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순 인문지행 대표] 기껏 한 줌의 도덕이 희망의 좌표인 까닭은
2021년 05월 10일(월) 08:00
때때로 우리는 나아갈 방향을 잃은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느낌에 갇히곤 한다. 지금, 직면하는 현실 모습 역시 가치와 방향의 혼란으로 보일 수 있다. 사실 요란하고 화려한 언사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숨기는지, 또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시절이다. 바로 이럴 때 출구 없는 터널에 갇혔거나 낭떠러지 위에 혼자 선 듯한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한다.

하지만 냉정한 눈으로 현실을 성찰하면 터널과 낭떠러지를 만드는 원인이 정작 불안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불안의 전염은 늘 같은 식으로 반복된다. 어제로 회귀하려는 거칠고 조야한 모욕의 소리가 거세지고, 한편에서는 낯선 수사적 기호가 마치 시대의 고통을 통으로 치료하는 신약인 양 난무한다.

과거 제도로의 회귀 욕망은 끈질기고 강렬해서 잠잠하다가도 망령처럼 되살아나 새로운 길을 부정하고 파괴하려고 한다. 이 욕망에는 미래를 향한 용기와 의지 대신, 독점의 탐욕과 자기만족만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낡은 가치의 과감한 극복을 말하는 쪽도 다르지 않다. 사용하는 언어적 기교만 다르다는 것이 문제다. 새삼 스피노자가 남긴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라는 말의 의미를 확인한다.

고귀함의 의미는, 숨어 있다가 때가 되면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자신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은 모르는 가치의 아름다움이다. 고귀함은 처한 상황의 유불리를 먼저 계산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야만적 폭력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고귀함을 파괴하는 것이 야만성이다. 이 야만이 친절한 얼굴과 다정한 계몽의 목소리로 다가올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꺼이 마술피리 소리에 취해서 파멸의 길을 갔던가.

‘미니마 모랄리아’는 테오도르 아도르노(1903-1969)가 쓴 철학적 수필이다. ‘미니마 모랄리아’를 번역하면 ‘한 줌의 도덕’ 또는 ‘최소한의 도덕’이라 할 수 있다. 아도르노는 독일의 대표적 현대 철학자이지만, 유대인으로 태어난 탓에 나치의 학살을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가 한껏 무르익은 미국에서, 인간이란 그저 물질적 생산 과정의 부속물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이 당시의 글이 바로 ‘미니마 모랄리아’이다.

이 책의 부제는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이다. 왜 아도르노는 이런 부제를 선택했을까? 상처로 인한 고통을 성찰로 연결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모든 것이 공장 기계의 속도에 맞춰서 시작하고 끝나며, 부속물로 규정되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과 ‘사는 것’은 크게 다르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존재에게 한 줌의 도덕 따위는 필요 없다. 부속품답게 잘 돌아가면서 한 자리를 지키면 그만이다. 그런데 왜 한 줌의 도덕인가? 부속품이 아닌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도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삶을 제대로 살 것인가?

완벽하며 아름다우며 거대한 도덕은 어디에도 없다. 완벽한 삶이 없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줌의 도덕이다. 매일 탈 없이 잘 돌아가는 생산 기계의 만족감 대신, 자신의 상처를 통해서 타인의 아픔까지 성찰하는 몸짓을 익히는 것이다. ‘세상이 다 이래서’라는 말로 변명하지 않는 삶을 위해서, 옳고 그름의 경계가 뒤섞이는 혼돈의 현실일수록 더욱 한 줌의 도덕이 필요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예언적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나대는 지식인과 전문가들의 야시장을 기웃대지 않으며, 지나간 시간의 되돌리기 소동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크고 웅장한 도덕의 견고한 체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한 줌의 도덕은 세상의 모든 진실의 억압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고백하며, 일상에서는 타인의 복제품이 되지 않기 위해서 조작된 욕망 기계의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도덕 의식은 자신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기에 늘 아픔과 소외의 장소를 향하는 만남이며, 누구나 주체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미래를 향한 길이자, 희망의 좌표다. 이 한 줌의 도덕이 소멸하지 않고 빛나는 한 우리는 서로에게 도달할 수 있다.

철학자 아도르노보다 더 독한 극한의 절망을 경험한 파울 첼란의 시 한 구절을 옮긴다. “내가 너 같았으면. 네가 나 같았으면./ 우리 한 무역풍 아래 서 있지 않았던가?/ 지금은 낯선 이들인 우리.”
이 기사는 광주일보 홈페이지(www.kwangj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kwangju.co.kr/article.php?aid=1620601200720323078
프린트 시간 : 2025년 06월 17일 07:0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