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좋은 곳은 어디인가 -이유리 연작 소설 ‘좋은 곳에서 만나요’
2023년 08월 09일(수) 23:00
사람은 죽어서 어떻게 될까.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할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죽은 자와의 통신은 신화나 미신의 영역에서 논할 수는 있겠으나 과학적이고 합리적 사고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여겨진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음 뒤에는 산 자의 기억과 애도가 있을 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든, 어디로 가고 싶었든, 무엇이 되려고 했었든 상관없이 죽은 자는 세상에 없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그곳으로 이미 떠난 것이다.

어쩌면 그곳은 존재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죽어 없어졌을 뿐이고, 그의 육신은 화학적 방식으로 유기물이 되어 자연에 복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과학은 말하고 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없기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에 대해 자꾸 말하는 것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가질 수밖에 없는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는 그곳을 볼 수 있길 바란다.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곳에서, 떠난 자들이 평안하게 머물기를 바란다. 우리가 죽어서도 그곳으로 가길 바란다. 그를 위해서 우리는 종교를 갖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도하고, 제의를 지내고, 정성을 다하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불안해 한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곳이니까. 아마도 죽어서야 알 수 있을 테니까.

소설은 알 수 없는 그것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장르이다. 사후 세계나 죽은 자의 영혼을 이미지나 영상으로 단정하지 않고 문장으로 풀어냄으로써 독자의 사고에 여유 공간을 제공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을 상상하고 사유할 수 있다. 사람은 죽어서 어떻게 될까.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할까. 정답이 없는 세계를 갈구함은 곧 철학적 질문의 연쇄를 일으킨다.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상상과 논증은 알고 있는 세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그 무엇은 죽은 이전의 그 무엇을 바탕으로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원하는가.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에 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죽음은 삶을 부른다. 삶의 모든 순간이 죽음을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듯이.

이유리 연작 소설 ‘좋은 곳에서 만나요’는 죽음에 대한 질문에 삶의 한 걸음으로 다가가는 소설이다. ‘연작’답게 죽은 자들의 길고 짧은 관계의 연쇄를 통해 진행되는 이 소설은 우리가 빠르게 소비되는 미디어와 기계적인 뉴스 속에서 숱하게 지나쳐간 죽음 하나하나를 소환해 낸다. 죽은 자들은 현생에서 당연하게도 각자의 삶이 있었다. 누군가는 선량한 청년이었고 누군가는 말도 못 할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였다. 누군가는 사랑에 서툰 사람이었고, 누군가는 사랑에 전부를 바친 고양이(!)였다. 그리고 그들은 어쩌면 “이 세계의 개발자”에 의해 세상에 나온 인물이거나 버그거나 유저일지도 모른다.

소설은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한다. ‘오리배’의 죽은 자는 남겨진 가족의 감춰진 역사를 되짚으며 그들의 남은 삶이 안온하길 바란다. 그 안온함을 목격하고서야 좋은 곳으로 떠날 수 있다. ‘심야의 질주’의 죽은 자는 더욱 복잡하다. 그가 좋은 곳에 가리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그는 악인인데, 악인에게도 그가 추앙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통해 죽은 자는 자기 삶을 반추할 수도 있다. ‘세상의 끝’은 사랑의 끝이기도 하다. 사랑에 있어 둘의 감각은 동일할 수 없으며, 언제나 기울어져 있다. 기울어진 비탈에 선 자는 늘 속으로만 생각한다.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이렇게 둘이면 충분하다고. ‘아홉 번의 생’은 한정이 있는 삶에서 한정이 없는 사랑을 찾는 고양이의 이야기다. 그 한정 없음은 ‘영원의 소녀’에서 다시금 발견된다.

‘좋은 곳에서 만나요’는 그리하여 죽음이 아닌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아니, 죽음과 사랑을 동시에 다루는 소설일 것이다. 죽음과 사랑, 사랑과 죽음……. 둘은 결국 삶을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가 아닐까. 사랑은 삶을 지속하게 하고, 죽음은 그런 삶을 끝장낸다.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기에, 사랑과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짝지를 이룬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읽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사랑하라. 혹은 사랑하다 죽으리라. 둘 중 무엇이든, 진정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삶에 후회는 없을 것이다. 후회가 없다면, 그곳이 이 세상에서, 아니 저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리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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