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와 탯자리 천동마을
임의진 시인의 광주 속살 순례기 ‘언저리와 변두리’ 시즌 2-<2>
죽음 앞에서도 상냥함을 잃지 않은 ‘광주의 들불’
들불열사들 야학·극단 창단…시민군 이끌며 민중 저항 세계에 알려
“우리는 오늘 질 것이지만 내일 역사에선 반드시 이길 것이다” 큰 울림
동지애 박기순 열사와 영혼 결혼식…‘님을 위한 행진곡’ 탄생
광산구 생가 마을 주민들, 회관·경로당 부지 기부해 기념관 건립
2023년 05월 30일(화) 19:55
윤상원 열사
할머니가 사주신 빨간 일기장에 밤마다 하루 한 꼭지씩 일기를 쓰던 소년 이야기를 해보련다. 화가 하성흡은 그 소년의 일기장에 대고 이런 글을 남겼다. “소년은 할머니가 주신 일기장을 가슴에 끌어안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들판 너머 황룡강, 여름이면 수영을 하고 겨울이면 썰매를 탔다. 봄이면 산하를 물들이는 진달래꽃, 벚꽃 속에 파묻혔다. 올빼미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슬퍼지기도 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소년은 하염없이 울었다.”

1950년 광산구 신룡동 천동마을에서 3남 4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소년 윤상원. 지금의 임곡초등학교, 북성중학교를 거쳐 살레시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요한’이란 세례명을 얻었다. 눈이 녹은 어느 해 찬바람이 그치자 고향 마을 논둑에 들불이 번져 요한은 달려가 짚더미 하나 냇물에 담그고 잔불을 껐다.

정태춘·박은옥의 앨범에 실린 ‘저 들에 불을 놓아’는 윤상원 열사를 떠오르게 한다.
언젠가 가수 정태춘 선생이 담양 내 산골 집을 찾으신 때가 있었는데, 그 시절 받은 사인본 ‘92년 장마, 종로에서’란 앨범엔 소년 요한이 바라봤을 들불에 얽힌 노래가 한 곡 있다. 애정하는 노래다. 그날 한수 성님(선생을 나는 요렇게 부름), 박은옥 성수님께 벗들이랑 청하여 들었던 노래 ‘저 들에 불을 놓아’는 듣는 이로 하여금 자욱한 안개와 들불 냄새를 가득 풍기고도 남는다.

“저 들에 불을 놓아 그 연기 들판 가득히 낮은 논둑길 따라 번져 가누나. 노을도 없이 해는 서편 먼 산 너머로 기울고 흩어진 지푸라기 작은 불꽃들이 매운 연기 속에 가물가물 눈물 자꾸 흘러 내리는 저 늙은 농부의 얼굴에 떨며 흔들리는 불꽃들이 춤을 추누나. 초겨울 가랑비에 젖은 볏짚 낫으로 그러모아 마른 짚단에 성냥 그어 여기저기 불붙인다. (중략)”

엊그제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날. 박기순, 윤상원, 박용준, 박관현, 신영일, 김영철, 박효선, 일곱 개 별자리의 ‘들불 열사 합동 추모식’에 나도 쪼그려 앉아 있었다. 올해의 들불상 시상식이 뒤이어 있었는데, (사)일제강제동원 시민모임이 수상했다. 친구이자 후배 김정희 변호사가 수상자 모임의 일원이어서 뜨겁게 축하해드렸다. 들불 열사란 들불야학을 일으켜 세운 스승들이자 열사들을 가리킨다. 광천 천주교 성당과 광천 시민 주거지에서 노동자들을 모아 야학을 꾸리고, 노동자들의 실태조사를 시작한 젊은이들. 그들은 들불야학과 함께 극단 ‘광대’도 세우고, 오월 광주의 비극적 현장에서 시민군을 이끌며 탄탄한 민중 저항을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몇 해 전부터 나는 소년 요한, 그러니까 윤상원 열사의 생가 마을에 광주시와 광산구, 마을 주민들의 협조로 재원을 마련하여 짓고 있는 윤상원 기념관, 천동마을 민주 커뮤니티 센터의 준비 위원장을 맡아 그 촌락을 오갔다. 천동마을은 말이 광주이지 외진 깜깜 시골이다. 기념관 건립 사업은 부지 문제로 애태우다가 마을 주민들이 대체 부지로 써 달라며 마을회관과 경로당을 기부하여 활로를 찾았다. 그래 2층의 기념관에다 별도 마을회관을 두는 다목적 설계가 이루어졌다. 마을 공동체가 윤상원으로 꽃피는 이색적인 실험을 해볼 수도 있겠다.

소년 요한, 아니 영원한 청년 윤상원 열사의 어머니가 생가에 홀로 사시는데 주간보호센터에서 모시고 가는 날이 많아 빨래만 방에 널려있고 안 계신 날도 있다. “엄니~” 하고 한번은 인사를 드렸는데, 내 모자라고 매서운 수염 얼굴과 달리 좀 푸근하게 생긴 수염(?)의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 김순흥 선생이랑 모습이 헷갈리시는지 고갤 연신 갸우뚱거리셨다. 엄니를 세 번 부르고선 마당을 뒤돌아 나오곤 그랬다.

광주시 천동마을 윤상원 열사 생가에는 그의 어머니가 홀로 살고 있다. 생가 마을 주민들이 마을회관과 경로당을 기부, 윤상원기념관이 건립중이다. <임의진 제공>
가끔 천동마을 안골목과 얕은 뒷산을 걸어보기도 했다. 이곳에 사람 둘은 손잡고 걸을 만한 길을 내어 소년 윤상원의 순례길을 만들어도 좋겠단 생각을 가졌다. 논에 물이 가득 찬 어느 날 저 논으로 납부금을 냈을 소년 요한을 생각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소년은 이 천동마을에 오는 걸 멈칫했다. “몇 번이고 집에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납부금 때문에 가야만 했다. 광주에서 공부한답시고 농사일도 거들지 않고 돈만 가져가게 되니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조그마한 수고를 덜어드리기 위해 검소한 생활을 해야겠다.” (1967년 6월 25일)

소년 요한의 아버지 윤석동 선생은 1988년부터 2007년까지 20년 동안 매일 일기를 썼다. “오늘 저녁이 상원이 기일이다.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그때를 회상하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으나 이제 세월이 흐르니까 조금씩 나아졌다. 이제사 폭도란 누명을 씻고 명예가 회복되어가고 있다.” (1988년. 5월 28일)

아버지의 일기는 아들 요한 상원의 삶을 되돌아보고 깨달아간다. 그리고도 많은 부분 농사와 날씨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비가 오전에 조금 와서 밭 해갈에도 못미쳤다. 포도시 잎싹 해갈이나 되었을랑가 싶다. 금년 농사에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가 된다.” 농부는 평생 솔잎 먹는 송충이처럼 살아간다. 자나 깨나 농사 걱정.

천동마을에서 보았던 들불 마냥 성당의 교리실에 들불야학을 차리고, 윤상원은 이 야학의 강사 멤버가 되었다. 남들 소원하는 은행원 자리를 버리고, 부모님께 보은할 겨를도 없이 그는 서울 직장에서 내려와 스스로 광주 귀퉁이의 들불이 되었다. 강사들보다 7~8세나 더 나이가 많았고, 큰형처럼 큰오빠처럼 그의 자리는 느티나무 한그루여야 했다. 그러다 강사이자 후배인 박기순을 연탄가스로 잃게 된다. 훗날 영혼결혼식이란 진혼굿 행사로 ‘님을 위한 행진곡’이 발표되었으나 둘은 동지애의 굳건한 사랑과 결속 말고 그 이상의 연애사는 아니었다. 들불야학은 옮겨온 천동마을이 되어 사회라는 논밭에서 사람 농사를 짓는 일로 이어지게 되었다.

들불야학은 국사를 가르친 신영일 선생의 작사 작곡으로 ‘들불야학당가’를 만들어 불렀다. “너희는 새벽이다. 밝아 오른다. 너희는 새암이다. 솟아 오른다. 너희는 씨앗이다. 싹터 오른다. 너희는 불꽃이다. 퍼져나간다. 심지에 불 댕기고 앞에 나가자. 민족의 새아침이 바라보인다. 땀과 눈물 삼켜가면서 뛰어가자. 친구, 사랑하는 친구. 들불이 되어...”

노래는 되돌이표가 놓여있어 다시 부르고 또 부르며 뜨거운 눈물로 밤을 지샐만 하였다. 야학당 난로의 땔감이 떨어지면 선생들과 학생들은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기도 했다. 쌀이 떨어지고 김치도 없을 때도 있었다. 나누고 또 나누면서, 그들은 ‘한솥밥 한울삶’을 실천했다. 아무 가진 것 없이, 목숨과 의지의 심지에 불을 댕기며 살다간 짙푸른 청년들. 이런 교육 의지, 이런 공동체, 이런 진정성은 결국 오월 광주의 맹렬한 횃불로 번져 갔다.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던 녹두서점의 김상윤 선생은 윤상원의 대학 시절부터 함께했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 복학한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윤상원은 학습조의 기둥 노릇을 했어요.” 1977년 10월 윤상원과 둘이 있던 자리에 한 젊은 여자가 서점으로 들어왔는데, 리영희 교수의 저작 ‘8억인과의 대화’란 책이 있냐 물었다. “윤상원과 공범의 눈빛을 교환한 뒤 방 안에 있던 책을 가져와 그녀에게 주었지요. “꼭 큰 상을 드리는 느낌입니다.”라고 그러면서요.”

시민운동가 김상윤과 역사교사 정현애 부부의 처음 만난 날의 풍경에도 윤상원이 함께 있었다. 사랑과 저항, 사랑과 혁명은 당연한 한몸이고 한 줄기가 아니런가. 윤상원은 들불야학과 녹두서점, 노동계와 대학가, 지식인 집단과 시국인식을 오가면서 고뇌하고 응전하였다. 계엄군의 학살에 즈음해선 야학의 분필 대신 카빈총을 번쩍 들었다. 마치 의사였던 체 게바라가 청진기 대신 총을 높이 들고 민중해방의 선봉이 되었듯 말이다. 오월 광주의 무장 시민군 대변인으로, 그리고 최후 항전의 전사가 되어 불꽃처럼 타올랐다. 외신 기자들 앞에 총을 든 시민군 대변인으로 나타난 윤상원은 “오늘 우리는 질 것이지만 내일 역사에선 반드시 이길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미국의 볼티모어 선지의 기자 브래들리 마틴은 그날의 윤상원을 다음처럼 기억했다. “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회견실 탁자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청년은 곧 죽겠구나 예감했다. 강한 인상이라면 그의 (이글거리는) 두 눈이었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예수의 열두제자 가운데 사도 요한은 가장 선하면서도 급진적이었다고 한다.

윤상원은 5월 27일 새벽 4시가 넘을 무렵, 공수부대의 총격을 받아 복부 관통상을 입고 들불혼이 되었다. 광주의 공기는 그를 등신불 삼아 불태우며 어둠을 사르기에 충분한 분노와 노여움으로 꽉 차 있던 새벽이었다. 그의 혼불은 도청 건물을 떠나 고향 천동마을 엄니 아부지 곁으로 가장 먼저 찾아갔을 것이다. 납부금 때문에 망설였던 그 길을 서둘러 달려가도 되는 해방의 새벽이 되어….

임의진

시인. 화가. 사진도찍는다. 참꽃피는마을 ,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 여행자의노래 1-10 , 심야버스 등의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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