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무섭지 아니한가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
![]() |
공포영화를 잘 보지 못하는 편이다. 난데없는 살인마가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는 ‘슬래셔 무비’(slasher movie)는 내게 쥐약이나 다름없다. 고교 시절, 내 취향을 모른 채 상영관에서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를 보게 되었는데, 나는 그야말로 한여름 밤 독 안에 든 쥐 꼴이었다.
슬래셔 무비에도 이러할 지경인데 ‘고어 영화’(gore movie: 낭자한 피와 잔혹한 살육 장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영화)는 도대체 당치도 않다. 나 자신의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이제껏 고어 무비는 한 편도 보지 않았다. 남들이 영화 ‘쏘우’(Saw) 이야기를 하며 공포가 선사하는 전율을 말할 때 나는 그저 전전긍긍 딴청을 피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오컬트’(occult) 장르는 어떨까. 무서운 영화 싫어하는 사람이 귀신 이야기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 ‘곡성’에 나온다는 명대사 “그럼 뭣이 중헌디?”를 나는 성대모사로나 겨우 들었다.
공포소설은 어떨까? 한때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공포소설 시리즈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 와 들추기엔 거리가 꽤 먼 기억일 듯싶다. 소설의 문장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향을 만들지 못한다. 소스라치게 놀랄 만한 화면 편집술 또한 불가능하다. 온갖 자극과 감각에 익숙해진 시대다. 활자만으로 공포를 연출할 수 있다고 믿기 어려운 시대이기도 하다.
강화길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대불호텔의 유령’의 제목과 표지만 보고서 조금은 심드렁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동양풍의 호텔을 표현한, 세련된 동시에 예스러운 표지가 주는 감성은 영미권 고딕 소설의 그것으로 보였다. 제목은 ‘힐하우스의 유령’을 일부러 떠올리게끔 계산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고딕 소설 혹은 공포 이야기를 표방하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과연 이 소설은 보이는 것이 다일까?
단정적으로 말해 이 소설은 보이는 것을 넘어선다. 공포의 재료는 원한이다. 원한의 발단은 전쟁과 폭력 그리고 혐오다. 그것의 주체는 인간이다. 주인공이자 주된 화자인 ‘나’는 소설가이다. 그리고 어릴 적 악령에 씌였던 적이 있다. 소설을 쓰려고 할 때 혹은 누군가와 관계를 진전시키려 할 때 악의에 가득찬 악령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소설을 기필코 완성해 악령을 누르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대불호텔이 그 소설의 모티브가 될 수 있음을 직감한다. 나는 대불호텔의 사망 사건을 취재하기로 마음먹고 친구 ‘진’의 외할머니 ‘박지윤’에게 그 사건을 청해 듣는다. 박지윤의 이야기는 쉽게 믿을 수 없는 지점으로 향해 나아간다. 대불호텔에는 유령이 혹은 유령과도 같은 원한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대불호텔에는 인간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그 무언가가 사는 것처럼 기이하고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건 대불호텔을 갖가지 방식으로 거쳐 간 숱한 사람들이다. 거기에는 공습으로 부모를 잃은 소녀가 있다. 공습이 아닌 좌우 갈등으로 부모가 살해당한 소녀 또한 있다. 혐오와 냉대에 익숙해진 화교(華僑)도 있다. 그렇게 전쟁 중에 겨우 부지한 삶을 붙들고 견디는 인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작가는 의외의 인물을 짐짓 능청스러운 태도로 입장시킨다. ‘힐하우스의 유령’을 재치 있게 배치하며 셜리 잭슨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대목에서 긴장은 이완되고 시선은 넓어진다. ‘니콜라 유치원’이라는 소설을 쓰는 작가를 화자로 활용하는 서사 기법도 유머러스하되 또한 진지하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이야기가 여름 특선 공포영화나 넷플릭스 장르물이 아닌, 활자가 알알이 박힌 소설이라는 사실을 가장 멋진 방식으로 증명해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보다 무섭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오래된 건물인 대불호텔에서 벌어진 한 사건은, 지난하고 강퍅한 우리 현대사를 미루어 짐작건대, 사실보다 깊은 진실을 담은 허구일 테다. 인천과 가까운 섬마을 사람들은 전쟁의 포화뿐 아니라, 전도된 사상으로 인한 폭력을 통과해야 했다. 어제까지 이웃이었던 사람을 오늘 빨갱이라고 해서 죽였고, 또 다른 오늘에는 반동이라 하여 죽였다.
누군가는 동인천 항구가 평생을 살아온 고향이지만, 그저 외국인으로, 우리와는 무언가 다른 이방인으로 취급되어, 손가락질당하고 차별받았다. 이 사실보다 무서운 슬래셔와 고어와 오컬트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우리 곁에 있다. 원한으로 혹은 혐오로. 그리하여 ‘대불호텔의 유령’은 진짜 무서운 공포소설이 된다. 그리고 그 장르는 단순한 공포가 아닌 강화길의 장르다.
<시인>
슬래셔 무비에도 이러할 지경인데 ‘고어 영화’(gore movie: 낭자한 피와 잔혹한 살육 장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영화)는 도대체 당치도 않다. 나 자신의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이제껏 고어 무비는 한 편도 보지 않았다. 남들이 영화 ‘쏘우’(Saw) 이야기를 하며 공포가 선사하는 전율을 말할 때 나는 그저 전전긍긍 딴청을 피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오컬트’(occult) 장르는 어떨까. 무서운 영화 싫어하는 사람이 귀신 이야기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 ‘곡성’에 나온다는 명대사 “그럼 뭣이 중헌디?”를 나는 성대모사로나 겨우 들었다.
단정적으로 말해 이 소설은 보이는 것을 넘어선다. 공포의 재료는 원한이다. 원한의 발단은 전쟁과 폭력 그리고 혐오다. 그것의 주체는 인간이다. 주인공이자 주된 화자인 ‘나’는 소설가이다. 그리고 어릴 적 악령에 씌였던 적이 있다. 소설을 쓰려고 할 때 혹은 누군가와 관계를 진전시키려 할 때 악의에 가득찬 악령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소설을 기필코 완성해 악령을 누르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대불호텔이 그 소설의 모티브가 될 수 있음을 직감한다. 나는 대불호텔의 사망 사건을 취재하기로 마음먹고 친구 ‘진’의 외할머니 ‘박지윤’에게 그 사건을 청해 듣는다. 박지윤의 이야기는 쉽게 믿을 수 없는 지점으로 향해 나아간다. 대불호텔에는 유령이 혹은 유령과도 같은 원한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대불호텔에는 인간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그 무언가가 사는 것처럼 기이하고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건 대불호텔을 갖가지 방식으로 거쳐 간 숱한 사람들이다. 거기에는 공습으로 부모를 잃은 소녀가 있다. 공습이 아닌 좌우 갈등으로 부모가 살해당한 소녀 또한 있다. 혐오와 냉대에 익숙해진 화교(華僑)도 있다. 그렇게 전쟁 중에 겨우 부지한 삶을 붙들고 견디는 인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작가는 의외의 인물을 짐짓 능청스러운 태도로 입장시킨다. ‘힐하우스의 유령’을 재치 있게 배치하며 셜리 잭슨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대목에서 긴장은 이완되고 시선은 넓어진다. ‘니콜라 유치원’이라는 소설을 쓰는 작가를 화자로 활용하는 서사 기법도 유머러스하되 또한 진지하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이야기가 여름 특선 공포영화나 넷플릭스 장르물이 아닌, 활자가 알알이 박힌 소설이라는 사실을 가장 멋진 방식으로 증명해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보다 무섭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오래된 건물인 대불호텔에서 벌어진 한 사건은, 지난하고 강퍅한 우리 현대사를 미루어 짐작건대, 사실보다 깊은 진실을 담은 허구일 테다. 인천과 가까운 섬마을 사람들은 전쟁의 포화뿐 아니라, 전도된 사상으로 인한 폭력을 통과해야 했다. 어제까지 이웃이었던 사람을 오늘 빨갱이라고 해서 죽였고, 또 다른 오늘에는 반동이라 하여 죽였다.
누군가는 동인천 항구가 평생을 살아온 고향이지만, 그저 외국인으로, 우리와는 무언가 다른 이방인으로 취급되어, 손가락질당하고 차별받았다. 이 사실보다 무서운 슬래셔와 고어와 오컬트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우리 곁에 있다. 원한으로 혹은 혐오로. 그리하여 ‘대불호텔의 유령’은 진짜 무서운 공포소설이 된다. 그리고 그 장르는 단순한 공포가 아닌 강화길의 장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