조선의 과거급제 행렬을 재현한 ‘괘고정수 축제’을 열고 있다. 지난 2005년부터 남구문화원이 이선제 부조묘 일대에서 우리 것에 대한 창조적 계승이라는 취지에서 진행해오고 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