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어여삐 여겼던 조선의 왕들
다들 알다시피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이다. 실록의 기본 자료는 사관(史官)이 날마다 일어나는 사실들을 기록한 사초(史草)였다. 사초는 왕조차도 볼 수 없었으며, 실록 편찬은 직전의 왕이 죽은 뒤 다음 왕이 즉위한 뒤에야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왕이라 해도 자신이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궁금해 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 한번은 세종대왕이 자기 아버지인 태종에 대해 쓴 기록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데 신하들이 그 부당함을 들고 나서니 결국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어떤 임금도 심지어 연산군조차도 대놓고 실록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아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오늘은 실록의 여기저기를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둘러보고자 한다.
“농서(農書)에서는 대개 일찍 파종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의 수령들은 예전의 습관에 익숙해져 비록 파종 때를 당하고도 스스로 ‘망종(芒種)이 아직 멀다’ 하고는 번번이 시기를 놓치곤 한다. 혹은 수령이 감사에게 보고하여도 감사는 호조에 이첩하고, 호조에서는 의정부에 보고하며, 이러는 사이 망종은 이미 지나가고 만다. 이래서야 어찌 백성을 사랑하는 자의 도리라 할 것인가. 누구든 나와 함께 착한 정치를 하려는 자들은 내가 위임한 뜻을 본받아 미리 미리 조치하되, 너무 이르게도 말고 너무 늦게도 하지 말라.”(세종 26년 윤7월25일) 세종 임금은 관리들이 농민들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타성적으로 업무를 처리함으로써 때를 놓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진실로 ‘착한 정치’ 하고 싶다면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의 마음은 참으로 지극해서, 심지어 잡초 제거 같은 사소한 일까지도 일일이 챙긴다. “금번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반드시 호미질로 제거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무릇 사람이 하는 일은 마땅히 진력하여 늦출 것이 아니니, 제초를 부지런히 권유하며 때를 잃지 않게 하여야 결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을 권장할 때는 한갓 사납게 하는 것을 일삼아 독촉하고 벌을 주는 것은 불가하니, 이 뜻을 알아서 가혹하지도 완만하지도 않게 조처하라.”(세종 28년 5월14일)
이는 임금이 각 지방 관찰사(지금의 도지사)에게 지시한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무조건 농민들을 닦달해서는 안 된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역시 임금의 어진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데, 그거야 ‘세종 같은 훌륭한 임금이니까 그랬겠지’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임금도 다 그랬다.
“나라가 의지하는 것은 백성이고 백성이 하늘처럼 우러르는 것은 먹는 것이다. 한데 근년에 참혹한 기근을 여러 번 만나 굶어 죽는 자가 줄짓고 있으니 한밤중에 생각하면 아픔이 내 몸에 있는 듯하다. 가뭄과 홍수야 어쩔 수 없는 재해지만, 도랑이 수리되지 않은 것은 사람이 힘을 들이지 않아서이다. 그러니 식량을 넉넉히 할 방법에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현종 12년 2월21일)
세조 또한 어려운 백성을 살뜰히 살폈다. “지난해에 흉년으로 민간에서 일은 많아지고 농사짓는 동안 먹을 양식은 넉넉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밭갈이를 제때에 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환과고독(鰥寡孤獨)과 가난한 백성으로서 밭갈이를 감당할 수 없는 자에게는 요역(나라에서 세금 대신 시키던 노동)을 너그럽게 해 주고, 먹을 양식을 대 주어 농사에 때를 잃지 않게 하라.”(세조 2년 5월12일)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거나 자연재해가 있게 되면 모든 임금이 스스로 ‘제 탓’이라 여기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과덕한 내가 밤낮으로 조심하기를 봄 얼음을 건너는 듯하고, 백성들의 주림을 내 몸 주린 듯이 염려하였으나, 장마와 가뭄으로 여름 보리가 영글지 못하고 가을 곡식이 익지 않았다. 재앙을 부른 허물이 실로 내게 있기에, 조세(租稅)를 덜며 곡식을 풀어 진휼(賑恤: 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와줌)에 힘쓰고 있지만, 은혜가 흡족하지 못하여 울부짖는 백성들이 처자를 이끌고 구렁을 헤매고 있다.”
이렇게 말한 이는 중종 임금이다. “수령들 가운데는 공연히 진휼하는 겉치레만 떠벌리고 실제 혜택을 베풀지 않는 자도 있고, 기민(飢民)을 구제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백성을 괴롭히는 자도 있으며, 무능하거나 게을러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구제할 방도를 모르는 자도 있다. 그러니 이를 잘 살펴 입을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는 백성들로 하여금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라.”(중종 6년 10월 9일)
‘별의 순간’만 잡으려 하지 말고
최근 전남농업박물관에서는 ‘조선왕조실록 전라도 농업 관련 자료’란 책을 펴냈다. 앞서 인용한 내용은 모두 이 책을 뒤적이며 아무데서나 임의로 뽑아 본 것이다. 구백칠십오 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조선시대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1893권 중 전라도 농업과 관련된 내용만을 모은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농사 형태와 정책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전망이라는데, 나로서는 이 책을 통해 당시 임금들이 백성을 얼마나 ‘어여삐’ 여겼는지 새삼 느끼면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여삐 여긴다’는 말은 훈민정음 서문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어리석은 백성이 할 말이 있어도 제 뜻을 쉽게 펴지 못하느니라. 내 이를 ‘어엿비 녀겨’ 새로 28자를 만드노니.” 여기에서의 ‘어엿비 녀겨’는 ‘예쁘게 여겨’란 뜻이 아니라 ‘불쌍하게 생각하여’란 뜻이다.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임금의 마음,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하겠다.
바야흐로 대통령을 뽑는 대선(大選)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이른바 잠룡(潛龍: 아직 하늘에 오르지 않고 물속에 숨어 있는 용)으로 거론되는 정치인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여권에서는 지지율에서 줄곧 수위를 차지하며 앞서가고 있는 이재명을 비롯해서 이낙연·정세균 등 ‘빅3’(Big Three)가 지지 세력 확충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야권에서는 윤석열이 앞서가는 가운데 안철수·홍준표 등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너도 나도 ‘별의 순간’을 잡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중 과연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고 국민을 위해 일할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밤중에 잠 못 들고, 국민의 아픔을 내 몸의 아픔처럼 여기며, 국민의 주림을 내 몸 주린 듯이 염려하는 이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아무래도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이 혹시 이 글을 보게 된다면, 그들 또한 자나 깨나 백성을 생각했던 조선의 왕들을 본받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주필
“농서(農書)에서는 대개 일찍 파종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의 수령들은 예전의 습관에 익숙해져 비록 파종 때를 당하고도 스스로 ‘망종(芒種)이 아직 멀다’ 하고는 번번이 시기를 놓치곤 한다. 혹은 수령이 감사에게 보고하여도 감사는 호조에 이첩하고, 호조에서는 의정부에 보고하며, 이러는 사이 망종은 이미 지나가고 만다. 이래서야 어찌 백성을 사랑하는 자의 도리라 할 것인가. 누구든 나와 함께 착한 정치를 하려는 자들은 내가 위임한 뜻을 본받아 미리 미리 조치하되, 너무 이르게도 말고 너무 늦게도 하지 말라.”(세종 26년 윤7월25일) 세종 임금은 관리들이 농민들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타성적으로 업무를 처리함으로써 때를 놓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의 마음은 참으로 지극해서, 심지어 잡초 제거 같은 사소한 일까지도 일일이 챙긴다. “금번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반드시 호미질로 제거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무릇 사람이 하는 일은 마땅히 진력하여 늦출 것이 아니니, 제초를 부지런히 권유하며 때를 잃지 않게 하여야 결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을 권장할 때는 한갓 사납게 하는 것을 일삼아 독촉하고 벌을 주는 것은 불가하니, 이 뜻을 알아서 가혹하지도 완만하지도 않게 조처하라.”(세종 28년 5월14일)
이는 임금이 각 지방 관찰사(지금의 도지사)에게 지시한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무조건 농민들을 닦달해서는 안 된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역시 임금의 어진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데, 그거야 ‘세종 같은 훌륭한 임금이니까 그랬겠지’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임금도 다 그랬다.
“나라가 의지하는 것은 백성이고 백성이 하늘처럼 우러르는 것은 먹는 것이다. 한데 근년에 참혹한 기근을 여러 번 만나 굶어 죽는 자가 줄짓고 있으니 한밤중에 생각하면 아픔이 내 몸에 있는 듯하다. 가뭄과 홍수야 어쩔 수 없는 재해지만, 도랑이 수리되지 않은 것은 사람이 힘을 들이지 않아서이다. 그러니 식량을 넉넉히 할 방법에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현종 12년 2월21일)
세조 또한 어려운 백성을 살뜰히 살폈다. “지난해에 흉년으로 민간에서 일은 많아지고 농사짓는 동안 먹을 양식은 넉넉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밭갈이를 제때에 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환과고독(鰥寡孤獨)과 가난한 백성으로서 밭갈이를 감당할 수 없는 자에게는 요역(나라에서 세금 대신 시키던 노동)을 너그럽게 해 주고, 먹을 양식을 대 주어 농사에 때를 잃지 않게 하라.”(세조 2년 5월12일)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거나 자연재해가 있게 되면 모든 임금이 스스로 ‘제 탓’이라 여기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과덕한 내가 밤낮으로 조심하기를 봄 얼음을 건너는 듯하고, 백성들의 주림을 내 몸 주린 듯이 염려하였으나, 장마와 가뭄으로 여름 보리가 영글지 못하고 가을 곡식이 익지 않았다. 재앙을 부른 허물이 실로 내게 있기에, 조세(租稅)를 덜며 곡식을 풀어 진휼(賑恤: 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와줌)에 힘쓰고 있지만, 은혜가 흡족하지 못하여 울부짖는 백성들이 처자를 이끌고 구렁을 헤매고 있다.”
이렇게 말한 이는 중종 임금이다. “수령들 가운데는 공연히 진휼하는 겉치레만 떠벌리고 실제 혜택을 베풀지 않는 자도 있고, 기민(飢民)을 구제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백성을 괴롭히는 자도 있으며, 무능하거나 게을러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구제할 방도를 모르는 자도 있다. 그러니 이를 잘 살펴 입을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는 백성들로 하여금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라.”(중종 6년 10월 9일)
‘별의 순간’만 잡으려 하지 말고
최근 전남농업박물관에서는 ‘조선왕조실록 전라도 농업 관련 자료’란 책을 펴냈다. 앞서 인용한 내용은 모두 이 책을 뒤적이며 아무데서나 임의로 뽑아 본 것이다. 구백칠십오 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조선시대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1893권 중 전라도 농업과 관련된 내용만을 모은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농사 형태와 정책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전망이라는데, 나로서는 이 책을 통해 당시 임금들이 백성을 얼마나 ‘어여삐’ 여겼는지 새삼 느끼면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여삐 여긴다’는 말은 훈민정음 서문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어리석은 백성이 할 말이 있어도 제 뜻을 쉽게 펴지 못하느니라. 내 이를 ‘어엿비 녀겨’ 새로 28자를 만드노니.” 여기에서의 ‘어엿비 녀겨’는 ‘예쁘게 여겨’란 뜻이 아니라 ‘불쌍하게 생각하여’란 뜻이다.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임금의 마음,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하겠다.
바야흐로 대통령을 뽑는 대선(大選)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이른바 잠룡(潛龍: 아직 하늘에 오르지 않고 물속에 숨어 있는 용)으로 거론되는 정치인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여권에서는 지지율에서 줄곧 수위를 차지하며 앞서가고 있는 이재명을 비롯해서 이낙연·정세균 등 ‘빅3’(Big Three)가 지지 세력 확충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야권에서는 윤석열이 앞서가는 가운데 안철수·홍준표 등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너도 나도 ‘별의 순간’을 잡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중 과연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고 국민을 위해 일할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밤중에 잠 못 들고, 국민의 아픔을 내 몸의 아픔처럼 여기며, 국민의 주림을 내 몸 주린 듯이 염려하는 이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아무래도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이 혹시 이 글을 보게 된다면, 그들 또한 자나 깨나 백성을 생각했던 조선의 왕들을 본받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