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어째야쓰까- 박 용 수 광주동신여고 교사·수필가
2023년 03월 12일(일) 22:00
“으째야쓰까, 으째야-쓰까”

화재 현장에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다. 소방차가 물줄기를 뿜어대지만, 창고는 온통 화마에 뒤덮여 있었다. 터미널에서 TV 뉴스를 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옆 사람을 바라보았다. 늙숙한 아주머니 한 분이 안타깝게 발을 동동 구르신다. 창고 안 사람을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소방관을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순간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가 자주 쓰는 말씀이 “으째야쓰까”였다. 평소 입에 달고 다니셨다. 내가 콜록거리기만 해도 “으째야쓰까” 걱정하셨고, 작은 상처만 나도 “으째야쓰까” 하시고 약을 발라 주셨다. 시험에 낙방할 때나 군대 갈 때도 툭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이웃집에 큰소리만 나도 눈비가 오거나 천둥만 쳐도 “으째야쓰까”를 연발하셨다. 수많은 말 중에서 오직 이 단어만 아신 것 같았다.

“으째야쓰까”는 남자나 젊은 여성들은 잘 쓰지 않는다. 쓰더라도 이상하게 맛깔이 안 난다. 주로 남자들은 “환장하겠네” “저런 저런”하는 감탄사로, 젊은 여자들은 “어머나” 또는 “어쩌지” 정도로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드러냈다.

할머니의 “으째야쓰까”에는 화음이 들어있다. “어머나”가 ‘어’에 악센트가 들어간 놀람의 표현이라면 “으째야쓰까”는 처음 ‘으’를 낮추거나 마지막 ‘까’를 길게 빼서 자기 정서를 담백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어쩌지” 하는 말이 당황한 혼잣말이라면 “으째야쓰까”는 상대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오롯이 담아낸다. 그건 골목길에서 지팡이를 짚고 허리도 좀 굽어야 나오는 소리다. 누룩과 쌀이 비바람과 잘 버무려져서 숙성된 깊은 맛이랄까. 그들 언어와는 결과 무게부터 다르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께서 활짝 웃으시며 “어째야쓰까! 어째야쓰가!”를 연발하셨다. 할머니는 꼭 안타깝거나 애달픈 상황에서만 이 감탄사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셨다. 오락 프로그램을 보고 오지게 재밌다며 “어째야쓰까”를 연발하셨고 마을 잔치할 때나 손자가 재롱을 부릴 때도 “어째야쓰까” 하면서 자지러지셨다.

어쩜 ‘으’보다 ‘어’에 가깝다. ‘어’는 ‘으’보다 다소 힘이 빠진 그러니까 “어째야쓰까”는 “으째야쓰까”보다 더 긍정적 의미로 쓰신 것 같았다.

‘으’는 출발부터 무겁다. 어떻게 손을 쓸 수 없거나 해결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우두망찰 도움을 요청하는 연민의 감정이 담긴 반면, 즐겁거나 기분 좋을 때는 시작부터 가볍고 밝은 ‘어’가 나왔다. ‘으’가 가슴 깊은 바닥에서 나온다면 ‘어’는 주저 없이 나오는 입말이다. 터널 입구에 도달한 기차가 ‘으’ 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그 무게를 털어내고 경쾌하고 발랄하게 ‘어’로 변조된 느낌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세월과 역사, 웃음과 눈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광복과 6·25, 4·3과 여순은 물론 광주도 오롯하게 숨 쉬고 있다. 아버지 결혼도 나의 출생도 들어있다. 가난과 굶주림, 죽임과 죽음을 다 지켜본 이의 마음이 들어 있다. 곤고한 삶의 딱지와 그것을 떼어내며 살아야 했던 질긴 숨이 어쩌면 그 언어 없이는 할머니는 한시도 살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 언어가 할머니에게 다가가 할머니를 살리고 할머니를 위로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유년에 내 귓가로 수없이 스치고 지나간 바람 소리 같은 할머니의 독백, 그 한 맺힌 넋두리가 귀에 아직도 쟁쟁하다.

“으째야쓰까”나 “어째야쓰까”는 당신에게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이웃이었으며 삶 자체였지 싶다.

누군가를 걱정하고 위로해 주는 존재의 집, 이런 값지고 따뜻한 말들이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으째야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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