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이건희 컬렉션’을 보려는 관람객의 발길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이중섭·김환기·이응노·오지호·임직순….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거장들이다. 이들의 작품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증받은 작품 30점으로 전시회를 열고 있는 광주시립미술관은 연일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 표가 금세 동나는 바람에 입장권을 구하기 위한 ‘예약 전쟁’이 치열하다. 얼마 전 ‘백신 접종 전쟁’만큼은 아니지만, 이번에 작품 관람의 기회를 얻는 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다. 코로나로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문화 향유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된 것일까.
‘이건희 기증품 열풍’은 비단 광주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다.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은 개막 2주 만에 관람객 1만 명을 돌파했다. 천경자의 ‘꽃과 나비’ 김환기의 ‘무제’ 등 작품 21점을 기증받은 광양 전남도립미술관에도 개최 시기를 묻는 시민들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지난주 전시를 시작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치열한 예매 전쟁과 함께 일찌감치 한 달 치 예약이 마감됐을 정도다.
확 트인 황희, 꽉 막힌 황희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용산 본관 상설관에 마련된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전에서는 저 유명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비롯해서 석보상절과 청동기시대 ‘붉은간토기’ 등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 77점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일반 미술관과 달리 이곳 전시는 금속제 조각과 공예품, 도기와 토기, 고문서와 전적 등 출품작들의 형식과 성격이 폭넓고 다양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격동 서울관에 차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도 김환기의 걸작 ‘여인들과 항아리’ 등 34명의 작품 58점이 선을 보이고 있다. 이곳에서는 근대 고난기 한민족을 상징하는 이중섭의 ‘황소’와 박수근의 투박하지만 편안한 화강암 질감의 ‘절구질하는 여인’도 만날 수 있다. 모두 교과서나 화집에서만 볼 수 있었던 작품들이다.
이처럼 용산에 가면 한국 미술 최대 명작들을 볼 수 있고 소격동에 가면 국보나 보물급 명품을 생생하게 볼 수 있으니, 서울 사람들은 참 좋겠다. 물론 내년 하반기부터 지역별 순회 전시를 순차적으로 추진한다니 반갑긴 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이들 작품을 한데 모아 볼 수 있는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관’(이하 이건희 기증관)의 지방 건립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유족은 지난 4월, 2만3천여 점의 미술품과 문화재 등을 국가미술관 등에 기증했다. 이때부터 전국의 지자체들은 지역 균형 발전과 문화 분권을 내세우며 자기 지역에 기증관을 유치하기 위한 열띤 경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결과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났다. 단 한 번의 공론화 과정조차 없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서울 송현동과 용산 부지로 후다닥 결정해 버린 것이다.
또 서울인가? 기증관 유치에 공을 들인 지자체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왜 서울인가? 전국이 들끓었다. 하지만 문체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유치에 사활을 걸었던 30여 지자체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정부가 후보지로 지목한 용산가족공원은 국내 최대의 사립미술관인 ‘리움’과 같은 용산구에 있다. 후보지 중 또 한 곳인 종로구 송현동 역시 이곳과 멀지 않다. 게다가 경기도 용인에는 호암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수도권에는 이미 수준급 삼성가 미술관이 두 곳이나 있는데, 여기에 또 이건희 기증관을 국립으로 짓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미술관 부지 선정 기준 등에 대한 어떠한 공청회나 설명회도 연 적이 없다. 유치를 원하는 지자체엔 응모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문체부의 독단적 결정과 일방적 통보만 있었을 뿐이다. 더욱 어이가 없는 건 황희 문체부 장관의 발언이었다. “지자체의 유치 과열 경쟁은 엄청난 국고 낭비로 이어진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황 장관은 지방 분권과 지역 균형 발전 같은 여러 지자체의 주장 따위에는 원래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조선의 황희 정승은 이 사람 말에도 귀 기울이고 저 사람 말에도 귀 기울였건만, 오늘날 황희 장관은 처음부터 솜으로 귀를 틀어막은 것이다. 아무래도 문체부 내부에선 서울로 이미 결론을 내리고 지방은 그저 들러리로 내세웠지 않나 싶다. 그렇지 않아도 지방의 요구가 뜨거운 판에 미리 나서서 그 ‘뜨거운 감자’를 만질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한 것일 게다. 전형적인 ‘행정 편의주의’ 아닌가.
이건희 기증관 왜 서울인가
문체부는 용산과 송현동을 부지로 결정하면서 “서울에 있어야 접근성이 뛰어나 문화 향유의 기회가 늘어난다”고 했다. 하지만 ‘물리적 접근성’과 ‘문화예술 향유’는 큰 연관성이 없다. 이는 방안 퉁소여서 견문이 많지 않은 나의 주장이 아니라, 바깥나들이를 자주 해 봐서 해외미술관을 잘 아는 전문가들의 말이다. 일단 미술평론가 홍경한 씨의 말을 들어 보자.
“지구촌 곳곳엔 뜻밖의 자리에 세워졌지만 특성화된 콘텐츠와 전문적 체계 아래 분류된 독자성으로 지역경제를 견인하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수두룩하다. 일례로 미국 매사추세츠 현대미술관은 노스애덤스라는 작은 동네 산속에 있으나, 한 해 2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다. 호주의 섬 태즈메이니아에 둥지를 튼 뮤지엄 오브 올드 앤드 뉴 아트도 접근성 면에선 거의 최악이다. 그럼에도 현대미술을 다루는 과감한 실험 방식으로 호바트 관광객들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지구상에서 가장 메마르고 척박한 북극에 위치한 노르웨이의 스발바르 현대예술센터처럼 세계 각지엔 산간벽지임에도 문화예술을 향유하기 위해 관람객들이 아침부터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공간이 드물지 않다.” 결론적으로 문화예술 향유 확대 차원에서라도 ‘접근성’이 좋은 서울에 기증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문체부의 ‘서울 입지론’은 근거가 아주 빈약하고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접근성이 아니라 정책적 판단과 의지이다. 이건희 기증관의 지방 건립은 수도권 집중화와 지방 소멸을 극복하는 국토 균형 발전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문체부는 지금이라도 이건희 기증관 서울 설립 계획을 철회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모든 게 그렇지만 문화 또한 나눌 때 모두 행복해진다. 아, 우리 같은 시골 사람들도 당신네 서울 사람들처럼 수준 높은 문화를 누리고 싶다. “혼자(서울)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주필
기증받은 작품 30점으로 전시회를 열고 있는 광주시립미술관은 연일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 표가 금세 동나는 바람에 입장권을 구하기 위한 ‘예약 전쟁’이 치열하다. 얼마 전 ‘백신 접종 전쟁’만큼은 아니지만, 이번에 작품 관람의 기회를 얻는 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다. 코로나로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문화 향유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된 것일까.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용산 본관 상설관에 마련된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전에서는 저 유명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비롯해서 석보상절과 청동기시대 ‘붉은간토기’ 등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 77점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일반 미술관과 달리 이곳 전시는 금속제 조각과 공예품, 도기와 토기, 고문서와 전적 등 출품작들의 형식과 성격이 폭넓고 다양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격동 서울관에 차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도 김환기의 걸작 ‘여인들과 항아리’ 등 34명의 작품 58점이 선을 보이고 있다. 이곳에서는 근대 고난기 한민족을 상징하는 이중섭의 ‘황소’와 박수근의 투박하지만 편안한 화강암 질감의 ‘절구질하는 여인’도 만날 수 있다. 모두 교과서나 화집에서만 볼 수 있었던 작품들이다.
이처럼 용산에 가면 한국 미술 최대 명작들을 볼 수 있고 소격동에 가면 국보나 보물급 명품을 생생하게 볼 수 있으니, 서울 사람들은 참 좋겠다. 물론 내년 하반기부터 지역별 순회 전시를 순차적으로 추진한다니 반갑긴 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이들 작품을 한데 모아 볼 수 있는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관’(이하 이건희 기증관)의 지방 건립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유족은 지난 4월, 2만3천여 점의 미술품과 문화재 등을 국가미술관 등에 기증했다. 이때부터 전국의 지자체들은 지역 균형 발전과 문화 분권을 내세우며 자기 지역에 기증관을 유치하기 위한 열띤 경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결과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났다. 단 한 번의 공론화 과정조차 없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서울 송현동과 용산 부지로 후다닥 결정해 버린 것이다.
또 서울인가? 기증관 유치에 공을 들인 지자체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왜 서울인가? 전국이 들끓었다. 하지만 문체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유치에 사활을 걸었던 30여 지자체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정부가 후보지로 지목한 용산가족공원은 국내 최대의 사립미술관인 ‘리움’과 같은 용산구에 있다. 후보지 중 또 한 곳인 종로구 송현동 역시 이곳과 멀지 않다. 게다가 경기도 용인에는 호암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수도권에는 이미 수준급 삼성가 미술관이 두 곳이나 있는데, 여기에 또 이건희 기증관을 국립으로 짓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미술관 부지 선정 기준 등에 대한 어떠한 공청회나 설명회도 연 적이 없다. 유치를 원하는 지자체엔 응모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문체부의 독단적 결정과 일방적 통보만 있었을 뿐이다. 더욱 어이가 없는 건 황희 문체부 장관의 발언이었다. “지자체의 유치 과열 경쟁은 엄청난 국고 낭비로 이어진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황 장관은 지방 분권과 지역 균형 발전 같은 여러 지자체의 주장 따위에는 원래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조선의 황희 정승은 이 사람 말에도 귀 기울이고 저 사람 말에도 귀 기울였건만, 오늘날 황희 장관은 처음부터 솜으로 귀를 틀어막은 것이다. 아무래도 문체부 내부에선 서울로 이미 결론을 내리고 지방은 그저 들러리로 내세웠지 않나 싶다. 그렇지 않아도 지방의 요구가 뜨거운 판에 미리 나서서 그 ‘뜨거운 감자’를 만질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한 것일 게다. 전형적인 ‘행정 편의주의’ 아닌가.
이건희 기증관 왜 서울인가
문체부는 용산과 송현동을 부지로 결정하면서 “서울에 있어야 접근성이 뛰어나 문화 향유의 기회가 늘어난다”고 했다. 하지만 ‘물리적 접근성’과 ‘문화예술 향유’는 큰 연관성이 없다. 이는 방안 퉁소여서 견문이 많지 않은 나의 주장이 아니라, 바깥나들이를 자주 해 봐서 해외미술관을 잘 아는 전문가들의 말이다. 일단 미술평론가 홍경한 씨의 말을 들어 보자.
“지구촌 곳곳엔 뜻밖의 자리에 세워졌지만 특성화된 콘텐츠와 전문적 체계 아래 분류된 독자성으로 지역경제를 견인하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수두룩하다. 일례로 미국 매사추세츠 현대미술관은 노스애덤스라는 작은 동네 산속에 있으나, 한 해 2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다. 호주의 섬 태즈메이니아에 둥지를 튼 뮤지엄 오브 올드 앤드 뉴 아트도 접근성 면에선 거의 최악이다. 그럼에도 현대미술을 다루는 과감한 실험 방식으로 호바트 관광객들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지구상에서 가장 메마르고 척박한 북극에 위치한 노르웨이의 스발바르 현대예술센터처럼 세계 각지엔 산간벽지임에도 문화예술을 향유하기 위해 관람객들이 아침부터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공간이 드물지 않다.” 결론적으로 문화예술 향유 확대 차원에서라도 ‘접근성’이 좋은 서울에 기증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문체부의 ‘서울 입지론’은 근거가 아주 빈약하고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접근성이 아니라 정책적 판단과 의지이다. 이건희 기증관의 지방 건립은 수도권 집중화와 지방 소멸을 극복하는 국토 균형 발전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문체부는 지금이라도 이건희 기증관 서울 설립 계획을 철회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모든 게 그렇지만 문화 또한 나눌 때 모두 행복해진다. 아, 우리 같은 시골 사람들도 당신네 서울 사람들처럼 수준 높은 문화를 누리고 싶다. “혼자(서울)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