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 ‘엉터리’ 잡기- 김창균 빛고을고등학교 교장
2023년 02월 21일(화) 23:00
지난 1월 하순, 일본 히로시마의 한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날 히로시마의 아침 최저 기온은 영하 4.2도로, 부산보다 남쪽인 위치를 감안하면 매우 추운 날씨였다. 그런데 점퍼를 입고 온 학생에게 점퍼를 벗을 것을 강요하였다. 결국 학생은 교내에서 점퍼를 벗었고, 고열로 인해 이튿날부터 일주일이나 결석했다고 한다.

학부모의 항의에 학교 측은 교칙에 점퍼와 코트는 없기에 점퍼 착용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후 언론의 취재에도 “규정은 아이 안전을 위해 지킬 필요가 있다. 교칙에서 인정하는 방한복(스웨터, 목도리, 장갑)으로 추위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추울 때 덧입는 웃옷은 상식에 속하지 않을까. 굳이 교칙에 항목을 두어 제한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나아가 학생 안전과 건강을 보호해야 할 교칙이 학생의 건강을 해친 모순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일본 하면 매뉴얼이 일상화된 나라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진이나 태풍 등 재해가 많은 까닭인지 아니면 매사 완벽을 추구하는 기질 때문인지는 모르나, 세세한 상황까지 감안하여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예상할 수 있는 모든 재난 상황에서 화장실 이용 방법까지 갖추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본의 편의점에서 거스름돈을 손님 방향으로 보여주며 ‘한장 두장 석장’하는 식으로 소리 내어 세어 주는 모습에 감동하다가도 매뉴얼에 따른 행동임을 알게 되면 심드렁해지기도 한다. 더욱이 예상 범위를 넘는 문제 상황에서는 허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과거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일본 정부는 원전 반경 20~30㎞에 외출 금지령을 내리고, 노출된 옷은 비닐봉지에 밀폐해 폐기하고 물로 몸을 씻으라고 했다. 그런데 시민들은 갈아입을 옷이 없는데 어떻게 하라는 거냐며 어이없어 했다는 일화가 한 예이다.

세종대왕의 말씀처럼 “천재(天災)와 지이(地異)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는 사람이 어찌할 수 없지만, 그에 대한 조치를 잘하고 못하고는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니 사전 대비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매뉴얼대로 한다는 것은 굳이 판단해서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매뉴얼에만 의존하다 보면 변화무쌍한 현실을 감안하여 융통성 있게 일을 처리하기가 어려워진다.

또한 매뉴얼은 과거의 것이다. 선례(先例)를 바탕으로 도출한 최선의 방법이지만 상황이 변해 여태 주목하지 않았던 새로운 변수가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톱다운(Top-down) 방식 의사 결정에 구속되면 자율성에 기반한 협력적 의사 결정의 여지가 사라질 수도 있다.

견월망지(見月忘指). 누가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아야 한다. 달과 손가락 모두 진실임은 분명하다. 다만 방편인 손가락에 머물지 말고, 곧바로 본질인 달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매뉴얼에 닫힌 프레임은 새로운 상황에 맞서는 지적 에너지와 노력을 가로막는 걸림돌일 뿐이다.

한마디로 현장 상황에 기반해 엉터리를 잡을 수 있어야 한다. 흔히 ‘터무니없는 말이나 행동. 또는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엉터리이다. 그런데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대강의 윤곽’이라는 뜻풀이와 더불어 “일주일 만에 일이 겨우 엉터리가 잡혔다”와 같은 용례가 먼저 올라 있다. 조항범 교수는 ‘그런, 우리말은 없다’에서 엉터리는 본래 ‘충실한 내용’ ‘어지간한 상태(모습)’를 나타내는 데 잘 어울리는 긍정 표현이라고 했다. 주로 ‘없다’와 어울려 쓰이다 보니 부정적 의미 가치가 덧씌워졌다는 것이다.

‘사물의 핵심이나 근거’가 엉터리임을 기억하면, 엉터리 보쌈은 형편없는 보쌈이 아니라 ‘속이 꽉 찬 보쌈’이다. 그렇듯이 매뉴얼의 본질을 꿰뚫고 습관적 사고를 뛰어넘어야 한다. 영화 ‘탑건: 매버릭’에서 전투기 조종사 교관인 주인공은 전투기(F-18) 매뉴얼을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미 다 알고 있지? 그런데 적들도 다 알아. 그들이 모르는 것은 전투기가 아니라 너희 파일럿의 한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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