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림의 차이나 4.0] 타이완과 타이완 사람들(3)-조선대 중국어문화학과 명예교수
![]() |
쫑챠오(鍾喬) 선생이 마지막으로 광주를 방문한 것은 2016년 5월이었다. ‘오월어머니집’에서 아시아 인권 및 평화와 관련된 국제연대 활동의 일환으로 타이완의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당한 어머니, 여성단체들과 교류 및 초청 사업을 진행했는데, 타이완 측의 제반 일을 쫑챠오가 맡았다. 쫑챠오는 피초청인을 타이완의 ‘수난자(受難者) 호조회(互助會)’ 회원으로 결정했다고 알려 왔다.
1950년대 냉전체제가 고조되던 시기부터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기까지 타이완에서 수많은 민주 인사, 진보 인사들이 당시 군사정권에 의해 ‘간첩’ ‘공산주의자’ ‘동조자’ 등의 죄명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하거나 장기수로 복역했다. 이른바 ‘공비(共匪)’ 사건이 수없이 날조된 시기이다. 타이완 수난자호조회는 이 시기 백색 테러로 인한 직접적 피해자와 남편이나 자식들이 희생당한 부인이나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이다. 회원들도 이제 대부분 70-80대의 고령층이라서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대사회적 발언과 민주화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오월어머니집 교류 행사에 참석한 수난자 호조회 회원은 두 분이었다. 주숙정(周淑貞) 여사는 1930년생으로 1945년부터 노동운동을 하다가 1949년 공산주의자와 연계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7년을 복역했다. 도귀미(도貴美) 여사는 1951년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분의 부인이었다. 이 두 여성 분의 수난의 역사는 지난 시기 타이완 역사의 한 장을 구성하고 있다.
타이완 측의 사업을 주관한 쫑챠오는 객가(客家)족 출신으로 1956년 타이완에서 출생했다. 대학 졸업 후 시와 산문 창작 활동을 하다가 1980년대에 민주화운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천잉쩐 선생이 창간한 ‘인간’(人間) 잡지에 근무하면서 탐방 기사 및 문화 관련 기사를 담당했다. 1990년대부터 민중연극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희곡 창작과 연극 연출에 집중했고 1997년에 차사극단(差使劇團)을 창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차사극단은 전문 배우 없이 일반 지원자들이 자발적으로 연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으면서, 지역 커뮤니티 활동을 연극과 결합시키는 작업 및 아시아 민중 연극 단체들과의 연대 활동에 치중하고 있다. 그는 이 과정에서 한국과 광주를 여러 차례 방문했고, 2005년 광주 아시아 마당연극제에 차사극단을 이끌고 참여하기도 했다. 쫑챠오는 특히 김남주 시인을 존경하고 그의 시에 심취되어 있다. 광주에 오면 망월동 김남주 시인의 묘소를 방문하고 술 한잔 올리며 무덤가에서 깊은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김남주 시인의 시 ‘학살’ 시리즈를 테마로 하는 연극 ‘한밤중의 천사’를 2006년 공연에 올리기도 했다.
그는 타이완 독립파의 견해도 중시하지 않고, 통일파의 주장에도 그다지 찬성하지 않는다. 미국을 위시한 외세의존적 독립이 가져올 문제나 공산당 주도의 통일이 가져올 문제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현실을 다각적이며 깊이 있게 파악하고 발 디딘 곳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현실적 이상주의, 혹은 이상적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독립과 통일’이라는 당위적 명제와 명분을 내세우고, 오히려 이를 이용하는 행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지니고 있다. 그는 현실을 살아가는 타이완 민중의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삶을 구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탄탄한 민주적 주체적 역량을 구축하는 것이 독립이나 통일 이전에 혹은 그 전제로 요구된다고 생각하고 활동해 왔다.
미국 권력 서열 3위라는 펠로시 하원의장의 타이완 방문으로 인해 해협 양안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미중 수교 당시 합의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위배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중국은 격렬한 항의는 물론 무력을 동원하여 시위하기도 했다. 미중 간에 격화된 갈등의 불꽃이 어떻게 번져갈지 초미의 관심사이다. 우리로서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볼 수만 없는 처지이다. 쫑챠오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는 퇴직하여 타이베이에서의 일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집필 활동에 집중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는데, 높아지는 파고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고민에 빠졌을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차사극단은 전문 배우 없이 일반 지원자들이 자발적으로 연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으면서, 지역 커뮤니티 활동을 연극과 결합시키는 작업 및 아시아 민중 연극 단체들과의 연대 활동에 치중하고 있다. 그는 이 과정에서 한국과 광주를 여러 차례 방문했고, 2005년 광주 아시아 마당연극제에 차사극단을 이끌고 참여하기도 했다. 쫑챠오는 특히 김남주 시인을 존경하고 그의 시에 심취되어 있다. 광주에 오면 망월동 김남주 시인의 묘소를 방문하고 술 한잔 올리며 무덤가에서 깊은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김남주 시인의 시 ‘학살’ 시리즈를 테마로 하는 연극 ‘한밤중의 천사’를 2006년 공연에 올리기도 했다.
그는 타이완 독립파의 견해도 중시하지 않고, 통일파의 주장에도 그다지 찬성하지 않는다. 미국을 위시한 외세의존적 독립이 가져올 문제나 공산당 주도의 통일이 가져올 문제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현실을 다각적이며 깊이 있게 파악하고 발 디딘 곳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현실적 이상주의, 혹은 이상적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독립과 통일’이라는 당위적 명제와 명분을 내세우고, 오히려 이를 이용하는 행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지니고 있다. 그는 현실을 살아가는 타이완 민중의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삶을 구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탄탄한 민주적 주체적 역량을 구축하는 것이 독립이나 통일 이전에 혹은 그 전제로 요구된다고 생각하고 활동해 왔다.
미국 권력 서열 3위라는 펠로시 하원의장의 타이완 방문으로 인해 해협 양안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미중 수교 당시 합의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위배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중국은 격렬한 항의는 물론 무력을 동원하여 시위하기도 했다. 미중 간에 격화된 갈등의 불꽃이 어떻게 번져갈지 초미의 관심사이다. 우리로서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볼 수만 없는 처지이다. 쫑챠오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는 퇴직하여 타이베이에서의 일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집필 활동에 집중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는데, 높아지는 파고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고민에 빠졌을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