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귀정 인생 만년에 돌아와 시문을 짓고 풍광을 즐기다
호남 누정-광주 <5>
광주시 ‘서구 8경 중 제 1경’
조선 중기 만귀 장창우 건립
누정 옆 ‘습향각’·‘묵암정사’
품위·역사 품은 자태가 아름다운 곳
2023년 06월 11일(일) 19:50
서구 세하동에 자리한 만귀정은 조선 중기 장창우가 건립한 정자로, 서구 8경 가운데 1경으로 꼽힐 만큼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간, 늘 그렇듯 경계는 아득하다. 시간은 금방금방 떠밀려 간다. 당도하고 나면 순간으로 다가오지만 여정은 간단치 않다.

우리네 삶도 그러할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마냥 어른이 되고 싶었다. 젊은 때는 푸른 청춘의 시절이 좋은지 모르고 지나간다. 중년의 시절은 생의 황금기라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모른 채 지나가기 일쑤다. 그러다 어느 정도 삶을 알 것도 같은데 장년에 들어서고, 또 부지불식간에 생의 만년에 이른다.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간다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요즘이다. 올해도 어느새 반환점에 당도해있으니 말이다. 한겨울에 시작한 새해는 늘 그렇지만 설렘이 반이다. 하루 이틀 지나고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출 때쯤이면, 어느새 봄이 문턱에 와 있다. 매화 향이 코끝을 간지를 새도 없이 나붓나붓 벚꽃의 잔향이 밀려와 혼미해지는 시간도 잠시, 붉은 장미가 황홀한 자태를 드리운다.

장미의 아름다움, 그 매혹의 향기를 느끼나 싶으면 초여름이 곁에 와 있다. 꽃향기에 어질하고 선연함에 눈길 한번 주었을 뿐인데 계절은 반환점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옛말이 허랑한 수사는 아닌가 보다.

오늘 목적지도 이름부터 시적이다. 서구 세하동에 자리한 만귀정(晩歸亭). ‘늦게 집으로 돌아오다’라는 뜻이 가없고 쓸쓸하다. 늘그막에 자연으로 돌아와 살고 싶은 마음을 빗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자연으로 돌아갈 존재들이다. 세상의 높고 화려한 자리에 있든, 낮고 보잘 것 없는 자리에 있든, 고관대작이든, 장삼이사든,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저마다의 집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누구도 귀(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누정은 조선 중기 무렵인 1670년 경 만귀(晩歸) 장창우가 지었다. 호가 만귀인 것은 말 그대로 늦게 돌아온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장창우의 원래 고향은 이곳이 아닌 남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왜 이곳에 그것도 만년에 둥지를 틀었을까.

이병수라는 이가 쓴 ‘만귀정중건상량문’을 보면 대략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효우당 장공은 흥성(興城)의 망족(望族)이며 돈암의 유손이다. 대방에서 광주로 이거해 일정한 정굴(定窟)이 없이 장소를 배회하는 것이 교룡(蛟龍)을 떠올리게 한다. 부모의 상을 당해 지극한 여묘살이에 짐승들이 감화해 주변을 호위했다. 동하마을에 누정을 지어 팔경(八景)과 원운(原韻)을 남기고 가업을 이었다. 산과 골짝 어디에든 그가 남긴 장구의 흔적이 있으며 시와 예를 배우던 현가의 소리 그치지 않았다.’

이밖에 고광선이 쓴 ‘만귀정중건기’에도 앞서의 ‘상량문’과 유사한 내용이 담겨 있다. 대동소이한데 공통점은 장창우의 효성이 지극하고 남원에서 광주로 이주했다는 점이다. 만년에 만귀정을 짓고 시문을 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귀정 옆에 있는 습향각.
정자가 있는 서구 동하길 10은 옛 주소로 세하동 274-1번지다. 흥미로운 점은 ‘동하’의 ‘하’와 ‘세하’의 ‘하’가 연꽃을 뜻하는 ‘荷’를 쓴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정자 주위를 에두른 연못에 연잎이 두둥실 떠 있다. 함지박을 엎어놓은 것 같기도, 커다란 동전이 부유하듯 떠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한여름 매미가 자지러지게 우는 철이면 고결이 피어오르는 연꽃의 향연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만귀정은 지난 1934년 중건을 시작해 1945년 마무리됐다. 현재의 모습인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오늘에 이르렀으며, 광주시 문화재자료 5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의 뛰어난 경관은 그러나 오롯이 만귀정만의 은전은 아니다. 품위와 역사를 그러안은 누정 옆으로 습향각(襲香閣)과 묵암정사가 연하여 있다. 두 다리를 사이에 두고 우애 좋은 형제처럼 자태를 드리운다. 만귀정을 중수한 뒤에 습향각과 묵암정사가 건립됐다 한다.

만귀정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수사가 있다. ‘서구 8경 중 제 1경’이라는 문구다.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봄이면 벚꽃이 연못가에 피고 여름이면 창포꽃이 땅에 떨어져 운치가 있어요. 가을이면 가을대로 상사화가 피어 연못가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인답니다.”

마실을 나온 마을 어르신은 일대의 풍경을 자랑했다. 무덤덤한 표정이지만 말투에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이만한 풍광을 가진 유적지가 또 있겠냐는 표정이었다. 제 1경이라는 상찬이 의례적인 말은 아닐 듯 했다. 영화 ‘꽃상여’, ‘탈선 춘향전’도 이곳에서 촬영된 걸 보면 이곳의 풍광이 고전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아우라가 있는 듯 했다.

만귀정 아래로는 두 개의 석재가 있다. 하나는 ‘취석’(醉石)이며 또 다른 하나는 ‘성석’(醒石)이다. 두 글귀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흥이 돈다. ‘취하여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술이 깬다’는 말일 터다. 풍광에 정신을 뺏겨 비몽사몽의 경지일지라도 나올 때는 정신을 추스르라는 의미다.

‘취하여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술이 깬다’는 뜻을 담은 취석(醉石·위)과 성석(醒石).
경내에는 많은 시문 현판이 걸려 있다. 한문이 짧아 무슨 내용인지 즉각 알 수 없는 것이 애석할 뿐이었다. 만귀정 원운, 팔경, 중건상량문, 중건기, 중수기 등의 내용인 듯하다.

장창우는 이곳 정자에서 여러 편의 시문을 지었다. ‘만귀정중건상량문’에 의하면 ‘팔경’과 원운을 남겼다고 전해온다. 다음은 ‘팔경’에 관한 시다.



무등산에는 밝은 달/ 황룡강에는 불 밝힌 고깃배/ 마산에는 맑은 바람 불어오고/ 극랑강 포구에는 농사 위한 배가 오가네/ 어등산의 저물녘 구름/ 송정에는 흰 눈이 밤을 밝히고/ 금성의 저녁 노을/ 들밖엔 긴 강물이 흐르네



장창우가 남긴 ‘원운’이라는 시도 절창이다. 그는 시를 매개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겠노라 노래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마음이 어리석은 이라고 낮춘다. 만귀정에서 겸손히 늙어가리라 다짐하는 이유다.

조일형 한국학호남진흥원 박사는 “‘원운’이라는 작품에는 장창우의 귀거래에 대한 의식이 담겨 있다”며 “만귀정에서 은일하며 겸손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정자 바로 옆에는 ‘만귀정시사 창립기념비’가 있다. 이곳을 근거지로 많은 문인들이 활발한 시문을 창작하고 교유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귀정에서 습향각, 묵암정사를 오가며 연방죽을 느릿느릿 돌고 나자 해가 저물고 있다. 해지는 풍경에 스산해진다. 인생 만년에 돌아갈 곳을 찾다 이곳에 눌러앉은 선비 장창우의 심회가 느껴진다. 연못은 고요하고 산들바람에 연꽃이 건 듯 흔들거린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이 불현 듯 위안을 준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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