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사랑이 꽃피는 나무- 김향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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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산 능선 높은 나무에 새집이 하나 걸려 있다. 언제 지었는지 모르게 문득 생긴 집이다. 산은 서서히 연둣빛이 오르고 있는 참이지만 무성해지려면 아직 먼 듯하다. 그래서인지 덩그렇게 걸려 있는 집 한 채가 유독 눈에 띈다. 우뚝 솟아 있는 솟대처럼 괜스레 반갑다.
종종 그 아래를 지나간다. 집에서 나와 산길에서도 만나는 것이다. 가까이 보는 나무는 생각보다 더 크고 더 높다. 나무 위의 새집도 더 크고 더 높아 보인다. 고개를 젖힌 채 맨 꼭대기쯤을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온다. 저렇게 높은 곳에 어떻게 저런 집을 지었을까. ‘새대가리’라고 놀릴 만한 하등의 이유도 없어 보인다. 하필 아찔한 나무 위에 터를 잡기는 했어도 가지 사이에 턱 하니 걸쳐 놓은 솜씨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자잘한 나뭇가지 정도를 얼기설기 얽어놓은 것 같지만, 저 다듬지 않고 빗지도 않은 엉성한 둥우리에도 놀라운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는 것이라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보았던 주변의 새들은 모두 자연의 건축가였다. 제비는 바로 우리집 처마 밑에 흙집을 지었고, 참새는 검불을 물어다 지붕 위에도 짓고 담장 틈에도 지었으며, 딱따구리는 따악딱 나무를 쪼아 구멍 집을 만들었다. 물총새는 물가 벼랑에 굴집을 파 두고, 오리는 갈대나 연잎 따위를 모아 강변에 둥지를 틀었다. 어렸을 때는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었으나 지금은 책이나 영상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귀한 것이 되어 버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까치집이었다. 까치는 엄동설한에 집을 지었다. 아무것도 가릴 것 없는 맨사뎅이 나목 위에 터를 잡고 보란 듯이 공사를 시작했다. 나무 밑에는 잔가지들이 수북이 떨어져 있기도 했다. 나뭇가지를 물어다 둥근 모양의 둥지를 만드는데, 처음엔 가지가 서로 얽히지 않아 애를 먹는다. 서툰 솜씨 탓에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다. 그러나 이리 끼우고 저리 끼워 넣으며 수없이 반복한 끝에 마침내 단단히 고정된 최고의 요새를 완성한다. 놀라운 것은 겉모양은 엉성하고 볼품없어 보여도 알고 보면 이중으로 설계된 ‘조류계의 타워팰리스’로 불린다는 사실이다. 얼기설기 삐죽삐죽 거친 외부와는 달리 내부는 자잘하고 부드러운 재료들을 엄선해 지은 최고급이라는 말이다. 포근하고 안락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위험들까지도 일찌감치 차단해 버리는 나무 위의 철옹성인 셈이다.
더 놀라운 것은 저 둥우리의 소유 혹은 사용 방식이다. 그동안 집 짓는 데 들인 시간이며 공력이 하 얼마인데, 까치는 알을 품고 새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미련조차 두지 않는 것이다. 까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뭇 새들 역시 알을 낳고 품어 새 생명이 자라나는 일정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때가 지나면 모두 둥지를 벗어나 스스로 살아간다.
사용된 도구가 숫제 제 몸 자체라는 것에는 경외감이 느껴진다. 고도의 기술로써 별별 것을 다 만드는 인간의 건축술에 비하면 새들의 집짓기는 너무나 원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제 부리를 이용해 자재를 운반하고 둥지를 축조하며, 제 가슴 근육으로써 쌓은 벽을 굳건히 다지고, 제 깃털을 뽑아 온돌을 삼는 것만큼 진정 어린 공법이 어디 있을까. 누구도 부리지 않고 무엇도 훼손하지 않으며 가장 최소한의 필요만 취하고선 그마저도 미련 없이 놓아 버리는 새들의 마음이 참으로 숭고하다. 수없는 노동의 반복과 제 몸의 희생을 통해 얻은 새들의 둥우리, 그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집의 원형이 아닐까? 우리의 삶도 최초엔 둥글고 안락한 모태로부터 시작했을 것이므로. 헌신과 희생과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므로.
날마다 부쩍부쩍 경물이 달라지고 있다. 매화는 벌써 다 저버렸고 동백도 뚝뚝 지고 있다. 산수유는 아직 노르스레 서 있는 듯하고, 길쭉한 소나무 사이로 진달래가 붉어 있다. 타다 남은 편지처럼 목련이 떨어지고, 그리고 화르르화르르 벚꽃이 피어난다. 한 나무가 하나의 산처럼 둥그렇게 부풀어서 흰빛의 꽃 무리를 눈부시게 드리웠다.
앞산 능선 높은 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바람 불면 바람 들이고, 별빛 내리면 별빛 껴안고, 햇빛도 달빛도 넉넉히 쌓아둔 나무다. 요 몇 날 나무는 요요하고 화사하다. 아, 꽃을 보고서야 벚나무인 줄 알았다니… 그러니까 까치는 벚나무에다 둥지를 튼 것이었다. 까치네 둥지는 시방 꽃대궐이다. 꽃잎 분분한 날 까치는 조심조심 알을 낳을 것이고 새끼들을 먹이고 기르며 더욱 사랑을 알아갈 것이다. 앞산 능선 높은 벚나무에 사랑이 꽃피고 있다.
종종 그 아래를 지나간다. 집에서 나와 산길에서도 만나는 것이다. 가까이 보는 나무는 생각보다 더 크고 더 높다. 나무 위의 새집도 더 크고 더 높아 보인다. 고개를 젖힌 채 맨 꼭대기쯤을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온다. 저렇게 높은 곳에 어떻게 저런 집을 지었을까. ‘새대가리’라고 놀릴 만한 하등의 이유도 없어 보인다. 하필 아찔한 나무 위에 터를 잡기는 했어도 가지 사이에 턱 하니 걸쳐 놓은 솜씨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자잘한 나뭇가지 정도를 얼기설기 얽어놓은 것 같지만, 저 다듬지 않고 빗지도 않은 엉성한 둥우리에도 놀라운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는 것이라니….
더 놀라운 것은 저 둥우리의 소유 혹은 사용 방식이다. 그동안 집 짓는 데 들인 시간이며 공력이 하 얼마인데, 까치는 알을 품고 새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미련조차 두지 않는 것이다. 까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뭇 새들 역시 알을 낳고 품어 새 생명이 자라나는 일정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때가 지나면 모두 둥지를 벗어나 스스로 살아간다.
사용된 도구가 숫제 제 몸 자체라는 것에는 경외감이 느껴진다. 고도의 기술로써 별별 것을 다 만드는 인간의 건축술에 비하면 새들의 집짓기는 너무나 원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제 부리를 이용해 자재를 운반하고 둥지를 축조하며, 제 가슴 근육으로써 쌓은 벽을 굳건히 다지고, 제 깃털을 뽑아 온돌을 삼는 것만큼 진정 어린 공법이 어디 있을까. 누구도 부리지 않고 무엇도 훼손하지 않으며 가장 최소한의 필요만 취하고선 그마저도 미련 없이 놓아 버리는 새들의 마음이 참으로 숭고하다. 수없는 노동의 반복과 제 몸의 희생을 통해 얻은 새들의 둥우리, 그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집의 원형이 아닐까? 우리의 삶도 최초엔 둥글고 안락한 모태로부터 시작했을 것이므로. 헌신과 희생과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므로.
날마다 부쩍부쩍 경물이 달라지고 있다. 매화는 벌써 다 저버렸고 동백도 뚝뚝 지고 있다. 산수유는 아직 노르스레 서 있는 듯하고, 길쭉한 소나무 사이로 진달래가 붉어 있다. 타다 남은 편지처럼 목련이 떨어지고, 그리고 화르르화르르 벚꽃이 피어난다. 한 나무가 하나의 산처럼 둥그렇게 부풀어서 흰빛의 꽃 무리를 눈부시게 드리웠다.
앞산 능선 높은 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바람 불면 바람 들이고, 별빛 내리면 별빛 껴안고, 햇빛도 달빛도 넉넉히 쌓아둔 나무다. 요 몇 날 나무는 요요하고 화사하다. 아, 꽃을 보고서야 벚나무인 줄 알았다니… 그러니까 까치는 벚나무에다 둥지를 튼 것이었다. 까치네 둥지는 시방 꽃대궐이다. 꽃잎 분분한 날 까치는 조심조심 알을 낳을 것이고 새끼들을 먹이고 기르며 더욱 사랑을 알아갈 것이다. 앞산 능선 높은 벚나무에 사랑이 꽃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