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달재 화백 ‘가지 끝 흰 것 하나’전, 6월 13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
“다양한 시도로 화려한 매화 표현했죠”
조부 허백련 춘설헌 매화서 영감
홍매·모란·포도 등 40여점 선보여
다양한 돌·다구 소재 추상도 전시
2021년 03월 18일(목) 00:00
허달재 화백 초청 전시회 ‘가지 끝 흰 것 하나’전이 오는 6월13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그림 속 매화를 본 후 ‘진짜’ 매화를 보러갔다. 지난 13일 직헌(直軒) 허달재((70) 화백과 찾은 무등산 춘설헌의 매화는 아직 자태를 완전히 드러내지는 않았다. 흐드러지게 피어있지 않은 터라 오히려 몇몇 꽃들이 귀해 보였다. 가지 하나 하나를 붙잡고 향기를 맡았다. 꽃잎 하나에서 그리 진한 향기가 묻어나오는 지 몰랐다. 해질녘이라 향기가 더 짙다고 했다. 할아버지 의재(毅齋) 허백련(1891~1976) 화백이 심은 매화와 손자 허달재 화백이 심은 매화가 어우러진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할아버지는 늘 “내 마음에 꼭 드는 그림 한 점 그리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림 속 매화로 다시 돌아가 본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허달재 화백의 전시 ‘가지 끝 흰 것 하나 ’(6월13일까지)전에는 매화, 모란, 포도 그림을 비롯해 돌과 다기(茶器)를 소재로 한 신작 등 40여점이 나왔다. 중국 베이징 화원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최근 10여년간 중국에서 주로 활동했던 허 화백이 광주에서 대규모 기획전을 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시립미술관이 중진작가 초대전으로 기획했다.

갤러리 입구에서 백매의 소박하고 고즈넉한 자태에 잠시 마음을 빼앗겼다면, 전시장 중앙에 나란히 걸린 3점의 대형 홍매 작품은 화려함에 작은 탄성이 나온다. 자유분방하게 뻗은 가지 위에 놓인 건 꽃이 아니라 하나의 점들이다. 그의 매화 그림에서는 현대적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붉은빛은 홍차, 노란빛은 치자물, 회색빛은 먹물을 칠해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가지와 꽃을 얹었다. 금분(金粉)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화려함을 더했다.

“화선지에 매화만을 그리기도 하다가 바탕색을 엷게 깔아 홍매, 백매 등을 그리기 시작했죠. 매화가 의외로 화려한 느낌이 나는데 먹만 가지고는 그 느낌을 표현하기가 힘들어 바탕색을 넣어보고, 채색도 하면서 이런 저런 실험을 해봤습니다. 초기에는 매화 꽃술을 세밀하게 그렸는데 자연스레 꽃을 자세히 그리는 대신 하나의 점으로 표현하며 다른 느낌을 넣어보려 했습니다.”

의재의 장손으로 다섯살 무렵부터 할아버지에게 서예를 배우며 춘설헌에 드나들던 그다. 봄을 알리는 매화는 언제나 그와 함께였고, 사군자를 모두 배웠지만 그 중에서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는 건 매화였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매화 그림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접하기 어려운 화풍이었기 때문이다.

“그림에 금가루를 칠하고, 화려하고 예쁘게만 그렸으면 그리 평가를 받지는 못했을 테지요. 서예에서 글씨를 쓰듯, 붓의 움직임이 살아있어 매화 가지가 움직이는 것 같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매화꽃을 실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아 어쩌면 꽃하나 없는 매화 작품인 셈이죠. 우리 그림의 특성인 ‘정중동’을 어려서부터 몸에 익혀 그게 점과 선으로만 나타나더라도 어떤 느낌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같습니다.”

‘모란’
허 화백은 “보는 게 반 공부”라고 말했다. 곁에 두고 자꾸 보고 접하니 좋아지고, 자연스레 작품이 됐다. 광주에서는 처음 선보인 ‘모란’ 그림도 마찬가지다. 30여년전 여러나라에서 모란 씨를 가져와 작업실에 심었고, 모란이 필 때면 늘 함께였다. 이번에 나온 모란 작품은 가지와 이파리를 생략하고 꽃만 부각시킨 게 특징이다. 하나 둘 모으기 시작한 다양한 ‘돌’과 ‘다구’ 역시 마찬가지다. 춘설헌에서 재배한 ‘춘설차’를 마시는 그에게 ‘다구’는 생활용품이다. 화선지 100장을 잘라두고, 술 한잔, 차 한잔 마시며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리다 보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고 자연스러운 작품이 나왔다. 추상성이 가미된 돌 그림도 마찬가지다. 또 사군자는 고리타분하고,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을 깨는 병풍 작품도 눈길을 끈다.

“자꾸 보니 좋은 것들은 마음 속에 나도 모르게 남아있더군요.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꺼내 보고, 그것들을 그리는 과정이 참 재미있습니다. 작업할 땐 ‘내가 생각하는 것’을 일단 던져 보지요. 상대와 부딪치기도 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집니다. 내 그림은 나를 찾아가는, 나의 색깔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죠. 그림에는 어떤 욕심도 들어가면 안됩니다. 변화는 전통에서 나온다는 사실도 늘 잊지 않으려합니다.”

‘누구 누구의 손자’는 그에게 운명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림도 그림이지만 ‘삶’을 늘 강조했던 할아버지는 “생활은 검소하게 하고, 마음은 겸손하게 해라. 사회에, 또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손자라고 해서 제자들보다 더 잘해 주거나 그런 건 없으셨어요.(웃음) 새록새록 서운했던 게 떠오르기도 하는데 그 때 그랬으면 나약해졌을 것같아요. 그림은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해야하는 것, 자기 몸에 체득될 때까지 줄곧 노력하는 것, 그게 할아버지의 가르침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허 화백은 지금이 작업의 절정이라고 했다. 앞으로 먹색만 가지고 승부하는 대작을 그려볼 생각이다. 함평군 손불면에 작업실을 마련중인 그는 두번째 동화책도 낼 예정이다. 직접 글을 쓰고 그림까지 그리는 작업이라 머리가 아프지만 이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

허 화백과 인터뷰를 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 중의 하나가 ‘재미있다’는 표현이었다. 60여년 가까이 해 온 일이 여전히 재미있다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춘설헌을 둘러보며 허 화백은 매화가 지면 계절 따라 또 다른 꽃이 핀다고 했다. 철쭉, 아그배 나무꽃, 가을에는 이불처럼 깔리는 은행잎도 아름답다 하니 전시장의 꽃구경에 이어, 춘설헌으로 꽃구경을 나서도 좋을 듯하다.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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