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림의 차이나 4.0]류샤오보와 왕후닝- 조선대 중국어문화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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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샤오보(劉曉波, 1955∼2017)는 201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중국의 인권운동가이자 작가이며 교수였다. 노벨상 수상이 발표되던 당시 그는 수감 중이었다. 노벨평화상위원회는 “류샤오보는 중국의 기본적 인권을 위해 장기간 비폭력 투쟁을 벌였다”고 시상 이유를 밝혔다. 그는 중국 문학과 문화를 전공한 학자로, 1989년 텐안먼 민주화 시위 당시에는 하와이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조국의 상황을 인지한 그는 즉시 귀국하여 텐안먼 민주화 시위를 주도했다. 6·4일 무력 진압 이후 그는 체포되어 2년여 감옥 생활 후 출옥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텐안먼 희생자들에 대한 진상 규명과 보상, 민주와 개혁을 요구하다가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2008년 ‘08헌장’ 사건으로 11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으나, 본인이나 가족들은 노벨상을 직접 수상하지 못했고 감옥 생활 중 지병이 악화되어 2017년 유명을 달리했다.
왕후닝(王호寧, 1955~)은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 작년 20차 당대회에서는 상무위원 서열 4위에 올라 올 3월에는 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장을 맡을 것으로 예상되는 인물이다. 1984년 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정치와 행정학을 전공한 학자이다. 상하이 푸단(復旦)대학 국제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95년 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 조장으로 발탁되어 중앙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푸단대학 재직 시 그는 국가의 안정을 중시하면서 강력한 권위주의적 방식과 지도력에 의한 경제 성장과 발전을 추진해야 한다는 논지를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이론은 당 지도부의 주목을 받아 1995년 총서기 장쩌민의 추천으로 중앙정책연구실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정치 분석과 정책 입안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장쩌민의 ‘3개 대표론’,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 시진핑의 ‘중국몽’, ‘신형대국관계론’ 등과 같은 핵심 정책을 입안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로 인해 ‘세 개 왕조 황제의 스승’(三朝帝師)라는 명칭을 획득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나 비슷한 성장 과정을 거쳤다.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에 대한 열기가 가득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렵던 1950년과 60년대 초반의 유년 시절을 거쳐 혼돈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청소년과 청년 시절을 보냈다. 문혁이 종료된 후 대학에 진학하여 각자의 전공 분야에서 학습하고 교직에 몸을 담았다. 중국이 처한 오늘을 고민하고 내일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마음은 같았을 터이나, 현실에서 두 사람의 행로는 정반대가 되었다.
류샤오보는 1991년에 석방된 후 지속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1991년에 다시 반혁명죄로 구속되었고, 공직을 박탈당하고 여러 차례 가택 연금, 체포 구금을 당했다. 그는 ‘반부패 건의서’ ‘흡혈의 교훈, 민주 추진과 법치 발전’ 등과 같은 글을 통해 중국의 민주화와 개혁을 주장했다. 류는 서구 사회의 어두운 면이나 제국주의적 속성을 도외시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았지만, 2008년에는 일당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는 ‘08헌장’의 발표를 주도했다. ‘08헌장’은 ‘정치적 자유, 사법 독립, 인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교수·변호사·작가·언론인·의사·농민·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의 303명이 참여한 ‘헌장’은 이후 해외의 화인(華人) 사회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08헌장’은 텐안먼 민주화운동 20주년과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이 되는 해에 발표되어 그 의미를 더하지만, 한편으로는 1998년 광주에서 아시아 인권단체들이 모여 발표한 ‘아시아 인권헌장’의 맥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더욱이 그 내용에는 단순한 ‘친·반’체제라는 대립 구도를 넘어서는 이상적 모델이 담겨 있기도 하다.
왕후닝은 ‘행정생태학’ ‘정치적 인생’ ‘미국이 반대하는 미국’ 등과 같은 저서에서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행정의 문제를 고민하고, 특히 공권력이 노골적으로 동참하는 ‘초월적인 거대한 부패’ 현상이 전 국민의 이익을 침해하고 국가의 정치경제적 명맥을 약화시키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이런 문제를 강력한 권위를 통해 해결하고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견해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훗날 역사의 평가는 어떨지 중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만약 이 두 사람의 관점과 견해가 서로 삼투하여 융합된다면 중국이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 이 둘의 인생 행로를 보면서 시(時) 고금과 양(洋)의 동서를 불문하고 한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책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도 여전히 떠오른다.
류샤오보는 1991년에 석방된 후 지속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1991년에 다시 반혁명죄로 구속되었고, 공직을 박탈당하고 여러 차례 가택 연금, 체포 구금을 당했다. 그는 ‘반부패 건의서’ ‘흡혈의 교훈, 민주 추진과 법치 발전’ 등과 같은 글을 통해 중국의 민주화와 개혁을 주장했다. 류는 서구 사회의 어두운 면이나 제국주의적 속성을 도외시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았지만, 2008년에는 일당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는 ‘08헌장’의 발표를 주도했다. ‘08헌장’은 ‘정치적 자유, 사법 독립, 인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교수·변호사·작가·언론인·의사·농민·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의 303명이 참여한 ‘헌장’은 이후 해외의 화인(華人) 사회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08헌장’은 텐안먼 민주화운동 20주년과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이 되는 해에 발표되어 그 의미를 더하지만, 한편으로는 1998년 광주에서 아시아 인권단체들이 모여 발표한 ‘아시아 인권헌장’의 맥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더욱이 그 내용에는 단순한 ‘친·반’체제라는 대립 구도를 넘어서는 이상적 모델이 담겨 있기도 하다.
왕후닝은 ‘행정생태학’ ‘정치적 인생’ ‘미국이 반대하는 미국’ 등과 같은 저서에서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행정의 문제를 고민하고, 특히 공권력이 노골적으로 동참하는 ‘초월적인 거대한 부패’ 현상이 전 국민의 이익을 침해하고 국가의 정치경제적 명맥을 약화시키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이런 문제를 강력한 권위를 통해 해결하고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견해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훗날 역사의 평가는 어떨지 중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만약 이 두 사람의 관점과 견해가 서로 삼투하여 융합된다면 중국이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 이 둘의 인생 행로를 보면서 시(時) 고금과 양(洋)의 동서를 불문하고 한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책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도 여전히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