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호남 의병 이야기[32] 구한말 외로운 전쟁에 나선 의병장들, 부자 의병장 양진여·양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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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치욕 설욕하고자 온 가족이 목숨 바쳐 싸우다
군자금 확보위해 광주·장성·나주·고창 등 10여군데 주막
호남 중심 치열한 전투…‘남한대토벌작전’으로 검거돼 순직
양진여 동생 양서현, 부인 박순덕도 고문 후유증으로 숨져
2022년 04월 15일(금) 05:00
담양 덕실부락 전경. 대치에서 큰 싸움을 벌인 양진여는 그 뒤 담양군 무정면 덕곡리 덕실로 들어갔다가 밀고자에 의해 의병 20여 명이 전사하는 격전을 치렀다.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찬, 전수용, 이기손,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



1861년(철종 12년) 여름 무등산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내려와 소동이 일어났는데, 광주 두암동에 이르러 양남중의 집 울타리를 돌며 포효한 뒤 사라졌다. 이후 양남중의 부인인 박씨가 태기를 느껴 1862년 5월 11일(음력) 서암 양진여가 태어났다. 울음소리가 커 동네에서도 화제였고, 5세에는 염소 뿔을 잡고 놀다가 던질 정도로 힘이 셌다고 한다. 여기에 머리까지 명석해 소문이 자자했다. 이를 전해 들은 광주목사가 진여를 불러 문답을 했다. “사람의 목숨은 몇 개냐.”고 묻자 진여는 “전생, 현생, 그리고 구만리 넘어 황천에 사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그러면 누가 전생을 본 자가 있다더냐.”고 하자 진여는 “눈이 안에 들어 있는 씨앗이 어찌 그 안과 밖을 살펴볼 수 있겠습니까. 씨앗은 전생을 볼 수 없고 후세가 있음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씨앗 속에 몸이 있고, 생명이 있고, 사상이 있고, 세상이 있습니다.”고 말했다. 이에 탄복한 목사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상으로 비단 5필을 내렸다.

13세에 장성 정계암에서 7년간 학문에 정진한 뒤 집에 돌아와 장성군 삼인산 아래 갑향골(담양군 대전면)에서 16세의 박순덕과 혼인한 뒤 다시 정계암으로 가 3년을 공부했다. 혼인 2년만인 1883년(고종 20년) 맏아들 상기를 얻었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34세의 진여는 몸이 아플 정도로 분노에 휩싸여 12세의 아들 진기를 불러 왜적에게 당한 치욕을 설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의병 전적비
2년 뒤 건강을 회복한 진여는 1904년 가을까지 담양군 대전면 풍정암에서 밤에는 병서를 읽고 낮에는 무예를 익히는데 힘썼다. 이후 처가인 장성군 갑향면 행정리(현재 담양군 대전면 행정리 갑향골)에 주막을 차렸는데, 1907년까지 광주, 장성, 담양, 창평, 광산, 나주, 순창, 영광, 고창 등 10여 군데에 주막을 거느리게 됐다. 군자금을 모으면서 곳곳의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서였다. 1906년 1월 최익현의 밀서를 받아본 진여는 제자 10명을 그에게 보냈다. 하지만 1906년 6월 순창에서 최익현이 진위대에 체포되면서 제자들이 다시 돌아왔다. 진여는 최익현의 패배를 거울로 삼아야 한다며 행장을 갖추고 홀연히 사라져 추월산, 병풍산, 하청산, 신선봉 등 전남지역을 돌아다니며 지형을 살피기 시작했다.

1907년 4월 담양 삼인산 아래 주막으로 기삼연, 고광순 등이 찾아와 거병을 논의한 뒤 풍정암으로 돌아온 양진여는 격문을 돌렸다. 제자들이 격문을 들고 각지로 떠나 의병들을 모으자 선비, 농민, 장사꾼, 포수 등 300여 명이 몰려들었다. 양진여가 상대장에 오르고, 도통장에 안판구(안영옥), 중군장에 박성일, 우익장에 김익지, 좌익장에 김처중, 포대장 윤평원 등을 임명했다. 부서와 직책을 정한 뒤 소부대로 의병을 재편한 진여는 1907년 6월 하순부터 본격적인 작전에 나섰다.

덕곡마을 안내석
한편 진여의 큰 아들 양상기는 한국군 수비대에 들어갔으나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한국군이 해산돼버렸다. 해산 조칙을 거부한 한국군 1,180명이 시위에 나서 3시간 동안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이후 밀리면서 지방 의병과 합류하게 된다. 이 때 24세의 양상기는 장성 주막에 내려와 45세의 아버지 양진여를 만나 밀담을 나눴다. 의병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에 대적할 수 있는 총, 대포 등 무기와 일본군의 이동 정보가 있어야 한다고 아버지를 설득한 상기는 광주로 향해 광주경찰서 순사로 들어갔다. 그는 이 때부터 1908년 4월까지 자신의 신분을 속이며 일본 경찰 내부에 잠입해 활동한다.

1907년 9월 초순 진여가 이끄는 300여 명의 의병은 담양 병풍산을 넘어 노령을 거쳐 내장산 신선봉, 칠보산에 도착해 진을 친 뒤 중군장 박성일과 3명의 부하를 보내 정읍분견소를 살펴보게 했다. 진여는 다음날 새벽 정읍분견소에 대한 공격에 나섰으나 일본수비대가 격렬하게 저항하고 2시간여의 공방전에 별다른 성과가 없자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후 노령 고개에 매복하며 뒤쫓는 일본군을 기다렸는데, 때마침 일본군이 다가와 사정거리 안에 들자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대포까지 쏘며 3명을 사살한 진여는 총 3정과 일본도를 노획했다. 바로 순창으로 이동해 우편취급소와 분파소를 공격해 일본총 20여 정과 실탄을 가지고 나왔다. 추월산을 지나 고창으로 향한 진여는 일본군 2명을 사살하고 영광분파소를 공격한다는 소문을 낸 뒤 1907년 12월 30일 밤 본대를 병풍산에 두고 우익장 김익지와 군사 100여 명을 데리고 추월산으로 향했다. 김익지에게 20여 명과 함께 추월산 입구에 매복하도록 하고 자신은 80여 명을 이끌고 담양으로 내려가 담양주재소를 습격, 일본군 1명을 사살했다. 1908년 1월 1일에는 왜적들이 방심한 틈을 타 담양주재소를 2차 습격해 일본 경찰 2명을 쓰러뜨렸다.

1908년 1월 하순 진여의 의병들은 장성군 삼서면 비치라는 곳에서 행군을 멈추고 저녁밥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총성이 울린 뒤 200여 명의 일본군이 의병진을 포위하며 전진했다. 진여는 의병들에게 침착한 대응을 주문하면서 1시간 정도 교전한 뒤 일본군이 돌아갔으나 의병의 피해는 심각했다. 32명이 전사하고, 5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거병 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진여는 병풍산으로 급히 돌아가 자신도 상처를 치료중이었는데, 김준(태원)이 무등산 아래 무동촌 전투를 위한 지원을 요청해왔다. 이에 진여는 좌익장 김처원에게 50명을 배정해 지원했다.

진여의 아들 양상기는 일본 경찰에 잠입해 일본군의 이동 정보를 진여에게 전달하고 약속대로 화승총 1,000정과 대포 15문을 구입해 진여에게 보냈다. 그러나 양상기와 관련 수상하다는 정보보고가 올라가고 경찰의 신원조사 끝에 진여의 아들임이 드러나면서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1908년 4월 초순 체포 명령이 있는 것도 모르고 출근하던 상기는 한국인 경찰이 미리 알려주면서 도주했다. 이후 아버지 진여를 찾아가 훈련대장직을 맡았다. 상기는 이후 젊은이들과 함께 독립해 별도의 부대를 꾸렸다. 상기가 대장을 맡고 참모장에 유병기, 중군장에 이문거 등을 임명하고 동복, 화순, 곡성, 담양, 장성 등에서 활약했다. 그는 일본군에 도전장을 보내 싸움을 걸기도 했다. 1908년 11월 진여가 담양 대치(담양군 대전면 한재)로 광주수비대를 유인해 섬멸하는 작전을 짜고 곳곳의 의병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상기 역시 2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 참여하고, 31세의 청년대장 전수용도 200여 명과 함께 왔다. 강사문(일명 판열), 유병기, 조경환 등도 100여 명과 합류하면서 의병 규모는 900여 명으로 커졌다. 연합의병군은 병풍산에서 야간조련을 시작했다.

담양 한재마을 부녀자들이 의병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집집마다 사랑방에 무기를 보관했으며, 동네 아이들은 훈련 장면을 구경하며 의병을 꿈꿨다. 김경선이 운영하는 대장간에서는 강사문의 지휘로 무기나 부품을 만들었고, 진여, 전수용, 조경환 등은 인근 지형을 탐색하며 전략을 구상했다. 어느 정도 준비가 갖춰지자 진여는 광주수비대에 “너희들이 오지 않으면 우리들이 쳐들어간다”고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다.

선전포고를 한 지 5일째 되던 1908년 11월 23일 모습을 드러낸 일본군은 대포를 앞세우고 담양 대치로 쳐들어왔다. 1시간여의 공방전으로 의병진 일부가 무너지려하자 진여가 칼을 휘두르며 격려했고, 전투는 새벽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계속됐다. 이후 일본군이 광주로 퇴각하면서 부상 입은 의병을 치료하고 진용을 정비했으며, 상기는 틈틈이 마을로 내려가 친일파를 척결해 이들과 일본군과의 내통을 경계했다. 물러선듯 보였던 일본군은 11월 23일 밤 다시 대치로 몰려왔으며, 이 전투는 무려 12일 동안 계속됐다. 한재마을은 쑥대밭이 됐으며, 연합의병군은 물론 광주수비대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대치에서의 대접전 후 다시 독립부대로 흩어졌는데, 진여는 부하 20여 명을 데리고 주막을 순시하며 정보를 습득하고 군자금을 모았다. 광주 오치를 지나다 일본인 우편부 에도를 사살하고 광산군 서창면 만호리에 살던 친구 이회춘을 만난 뒤 담양 본진으로 향하다 광산군 송정읍 신촌리에서 일본군 11명과 마주쳤다. 헌병 7명, 경찰 4명 등 11명의 합동수색대인 이들과 1시간여의 공방전으로 일본군 4명을 사살했으나 의병 역시 5명이 죽고 6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병풍산 본진으로 돌아온 진여는 일본군 추격에 대비해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로 갔다. 진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일본군은 제2특설순사대를 풀어 광주, 장성, 영광, 나주 등을 뒤졌다. 추월산으로 들어간 일본군 야마다 소위의 토벌대가 기습했는데, 진여는 적의 후방과 우측에 50명씩을 투입해 반격에 나섰다. 한나절 계속된 교전 끝에 일본군이 적막과 함께 사라지면서 황봉하, 이치곤, 이성실 등 부하들이 정리에 나섰다. 일본군 17명을 사살했는데, 아군 역사 전사 15명, 중상 15명, 경상 21명 등의 사상자를 남겼다. 또 의병 1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5연발총 3정, 군도 3개, 망원경 1개 등을 노획한 반면 대포 1문과 화승총 7정이 적에게 넘어갔다.

추월산의 격전으로 의병 수는 270여 명까지 줄어들었으며,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신선봉으로 향했다. 이곳을 겨울 근거지로 삼아 부상자를 치료하고 군량을 조달하기로 했다. 진여는 60여 명을 데리고 담양에 머물고, 선봉장 50명, 좌익장과 우익장 100명, 도통장 50명으로 군사를 나눠 곳곳의 주막을 통해 연락하는 식으로 의병 운영방식을 변경했다. 부상자 치료와 무기 관리에 전념하던 여진은 담양군 고산마을에서 저녁식사를 하려다 일본 헌병과 경찰 30여 명의 기습을 당했다. 그러나 뒤에 있던 의병들이 일본 헌병과 경찰을 덮치면서 교전이 벌어졌고, 일본 헌병과 경찰 3~4명만이 살아 도주하는 통쾌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신세가 된 진여는 광주를 거쳐 광산, 나주, 영광, 장성 등을 전전하며 유격전을 펴다가 7개월만인 1909년 6월 초순에야 신선봉 본진으로 돌아왔다.

양상기는 대치 대접전 이후 200여 명을 이끌고 광주, 창평, 동복, 담양, 장성 등지에서 일본 기관 파괴 및 친일파 처단에 힘썼다. 1909년 3월 화순 북면 서서리, 5월 17일 담양군 무정면 덕실마을(덕곡리) 등에서 머물렀는데, 밀정 정황두의 밀고로 담양수비대에 노출되면서 담양, 옥과, 창평 등의 일본 헌병과 순사들이 합동수색대를 구성해 덕실마을을 포위했다. 이에 상기는 잠시 일본군의 공격이 멈춘 사이 탈출을 시도해 간신히 도주해 뒤돌아보니 참모장 유병기와 부하 5명만이 뒤따랐다. 상기 역시 왼쪽다리가 관통되고 손가락 2개가 떨어져나가는 큰 부상을 입었다. 나중에 부상을 입은 20여 명의 의병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 덕실마을에서 의병 28명이 참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분노한 상기는 남은 의병들과 동복주재소, 창평주재소, 옥과분견소, 담양주재소 등을 습격하고 미친 듯이 파괴했다.

일제는 1909년 8월 2,260명의 대병력을 호남에 투입해 남한대토벌작전을 개시했는데, 40일의 토벌기간을 55일로 연장하며 곳곳의 의병을 샅샅이 뒤졌다. 1909년 8월 25일 담양 갑향골 주막에서 부상을 치료중이던 진여는 가지무라 중위가 이끄는 40명의 정찰대에 결박 당해 광주감옥에 갇혔다. 일본 경찰의 악랄한 고문이 이어졌고, 동생 양서현, 부인 박순덕 등도 잡혀와 고문을 받았다. 광주 재판에서 진여는 교수형을, 양서현은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대구 감옥으로 이송돼 1910년 3월 5일 재판을 받았다. 죄목은 ‘정사변경을 목적으로 한 내란 기획 및 폭동과 강도’로, 다시 교수형을 받았다. 진여는 1910년 5월 30일 48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양상기는 4개월 뒤인 1910년 12월 20일 밤 전북 남원군 통한면 도통리의 한 민가에서 토벌대의 기습으로 붙잡혔다. 남원경찰서에서 처참한 고문을 당한 뒤 광주감옥으로 이송됐다. 참모장 이문거는 9월 21일, 중군장 유병기는 11월 8일 각각 체포돼 대질 심문을 받았다. 상기는 1910년 5월 17일 유병기와 함께 사형이 언도돼 1910년 8월 1일 27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했다. 진여의 동생 양서현, 부인 박순덕 등도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양상기의 부인 백씨는 사라져 행방조차 모르게 됐다. 진여의 시신은 사위 정병모가 간신히 찾아내 광산군 서창면 마륵리에 안장했으나 상기의 시신은 찾지 못해 무덤조차 없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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