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깨 한 알의 무게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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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를 심으면서 멧비둘기와 까치 눈치를 봤다. 근데 뜻밖에 5월 우박이 쏟아져서 다시 심어야 했다.
모내기는 이앙기로 한다. 드론으로 농약하고 트랙터로 베어, 수매하면 88번 손이 간다는 쌀(米)은 상형 문자건만 벼농사는 순식간에 끝난다. 예전 어느 날, 논두렁에 앉아 벼 모가지 하나를 뽑아서 나락이 몇 개 달렸는지 무심코 헤아린 적이 있다. 대략 10분 정도 걸렸다.
옥수수도 세어보았다. 알곡이 가지런해서 보통 15분 정도 걸리는데 수학을 좀 아는 사람이면 훨씬 빨리 셀 수 있다.
촌사람이라면 감나무에 열린 감이 몇 개인지 헤아려본 일이 있을 것이다. 무료해서 또는 무심코, 지붕 위 박이나 호박을 세고, 대추나무 대추까지 세기도 한다.
참깨는 좀 시간이 걸린다. 참깨를 세다가 성질 버린 줄 알았다. 그건 할 일이 아니었다. 숫자를 떠나서 그냥 셀 수 없는 일이었다. 꼬투리 하나 헤아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난 저울을 무릎 가까이 가져왔다. 무게가 궁금했다.
첨단 과학 시대다. 우리는 경제하면 반도체나 자동차 기계 등 공산품을 떠올린다. 현재와 미래 세대의 중요한 먹거리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우린 자동차나 선박, 아파트를 진짜 먹진 않는다.
흔히 의식주 문화를 우리 삶의 척도로 친다. 과학의 발달로 옷은 목화가 아니어도 만들고, 집은 나무 없이도 지을 수 있다. 빵과 소시지도 공장에서 찍어낸다. 하지만 그 먹거리 바탕은 재배하고 기른 생명이어야만 한다. 쌀이나 밀, 소나 돼지같이 말이다.
발가벗고 살거나 하늘을 보고 잘 수는 있지만 우린 당장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그런데도 특이하게 먹거리만은 외면하고 있다. 유독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인데도 비싸다고 주머니를 여는 데 인색하다.
수십만 원의 옷을 입고 수억 원의 집에 살면서 유독 참깨 한 알의 가치에 대해서는 구두쇠가 되고 딴청을 부린다. 좀 우습다. 다들 자기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농민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주말에 시골집에 가다가 길을 멈췄다. 지난주 화순읍 삼천리에서 논콩 갈아엎기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농사만 짓던 순하디순한 이웃집 어르신이 이마에 띠를 두르고 있었다. 쌀 과잉 생산을 줄인다며 벼 대신 전략 작물을 권장해서 논에 콩을 심었단다.
고향 어르신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농촌은 비어가고 있다. 게다가 기후 변화로 농사는 더욱 힘들어졌다.
논콩은 잦은 비로 말라비틀어져 대부분 고사했다. 쭈글쭈글한 콩이나 이웃집 아저씨의 얼굴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아저씨는 그나마 읍내 사람들을 애타게 붙잡으며 하소연한다. 그들은 방금 참깨가 든 김치를 먹고 콩으로 만든 된장국을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좀체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집에서 밥 한 공기를 먹고서, 식당처럼 어머니께 천 원, 이천 원 계산하는 사람은 없다. 참깨나 콩의 무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시인은 대추 한 알에 천둥 번개 수백 개가 들어있다고 노래한다. 그 예민한 시인조차 농민들의 땀과 눈물은 헤아리지 못한다.
세상은 늘 시끄럽다. 여기저기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그들도 살겠다고 외친다.
“사용자들이여, 위정자들이여 장사꾼들이여!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기계로 보지 말고, 백성 한 명 한 명을 표로 보지 말고, 길거리 주민 한 명 한 명을 주머니 속 돈으로 보지 말라”고 난 그들 등에 대고 속삭이고 싶다. “당신들도 참깨 한 알, 농민의 눈물 한 방울, 그 가치를 저울의 무게로만 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라고.
모내기는 이앙기로 한다. 드론으로 농약하고 트랙터로 베어, 수매하면 88번 손이 간다는 쌀(米)은 상형 문자건만 벼농사는 순식간에 끝난다. 예전 어느 날, 논두렁에 앉아 벼 모가지 하나를 뽑아서 나락이 몇 개 달렸는지 무심코 헤아린 적이 있다. 대략 10분 정도 걸렸다.
촌사람이라면 감나무에 열린 감이 몇 개인지 헤아려본 일이 있을 것이다. 무료해서 또는 무심코, 지붕 위 박이나 호박을 세고, 대추나무 대추까지 세기도 한다.
참깨는 좀 시간이 걸린다. 참깨를 세다가 성질 버린 줄 알았다. 그건 할 일이 아니었다. 숫자를 떠나서 그냥 셀 수 없는 일이었다. 꼬투리 하나 헤아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난 저울을 무릎 가까이 가져왔다. 무게가 궁금했다.
흔히 의식주 문화를 우리 삶의 척도로 친다. 과학의 발달로 옷은 목화가 아니어도 만들고, 집은 나무 없이도 지을 수 있다. 빵과 소시지도 공장에서 찍어낸다. 하지만 그 먹거리 바탕은 재배하고 기른 생명이어야만 한다. 쌀이나 밀, 소나 돼지같이 말이다.
발가벗고 살거나 하늘을 보고 잘 수는 있지만 우린 당장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그런데도 특이하게 먹거리만은 외면하고 있다. 유독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인데도 비싸다고 주머니를 여는 데 인색하다.
수십만 원의 옷을 입고 수억 원의 집에 살면서 유독 참깨 한 알의 가치에 대해서는 구두쇠가 되고 딴청을 부린다. 좀 우습다. 다들 자기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농민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주말에 시골집에 가다가 길을 멈췄다. 지난주 화순읍 삼천리에서 논콩 갈아엎기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농사만 짓던 순하디순한 이웃집 어르신이 이마에 띠를 두르고 있었다. 쌀 과잉 생산을 줄인다며 벼 대신 전략 작물을 권장해서 논에 콩을 심었단다.
고향 어르신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농촌은 비어가고 있다. 게다가 기후 변화로 농사는 더욱 힘들어졌다.
논콩은 잦은 비로 말라비틀어져 대부분 고사했다. 쭈글쭈글한 콩이나 이웃집 아저씨의 얼굴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아저씨는 그나마 읍내 사람들을 애타게 붙잡으며 하소연한다. 그들은 방금 참깨가 든 김치를 먹고 콩으로 만든 된장국을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좀체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집에서 밥 한 공기를 먹고서, 식당처럼 어머니께 천 원, 이천 원 계산하는 사람은 없다. 참깨나 콩의 무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시인은 대추 한 알에 천둥 번개 수백 개가 들어있다고 노래한다. 그 예민한 시인조차 농민들의 땀과 눈물은 헤아리지 못한다.
세상은 늘 시끄럽다. 여기저기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그들도 살겠다고 외친다.
“사용자들이여, 위정자들이여 장사꾼들이여!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기계로 보지 말고, 백성 한 명 한 명을 표로 보지 말고, 길거리 주민 한 명 한 명을 주머니 속 돈으로 보지 말라”고 난 그들 등에 대고 속삭이고 싶다. “당신들도 참깨 한 알, 농민의 눈물 한 방울, 그 가치를 저울의 무게로만 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