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외로운 전쟁에 나선 의병장 <15> 황병학·이대극]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책 황병학…일본 기마병과 격전 이대극
[황병학]
광양 출생 황재모 둘째아들…광양‧순천서 활동하다 만주로
고문후유증으로 1931년 순국…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이대극]
영광 양반가문서 태어나 학문부터 무술연마까지 소질
기삼연에 연합전선 제의…34세 나이에 밀정에 생 마감
2022년 06월 09일(목) 22:00
황병학은 광양시 진상면 비촌에서 태어나 백운산을 배경으로 일본군과 맞섰다. 사진은 광양 백운산 전경.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찬, 전수용, 이기손,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

만주, 상해 등에서 활약한 황병학

황병학은 1876년(고종 13년) 광양군 진상면 비촌에서 황재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광양과 순천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다 만주로 탈출해 조국 광복에 헌신했다. 자는 영문으로, 뼈대가 굵고 눈에 광채가 나는 등 어릴 때부터 범상함이 있었다. 백운산 기슭에서 태어나 사냥을 다니는 것이 취미였고, 말을 타고 산에 오르내리는 것을 즐겨했다. 3살 위 당숙 토중 황순모와 어울리며, 을미사변 등을 일으켜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기로 다짐했다. 1895년 단발령이 내린 지 13년만인 1908년 백운산 골짜기까지 그 여파가 미쳐 군수 서상붕이 선비들을 모아놓고 상투 자르기에 나섰다. 군수의 강권에 선비들의 반발이 커지자 병학은 1908년 7월 26일 포수 100여 명을 이끌고 호남창의대장기를 휘날리며 거병했다. 백운산에 본진을 구축하고 격문을 보내자 300여 명이 모였다.

병학은 정예부대를 편성해 산악전에 나섰으며, 7~8정의 구식총밖에 없는 등 무기의 한계를 느껴 전면전은 피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이후 광양군 진월면 망덕만에 일본선박 수십 척이 집결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20여 명을 뽑아 헤엄쳐 접근, 선박 바닥에 구멍을 내 가라앉혔다. 일본군이 배를 버리고 달아나자 그 안에 있던 총을 가지고 나온 병학은 논밭 등 가산을 모두 팔아 대장간에서 칼과 창을 만들었다. 그 다음 여수항에 상륙한 일본군 400여 명이 북상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광양군 옥곡면 원후산 골짜기에 매복해 공격했다. 일본군들은 갈팡질팡하면서도 총격을 가했고, 병학은 왼편 어깨에 총을 맞았다. 상처를 동여맨 그는 다시 진두에 나서 호령했고, 일본군은 백운산 아래 진을 치며 전투는 장기전에 돌입했다. 일본군의 포위로 고립된 병학은 식량, 무기 등을 조달할 수 없게 되자 여수 묘도에서 모일 것을 약속하고 의병들과 농부로 변장한 뒤 산을 내려갔다.

황병학이 태어난 광양시 진상면 전경.
황순모는 부모님 봉양을 이유로 의병에서 탈퇴했으며, 묘도로 향하는 길에 바다에서 일본군과 만난 의병들은 거의 전멸해버렸다. 병학도 총탄을 맞은 어깨의 상처가 악화되면서 겨우 살아남아 광양 군장동 최춘명의 집을 찾아가 치료를 받았다. 이후 여수, 순천 등에서 항일동지들을 찾아다니다 장성에서 기산도를 만나 함께 거병하려 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로 실패하자 다시 광양으로 돌아왔다. 병학은 다시 황순모, 한규순, 백학선 등 옛 동지들을 규합하는데 성공하고, 광양읍내 일본군수비대 본부를 기습해 10여 정의 무기를 노획했다. 광주, 순천 등의 일본군들이 총출동해 병학의 고향인 비촌을 포위해 전 가족만이 아니라 마을주민 전체를 몰살하겠다며 병학과 황순모를 강압했다. 결국 순모가 자수의 뜻을 보였고, 병학과 한규순은 이에 반대했다. 일본군이 마을 주민들을 고문하기 시작하자 황순모는 단신으로 광양읍 일본군수비대를 찾아갔다.

그러나 일본군은 황순모에게 황병학 등이 있는 장소를 말하라며 고문했는데, 이를 끝내 거부하자 1908년 10월 11일 황순모를 총살했다. 그의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한규순은 살아있는 것이 수치라며 제 발로 수비대를 찾아가 일본 헌병에게 사살됐다. 이후 병학은 순천, 여수 등으로 피신하며 2년을 보냈는데, 그 사이 조선은 일제에 강제병합돼버렸다. 세 아들 용현, 봉현, 길현은 남의 집 호적에 올라갔고, 병학의 재산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떠돌던 병학은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기산도를 만나 중국 망명을 결심했다. 이 때 만난 최춘명에게 350원이라는 거액을 받아 만주로 넘어간 그는 3년간 흑룡강 등에 출몰해 일본군을 괴롭협다. 1923년 봄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으라는 비밀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했으나 의주의 불신 검문에 발각돼 평양감옥으로 보내졌다. 5년형을 선고받고 1927년 가을 출소한 병학은 대동강에서 자살하려다 불현듯 부모 생각이 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1927년 6월 어머니 안씨, 9월 아버지 황재모도 모두 별세한 뒤였다. 1930년 삼년상을 마친 그는 다시 만주로 가려다 총탄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드러누웠는데, 1931년 4월 23일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숨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의사 황병학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고 그의 높은 뜻을 기렸다.

이대극은 기삼연 의병에 참가해 1907년 이후 영광읍, 법성포 등에서 전투를 치렀다. 사진은 법성포 전경.


대담한 작전과 용기로 이름 높은 이대극

이대극은 1875년(고종 12년) 영광군 남산(현 영광읍)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순식, 자는 영화다. 어머니 김씨가 딸만 셋을 연이어 낳고 10년 만에 뒤늦게 얻은 아들로, 붉은 용이 품속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가다가 다시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담력이 대단하고 비범한 성격으로 대극이라고 불렸다. 활쏘기, 말달리기, 병정놀이를 즐겨했고, 학문에도 소질을 보였다. 1894년 1월 동학운동으로 영광성 관리들이 도주하면서 성이 비자 대극은 장정들을 데리고 영광성 수성장을 맡았으며, 이후 참봉에 임명돼 당분간 영광성에서 지냈다.

6개월 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06년 거병했다. 영광에 살던 일본인들을 몰아내고 일본군 진지를 기습해 승리했는데, 기삼연을 찾아가 연합전선을 제의하기도 했다. 1907년 장성 수연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의 감기(監器)로 임명됐는데, 당시 이대극은 150여 명의 의병과 군량, 무기를 들고 합류했다. 이후 도포장과 군기감을 겸임했으며, 기삼연 부대가 1907년 8월 12일 영광성을 공략할 당시 법성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기삼연도 대극의 대담한 작전과 용기에 탄복했다고 한다. 그 뒤 영광읍에 단독으로 나가 일본군 2명을 사살하고, 장성으로 이동해 접전을 벌이며 총탄에 맞아도 적의 칼을 빼앗고 진격하는 대극에 일본군도 아연실색했다. 대극은 기삼연에게 총, 칼 등 무기를 만들고 의병에게 정식 훈련을 시키자고 설득했다.

영광 불갑사 전경. 이대극은 의병을 모아 영광에 이르러 일본군을 격파하고 이곳에 머무르는 도중 배신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러나 하루도 쉬지 못하고 전투하거나 이동해야 하는 의병을 훈련시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 이후 대극은 대규모 병력보다 의병 1,000여 명을 소부대로 나눠 간헐적으로 습격하자는 의견을 냈다. 기삼연은 대극에게 우익을 맡겨 전라우도를 소탕하라고 명령했고, 대극은 광산 방면의 적을 치기 위해 어등산으로 향했다. 이어 영사재에서 일본 기마병과 만나 격전을 펼쳤다. 이후 석대산에 들어가 의병들을 쉬게 하고 무기를 정비한 뒤 1908년 2월 군사 훈련을 하다 기삼연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모든 의병에게 상복을 입히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한 대극은 죽봉 김준에게 서신을 보내 광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200여 의병은 대극을 맹주로 추대했으며, 대극은 다시 의병진을 재편했다. 모사에 노화삼, 선봉에 이백겸, 좌익에 김남수, 우익에 김관섭, 포장에 경자성, 후군에 이화삼, 참모에 봉계칠·정진옥·주현숙·주만옥을 임명하며 대오를 정비한 그는 갈재를 넘어 무장, 고산으로 나가 매복해 일본군을 끌어들여 대승했다. 본진을 불갑산의 운실봉으로 옮긴 뒤 대극을 체포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오는 일본군들을 대파하고 영암으로 진을 옮겼으나 이 과정에서 선봉장 이백겸이 전사했다. 대극은 강필주를 선봉으로 삼아 영광 백수면 장산리 장자산에서 일본군과 격돌해 격전을 펼쳤는데, 선봉장 강필주가 사망하고 후퇴했다.

인근 장사산에 진을 치고 노곤한 몸을 눕힌 이대극은 1908년 4월 3일 일본군 사주를 받은 밀정에 의해 자신의 장막에서 잠을 자다 34세의 나이에 살해당했다. <끝>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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