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논변·사단칠정논쟁, 조선 주자성리학 깊이를 더하다
<5> 고봉 기대승과 호남유학
전라도 유배 온 김굉필·조광조 호남유학 도학적 성격 형성 영향
기대승, 이황이 부러워한 호남사림 학술논쟁 ·학문 교류 주축
2022년 11월 16일(수) 09:30
김인후와 사위이자 제자인 양자징을 배향한 장성 필암서원.
올해는 고봉 기대승 서세 450주년이 되는 해다. 이 기획은 한국학호남진흥원이 주최하고 전남대 호남학연구원이 주관하는 기념행사의 하나로 마련됐다. ‘다시 고봉을 만나다’라는 대주제 아래 고봉과 관련된 장소, 자연경물, 역사적 인물 및 문헌자료를 재발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고봉 기대승이 살았던 16세기 호남유학은 호남사림의 형성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전개되었다. 호남사림은 기본적으로 호남지방, 즉 전라도를 기반으로 중종대에 성립되어 성장한 사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정치적 격변기에 절의를 지키거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전라도로 이주해온 사대부 가문의 후예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 시기 호남유학은 소릉복위 주장과 신비복위소에서 볼 수 있듯이 의리명분적인 성격과 실천적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이와 더불어 호남유학의 전개 과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이 지역에 유배온 김굉필과 조광조였다. 김굉필은 무호사화 때 순천으로 유배를 와 사사되기까지 4년 동안 있었는데 그동안 최산두·유계린·최충성 등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김굉필의 제자였던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능주에 유배되어 한 달 만에 사사 당하였으나 호남유학이 도학적 성격을 가지게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호남사림의 사상이 김굉필·조광조의 도학사상·지치주의유학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조광조가 귀양와서 죽은 곳을 기리기 위해 세운 화순 조광조 적려유허비
명종대에 이르면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명으로부터 양명학과 장재·나흠순 등의 학문이 들어와 퍼지면서 조선의 사상계는 다양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학문적 성향에 따라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호남사림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비교적 단일한 학문적 성격을 가졌던 중종대와는 달리 이 시기에는 다양한 학문집단이 형성되었는데 크게 송순계열과 서경덕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송순·김인후·기대승·이항 등 송순계열 인물의 사상은 서로 간에 학설의 차이가 없지 않았지만 크게 보면 주자성리학에 가까웠다. 이들의 견해는 이항→김인후→기대승→송순의 순서로 이이의 견해와 비슷했는데 이이학파의 학설이 정립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반면 박순·노수신·유희춘·정개청·정여립 등 서경덕계열 인물들의 사상은 대체로 주자성리학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북송의 소옹·장재와 명의 나흠순의 학문, 양명학 등을 계승한 점이 없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 호남사림은 같은 학파 내에서, 또는 학파를 초월하여 수준 높은 학문적 토론과 논쟁을 벌였다. 박상과 승려 해공상인의 무극설논쟁(無極說論爭), 김인후와 정지운의 ‘천명도(天命圖)’ 논의, 이항과 김인후·기대승의 태극논변(太極論辨), 노수신과 김인후·이항·기대승의 인심도심논쟁(人心道心論爭) 등이 전개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 전개되었다. 이 학술논쟁들은 조선 학자들의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 수준을 한 단계 높이고 나아가 그들이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6세기 호남사림의 학술과 사상은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며 규모나 이론에서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영남·기호사림과의 학문적 교류에 힘입은 바도 컸다 호남사림과 영남·기호사림은 지방관 역임과 유배, 교제와 서신 등 다양한 형태를 통해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서로의 학문적 내용과 이론을 풍부히 해나갔다.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낸 ‘태극을 논한 글을 보여 준 데 답하는 편지(答示論太極書書)’라는 제목의 편지에는 이러한 호남학계의 상황을 잘 나타나 있다.

“공(기대승)이 이항과 김인후 두 사람과 태극을 논하면서 다섯 여섯 번 왕복 변론한 글을 받아보니 족히 사람들의 생각과 안목을 개발하여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내가 사는 이곳에는 나와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려는 사람이 없고 간혹 한두 사람의 동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벼슬에 종사하여 분주함을 면치 못하기 때문에 늙고 병든 이 사람은 그들과 떨어져서 쓸쓸히 지내면서 항상 막히고 머물러 있는 듯한 근심을 떨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내용을 봄으로 인해 마침내 호남에 이러한 인물들의 의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으니 실로 이는 우리 동쪽의 노나라로서는 드물게 보는 일로 깊이 감탄하고 흠모하여 쏠리는 마음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기대승은 바로 이황이 부러워한 호남사림의 학술논쟁과 학문 교류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 호남유학, 나아가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높이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부친 기진과 숙부 기준, 김집·정희렴 등에게서 학문을 배운 기대승은 19세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두문불출하기도 하였으나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며 학문에 정진해 31세 때인 1557년(명종 12)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주자의 문집인 ‘주자대전’을 기대승 자신의 독자적인 기준을 가지고 편찬한 것으로 성리학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 수준을 보여준다.

이를 바탕으로 기대승은 김인후·이항·노수신·이황 등과 활발한 학문 교류와 학술논쟁을 벌인다. 1558년 두류산을 유람하고 김인후를 만나뵌 기대승은, 과거 응시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태인에 있던 이항을 찾아뵙고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해 논하였다. 이날 두 사람은 하루 종일 ‘태극도설’에 대해 토론하였으나 결말에 이르지 못하였다.

담양 정철의 송강정
서울에 올라가 문과에 급제한 뒤 돌아오는 길에 기대승은 다시 이항을 찾아뵙고 다시 태극논쟁을 벌였으나 두 사람의 견해는 좁혀지지 않았다. 이항이 이기는 혼연한 일물이며 태극과 음양 역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주장한 데 반하여 기대승은 태극이란 다만 리일 뿐 기와는 무관한 것이어서 태극과 음양은 섞일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해 겨울 기대승은 김인후를 만나 뵙고 ‘태극도설’에 대한 자신의 학설을 아뢰니 김인후는 기대승의 견해가 옳다고 하였다.

이듬해인 1559년 이항이 김인후에게 자신의 학설을 주장한 서신을 보내자 김인후는 이항에게, 태극과 음양은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없으나 일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이러한 김인후의 견해는 기대승의 논지와 거의 동일하였다. 기대승 역시 자신의 주장을 담은 편지를 보내고 이에 대해 이항이 다시 답장을 보내지만 서로의 견해는 좁혀지지 않았다. 이 해 기대승은 이황과 사단칠정논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의심나는 점을 김인후에게 질문하여 자문을 받기도 하였다.

기대승은 39살 때인 1565년, 진도에 귀양가 있다가 괴산으로 이배되어 가던 노수신이 머물던 광산현 진국원(鎭國院)을 방문하여 인심도심(人心道心)에 관해 논하였다. 인심도심논쟁은 이미 1558년부터 노수신과 이황·이항·김인후 사이에 벌어지고 있었다. 노수신은 나흠순의 설에 따라 도심을 체(體)이며 성(性)으로, 인심을 용(用)이며 정(情)으로 봄으로써 도심과 인심을 모두 정의로 보아 용으로 생각하는 주자의 견해와는 달랐다. 이황과 이항·김인후는 모두 주자의 견해에 입각해서 노수신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진국원에서의 만남에서 노수신은 인심도심설에 대한 나흠순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였으며 기대승은 그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1569년에는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저술하여 노수신의 인심도심설을 비판하였다.

호남유학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과정과 궤를 같이 하면서 전개되었다. 즉 철학적인 문제보다는 문물제도의 정비와 성리학 이념의 교육과 보급에 더 관심을 가졌던 15세기 유학에서, 성리학 이념의 사회적 실천에 중점을 두었던 16세기 전반의 도학사상·지치주의유학을 거쳐 성리학적 세계관과 이기심성론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16세기 중반 조선 성리학으로의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대승은 활발한 학술논쟁과 학문 교류를 통해 16세기 호남유학이 당대 최고 수준에 도달하는데, 나아가 조선시대 성리학이 중국을 뛰어넘어 조선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성리학을 수립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것이다. <끝>

<고영진·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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