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 만나게 되는…- 이 동 순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2023년 09월 20일(수) 22:00
하얀 옥양목에 쪽빛 물감 스며들듯 소리 없이 조용히 번지더니 이제는 온통 파랗게 물들었다. 한동안 사람들 마음 들썩여 명산을 오르던 등산이 걷기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걷기나 등산이나 걷는다는 것은 같으나 체력 소모가 많고 건강해야 가능한 등산에 비하여 체력과 건강에 자신이 없더라도 누구나 집을 나서기만 하면 되는 것이 걷기다.

걷기가 파랗게 물든 것은 제주도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 생기면서다. 입소문을 타고 육지와 산등성이를 넘나들더니 하나둘 그 길에 선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고 걷기 물들임이 시작되었다. 거기에다 특별한 장비 없이 들숨과 날숨으로 나서기만 하면 되는 것이어서 경제적인 부담이 없다는 점도 걷기 물들임에 가세했다. 건강과 여행을 동시에 챙기려는 사람들이 함께 또 혼자서 길 위의 순례자로 나서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광주에서도 ‘빛고을 산들길 사랑모임’ 같은 단체가 자연 발생하여 둘레길을 잇고 열어서 광주를 걷고 있으니 이쯤 되면 걷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절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걷는 사람을 위해서 지역마다 동네마다 자연을 벗 삼을 수 있는 좋은 길을 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지역경제 살리기든 관광객 유치든 상관없이 길을 만드는 행정이나 그곳을 찾는 발길이나 자연과 인간의 어울림을 위한 노력이리라.

걷기를 생각하다가 도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걷지 않게 되었을까를 생각한다. 직립보행하는 인간이 두 발로 걷지 않으면 퇴화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졌을 리는 만무하고, 그렇다고 지금 두 발과 두 다리가 걷기 본연의 임무를 상실해 버린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지 않았기 때문에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결국 걸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는 뜻이겠다. 욕망의 질주와 경쟁에 빼앗겨버린 다리와 발은 자동차에 갇혀서 쉽사리 밖으로 나오지 못하다가 이제야 겨우 숨 돌릴 틈을 찾아 길을 나서게 되었으니 걷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한쪽에서는 고속도로를 확장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호수와 공원에 길을 내고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을 만들어 자연의 향기에 취하는 길을 다듬는 중이니 길을 다듬어 속도를 줄이고 멈춤으로 지친 몸과 마음에 거름을 주라고 여기저기서 이곳저곳에서 불러대는 데 가지 않을 자신이 없게 되는 것이다. 천천히 걷다가 작고 소중한 것들을 만나고 나를 만나게 되는 기쁨은 덤이니 걷지 않고는 배겨날 재간이 있겠는가.

걷기는 알 수 없는 오묘한 맛이 있다. 평평한 길을 걸을 때 찾아오는 슴슴함은 육체를 편안하게 하는 봄날 연초록 맛이 있다. 그런가 하면 굽이진 길을 돌아나갈 때 찾아오는 쓸쓸함은 가을날 노을빛 맛이고, 언덕길 오를 때 찾아오는 뜨거움은 여름날 뜨거운 햇볕 맛이다. 깔딱고개 헐떡일 땐 휘몰아치는 매운맛이다. 그 사이를 넘나드는 육체와 마음과 정신이 하나가 되었다가 둘이 되었다가 셋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 되기를 반복하는 그것, 그것이 길 위에 자기를 세우고 걷게 한다.

마음을 만나고 자신을 만나는 수행으로서 걷기를 이끈 틱낫한 스님은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뒤 걷기 명상으로 많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치유케 했다. 걷기 명상가요 수행자인 틱낫한 스님처럼 구도와 수행까지는 아니어도 길 위에 선 모든 사람은 명상가이며 자가 치유자들이다.

육체에 기대지 않고 마음에 기대지 않고 정신에도 기대지 않는 육체와 마음과 정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삼위일체의 맛, 그 극치 뒤에 찾아오는 끝없는 평화, 그 맛을 마다할 사람은 없으리라. 걷는 길이 설령 가파른 언덕일지라도 가끔은 뒤돌아보고 가끔은 울기도 하고 또 가끔은 웃기도 하면서 인생살이 되새김질도 하다 보면 내일을 여는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길 위에 자기를 세우고 걷고 또 걷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우리가 걷는 길이 어디서는 만나고 또 어디선가에서는 갈라질 테지만 주어진 길과 걸어야 할 길을 조율하면서 아주 가끔은 너울너울 춤도 추면서 홀로라도 걷는 것일 테다. 아득한 먼 날에서 시작되었을 나와 우리의 걷기를 기억할 수 없지만 출발하였을 거기로부터 걸어온 걸음걸이를 생각하다가 뒤돌아 걸어온 길의 의미를 묻는다. 그 의미를 알 때까지 오늘도 걸을 일이다.
이 기사는 광주일보 홈페이지(www.kwangj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kwangju.co.kr/article.php?aid=1695214800758129131
프린트 시간 : 2025년 05월 10일 02:06: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