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있는 도시 만들기- 이봉수 광주도시공사 도시주택연구소장
2023년 03월 27일(월) 00:30
독일 동화 중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회색 신사 집단이 어느 날 도시에 등장한다. 매일 숫자가 불어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들을 알아채지 못한다. 회색의 신사들은 도시 사람들을 하나둘 꼬드겨 시간 절약 거래를 체결하더니, 이윽고 도시를 장악해 버린다. 특히 불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되는 것은 모두 생략하고 필요한 부분만 살린 새로운 집들이 지어진다. 그 안에 살 사람들에 맞추어 집을 짓는 수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자면 제각기 다른 모양의 집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모양의 집을 지으면 돈과 시간이 훨씬 적게 드는 이점이 있다. 다른 점이라고는 없는 고층 빌딩이 우뚝우뚝 솟아났다. 집들이 똑같아 보이니 당연히 거리도 똑같아 보였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우리 주변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도시의 거리가 이렇게 존재감 없는 비슷비슷한 것들이 북적거리고 지나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각각의 도시가 매우 큰 변화를 겪었다. 이로 인해 도시는 획일화 경향이 강하게 되었다. 모든 도시가 고속도로, 고층 빌딩, 대규모 아파트 단지, 광장 등의 공통 요소를 갖춘 이른바 ‘일반 도시화’ 되었다. 각각의 도시와 지역이 당연히 보유하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소홀히 되어 획일적이고 매력 없는 도시 공간을 창출하여 왔다. 도시 정체성의 중요성이 지적되는 배경이다.

우리는 확고한 정체성을 드러내고, 조금 더 의도적이고 사람 냄새 나는 도시와 공간을 종종 목격하게 되는데 그 특별한 장소들은 뇌리에 깊이 박혀 매력적인 잔상으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런 매력적인 도시와 공간이란 무엇일까? 살고 싶은 도시 1위인 호주 멜버른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가는 녹지와 광장 그리고 이를 이어주는 다양한 교통수단을 통해 도시를 채우는 삶들을 녹여 낸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도시의 정체성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삶과 이야기가 있는 도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공간의 주인인 도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얼마 전 일본의 고도 교토를 다녀왔다. 일본 교토는 근대 도시로서의 변모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역사 도시로서의 이미지는 사라지나 싶었다. 한데 경관이라는 문제가 대두되면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맞는데, 그 계기가 교토 타워의 건설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교토 타워는 지금이야 교토의 상징이라고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역사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구조물이라 해서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결국 건물 옥상 위에 만들어진 구조물로 인정받은 교토 타워는 고도 제한에도 걸리지 않고 세워졌다. 하지만 이런 반대 운동은 역사 도시라고 불려지는 도시의 경관 문제를 시민들과 행정, 전문가들이 포함된 다양한 의견을 표현하고 이를 설명하고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부가 나서서 행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광주도 층수 제한 폐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얼마 전 TV에서 전문가와 행정이 각자의 의견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도 나왔다. 시민단체나 건설단체 등 많은 관련 단체들도 각자의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을 근래에 보지 못했는데 이런 관심은 도시적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한 일이다.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나은 방향으로 진행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주제에 대해 공론의 장을 많이 마련하고 이를 통해 전문가와 단체들의 의견을 많이 듣고 행정은 이해하고 설득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최근 광주 동구에서 특정 경관 계획 수립 용역이 시작되어 동구만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매우 고무적이다. 그러나 과도한 욕심은 일을 그르치기 쉽다. 광주와 동구가 가지고 있는 확실한 정체성, 예를 들면 인본 도시와 문화 중심 도시와 같은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디자인적 요소를 찾아 꼭 필요한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나머지는 건축가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함으로써 통일성과 함께 각각의 개성이 나타나는 건축물이 세워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도시가 정체성을 가지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광주가 내 뇌리에 남아 있는 도시들처럼 평범함에 도전하고 다양함을 상상하고 실험하는 것이 일상이 되는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는 광주일보 홈페이지(www.kwangj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kwangju.co.kr/article.php?aid=1679844600750344078
프린트 시간 : 2025년 05월 13일 20: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