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철학자 최진석과 책 읽고 건너가기
11월의 책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11월의 책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 백준선 작 ‘망망대해의 노인’ |
평생 한 가지 일에 자신을 모두 바치며 살아온 사람들의 말에서는 수행자의 기풍이 감지된다. 진실하게 자신을 모두 바치면 그렇게 된다.
어부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출렁이는 바다와 헤밍웨이의 원고지 사이는 부부처럼 가깝다. 헤밍웨이는 원고지를 바다 삼아 낚시하였고,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바다를 원고지 삼아 말을 남긴다. “물고기가 물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나도 어부로 태어났을 뿐이야.” 이제 그는 자신을 향해서만 진실하게 오래 걷다가 자신의 투쟁 대상도 자기 자신을 향해 걷는다는 동질감을 느끼고 그와의 경계를 과감하게 허물어 버린다.
세상의 이치는 ‘어쩔 수 없이 부여받은 일’을 각자 자신의 임무로 알고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는 “자신을 너무 속여선 안 된다.” 자신에게 진실하면 자신만으로 고립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인가를 죽이는 일을 하면서도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속 깊은 사람으로 개방된다. 오랜 시간을 바다의 원고지 위에 한 줄도 못 쓰던 산티아고 할아버지가 거대한 ‘청새치’를 잡아 항구로 돌아가는 길에 상어 떼들이 자신의 업적에 손상을 내려 달려들어도 그는 무심하게 자신이 할 일을 할 뿐이다. 그저 그들과 싸워 물리칠 뿐이다. 그것이 다다. 그렇다고 그들을 도덕적으로 적대시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노인은 뱃전 너머로 몸을 기울여 상어가 물어뜯은 그 자리에서 물고기의 살점을 한 점 떼어내었다. 그리고는 그걸 입에 넣고 씹으며 고기의 질과 좋은 맛을 음미했다.” 적이 하는 일을 따라 하면서까지 그는 세계와의 온전한 합일을 이뤄낸다. 자신을 향해 진실하게 오래 걸으면 종내에는 정치적이거나 도덕적인 담장들을 밀쳐 넘어뜨려 우주의 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것은 생각을 하면서 사는 인간이 피워낼 수 있는 품위의 한 형태다. 노인은 물고기 잡는 실력을 넘어 고단한 노동으로 단련해 낸 기품을 가진 한 인간으로 홀로 서 있다.
보통의 어부가 84일 동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다면, 우선 자신에게 망신이다.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조건과 환경을 탓하지 않듯이 자신도 탓하지 않는다. 체면을 구긴 몇 번의 경우들을 헤치고 자신의 공(功)을 크게 세운 사람을 만나면, 그 공을 이루게 한 가장 근본적인 힘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진다.
산티아고에게는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한 문장을 발견했다. “내일은 멋진 날이 되겠구나.” 인생을 아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이런 자들은 묵묵히 자신을 향해 걷는 자들이면서, 언제나 자신을 책망하는 대신에 모든 사람이 떠나가더라도 끝까지 혼자 남아 자신을 사랑하고 지킨다. 그런 자들의 주문은 효험이 있다. 자신을 비루하게 여기고 쉽게 지치는 사람은 85일 째가 되던 날 바다로 나가면서 “85는 행운의 숫자이지”라고 하는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낙관적인 내공 앞에 부끄러움을 감추기 어렵다. 희망을 잃지 않으면 어디에나 자신을 위해 마련된 높은 자리가 있다.
이런 낙관적인 자세는 자신을 믿는 자에게만 허용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믿기 때문에 주변을 탓하지 않는다.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84일을 포함해서 사자 꿈을 꾸며 곤한 잠에 빠지기까지 나는 산티아고 할아버지가 남 탓이나 환경 탓을 하는 불평 한마디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탓하지 않는 자는 빌리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빌리지. 그다음은 구걸하게 되니까.” 나는 제우스가 무엇을 빌려 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 노인네에게서 오히려 존재의 당당함이 더욱 빛난다. “그에 관한 모든 것은 눈을 제외하곤 전부 노후했는데 두 눈은 바다 색깔을 띠고 기운찼으며 패배를 모르는 듯했다.” 나는 이런 눈빛을 가졌는가. 나는 이런 눈빛을 가지려고 단련을 하는가.
이 정도의 눈빛을 가지고 당당하게 존재하는 자들에게서는 향기가 난다. 공자도 “자신이 자신으로 되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동조자가 있다.”(德不孤, 必有隣)라고 하면서 그 향기에 취해 궁극의 신뢰를 보여주는 사람의 출현을 확신한다. 산티아고 할아버지에게는 마놀린이 바로 그랬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그렇지 않니?” 소년 마놀린을 보며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은 무게 중심이 낮게 장착되어 흔들림이 없다. 아마도 ‘지금 여기’를 버리고 먼 곳의 결말에만 희망을 걸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소홀히 하면서까지 ‘우리’에 집중하지 않을 것이다. 공을 잘 치려면, 공이 맞는 ‘여기’의 순간에 집중해야지 공이 도달할 먼 ‘저기’를 먼저 보려하면 안 된다. “매일 매일은 새로운 날이지.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만. 우선은 지금 하려는 일에 집중하겠어. 그러면 운이 찾아 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 ‘운’은 자신이 자신으로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오는 선물이다.
‘신뢰’는 언어의 질서를 지키는 생명이자 국가를 지탱하는 힘줄이기도 하다. 문명을 유지하는 가장 큰 힘은 ‘신뢰’다. 85일 만에 청새치를 잡은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행운도 바로 이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마놀린은 “믿음이 깊지 않은” 제 아버지보다도 서로 믿는 사이인 산티아고 할아버지에게 존재의 많은 부분을 열어주었다. 바다로 나가는 산티아고 할아버지에게 소년은 “두 마리의 신선한 작은 참치 또는 날개 다랑어를 주었는데, 그것들은 가장 깊은 곳의 낚싯줄 두 개에 추처럼 매달았다.” 할아버지의 “자부심”을 드러나게 해 준 680kg도 넘을 거대한 청새치는 바로 이 소년이 준 미끼를 물었다. 신뢰는 항상 빛나는 결과를 안긴다.
“자네 스스로에게나 당당하고 확신을 주는 게 낫지 않겠나.” ‘스스로에게 당당한 자!’ 이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있을까?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이념이나 믿음에 당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당당한 자라니! 다른 사람의 인정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에 떳떳한 자다. 어부로 살면서도 그는 “단지 살기 위해 그리고 먹거리로 팔기 위해 물고기를 죽였던 건 아니었다.” 그는 “자부심을 위해 물고기를 죽였다. 왜냐하면 어부니까.” 그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자다.
상어 떼와의 목숨을 건 싸움도 자신이 잡은 청새치를 하나의 전리품으로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는 어부로서의 자부심을 지켜야 했을 뿐이다. 그것을 차지하는 데에 실패하더라도 자신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아는 정도까지 승화되었다. 소유의 길이 아니라 존재의 길을 가는 자들은 언제나 오직 자신에게 당당하다.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존재적 향기를 잔뜩 묻혀서 말한다. “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청새치를 다 뜯겨 뼈만 남기는 한이 있더라도, 더 나아가 청새치를 지키다가 상어에게 물려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부로서의 자부심만은 잃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이는 작은 이익들에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존재적 존엄과 자존을 지키는 삶을 살겠다는 인간 선언이다.
대학에 떨어지더라도 컨닝은 하지 않겠다는 학생, 지지율이 떨어지더라도 사악해지지는 않겠다는 정치인, 가난하더라도 당당함은 잃지 않겠다는 가장, 시청률이 떨어지더라도 거짓과 편향은 피하겠다는 방송국, 뜻대로 하지 못하는 불편함이 있더라도 독재의 길은 가지 않겠다는 대통령, 혁명의 깃발을 꽂을 자리가 보이지 않아도 ‘완장’은 되지 않겠다는 혁명가, 이익이 줄더라도 노동자를 착취하지는 않겠다는 기업인, 임금이 줄더라도 회사를 어려움에 빠지게 하지는 않겠다는 노동자, 승진이 안 되더라도 표절은 하지 않겠다는 교수.
이들은 모두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 자세를 지킨다.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여러 얼굴 가운데 하나씩이다. 망망대해에서 고기 한 마리 낚이지 않던 것처럼 온 세상에서 이런 모습 하나 낚을 수 없다면, 허망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자신에게서도 소유의 욕망을 억누를 존재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살 이유를 어디서 찾겠는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헤밍웨이가 이해되는 바다 같은 밤이다.
나는, 존재의 각성으로 수고롭던 나는, “너무 멀리 나갔던 것 뿐이야”라고 하는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음성을 들으며 정체불명의 눈물을 떨군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문단을 오랫동안 떠나지 못했다. “길 위쪽, 그의 오두막 안에서, 노인은 다시 잠들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대고 자고 있었고 소년이 옆에서 그를 지켜보며 앉아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는 중이었다.”
어부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출렁이는 바다와 헤밍웨이의 원고지 사이는 부부처럼 가깝다. 헤밍웨이는 원고지를 바다 삼아 낚시하였고,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바다를 원고지 삼아 말을 남긴다. “물고기가 물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나도 어부로 태어났을 뿐이야.” 이제 그는 자신을 향해서만 진실하게 오래 걷다가 자신의 투쟁 대상도 자기 자신을 향해 걷는다는 동질감을 느끼고 그와의 경계를 과감하게 허물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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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어부가 84일 동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다면, 우선 자신에게 망신이다.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조건과 환경을 탓하지 않듯이 자신도 탓하지 않는다. 체면을 구긴 몇 번의 경우들을 헤치고 자신의 공(功)을 크게 세운 사람을 만나면, 그 공을 이루게 한 가장 근본적인 힘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진다.
산티아고에게는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한 문장을 발견했다. “내일은 멋진 날이 되겠구나.” 인생을 아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이런 자들은 묵묵히 자신을 향해 걷는 자들이면서, 언제나 자신을 책망하는 대신에 모든 사람이 떠나가더라도 끝까지 혼자 남아 자신을 사랑하고 지킨다. 그런 자들의 주문은 효험이 있다. 자신을 비루하게 여기고 쉽게 지치는 사람은 85일 째가 되던 날 바다로 나가면서 “85는 행운의 숫자이지”라고 하는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낙관적인 내공 앞에 부끄러움을 감추기 어렵다. 희망을 잃지 않으면 어디에나 자신을 위해 마련된 높은 자리가 있다.
이런 낙관적인 자세는 자신을 믿는 자에게만 허용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믿기 때문에 주변을 탓하지 않는다.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84일을 포함해서 사자 꿈을 꾸며 곤한 잠에 빠지기까지 나는 산티아고 할아버지가 남 탓이나 환경 탓을 하는 불평 한마디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탓하지 않는 자는 빌리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빌리지. 그다음은 구걸하게 되니까.” 나는 제우스가 무엇을 빌려 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 노인네에게서 오히려 존재의 당당함이 더욱 빛난다. “그에 관한 모든 것은 눈을 제외하곤 전부 노후했는데 두 눈은 바다 색깔을 띠고 기운찼으며 패배를 모르는 듯했다.” 나는 이런 눈빛을 가졌는가. 나는 이런 눈빛을 가지려고 단련을 하는가.
이 정도의 눈빛을 가지고 당당하게 존재하는 자들에게서는 향기가 난다. 공자도 “자신이 자신으로 되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동조자가 있다.”(德不孤, 必有隣)라고 하면서 그 향기에 취해 궁극의 신뢰를 보여주는 사람의 출현을 확신한다. 산티아고 할아버지에게는 마놀린이 바로 그랬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그렇지 않니?” 소년 마놀린을 보며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은 무게 중심이 낮게 장착되어 흔들림이 없다. 아마도 ‘지금 여기’를 버리고 먼 곳의 결말에만 희망을 걸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소홀히 하면서까지 ‘우리’에 집중하지 않을 것이다. 공을 잘 치려면, 공이 맞는 ‘여기’의 순간에 집중해야지 공이 도달할 먼 ‘저기’를 먼저 보려하면 안 된다. “매일 매일은 새로운 날이지.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만. 우선은 지금 하려는 일에 집중하겠어. 그러면 운이 찾아 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 ‘운’은 자신이 자신으로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오는 선물이다.
‘신뢰’는 언어의 질서를 지키는 생명이자 국가를 지탱하는 힘줄이기도 하다. 문명을 유지하는 가장 큰 힘은 ‘신뢰’다. 85일 만에 청새치를 잡은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행운도 바로 이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마놀린은 “믿음이 깊지 않은” 제 아버지보다도 서로 믿는 사이인 산티아고 할아버지에게 존재의 많은 부분을 열어주었다. 바다로 나가는 산티아고 할아버지에게 소년은 “두 마리의 신선한 작은 참치 또는 날개 다랑어를 주었는데, 그것들은 가장 깊은 곳의 낚싯줄 두 개에 추처럼 매달았다.” 할아버지의 “자부심”을 드러나게 해 준 680kg도 넘을 거대한 청새치는 바로 이 소년이 준 미끼를 물었다. 신뢰는 항상 빛나는 결과를 안긴다.
“자네 스스로에게나 당당하고 확신을 주는 게 낫지 않겠나.” ‘스스로에게 당당한 자!’ 이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있을까?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이념이나 믿음에 당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당당한 자라니! 다른 사람의 인정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에 떳떳한 자다. 어부로 살면서도 그는 “단지 살기 위해 그리고 먹거리로 팔기 위해 물고기를 죽였던 건 아니었다.” 그는 “자부심을 위해 물고기를 죽였다. 왜냐하면 어부니까.” 그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자다.
상어 떼와의 목숨을 건 싸움도 자신이 잡은 청새치를 하나의 전리품으로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는 어부로서의 자부심을 지켜야 했을 뿐이다. 그것을 차지하는 데에 실패하더라도 자신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아는 정도까지 승화되었다. 소유의 길이 아니라 존재의 길을 가는 자들은 언제나 오직 자신에게 당당하다.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존재적 향기를 잔뜩 묻혀서 말한다. “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청새치를 다 뜯겨 뼈만 남기는 한이 있더라도, 더 나아가 청새치를 지키다가 상어에게 물려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부로서의 자부심만은 잃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이는 작은 이익들에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존재적 존엄과 자존을 지키는 삶을 살겠다는 인간 선언이다.
대학에 떨어지더라도 컨닝은 하지 않겠다는 학생, 지지율이 떨어지더라도 사악해지지는 않겠다는 정치인, 가난하더라도 당당함은 잃지 않겠다는 가장, 시청률이 떨어지더라도 거짓과 편향은 피하겠다는 방송국, 뜻대로 하지 못하는 불편함이 있더라도 독재의 길은 가지 않겠다는 대통령, 혁명의 깃발을 꽂을 자리가 보이지 않아도 ‘완장’은 되지 않겠다는 혁명가, 이익이 줄더라도 노동자를 착취하지는 않겠다는 기업인, 임금이 줄더라도 회사를 어려움에 빠지게 하지는 않겠다는 노동자, 승진이 안 되더라도 표절은 하지 않겠다는 교수.
이들은 모두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 자세를 지킨다.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여러 얼굴 가운데 하나씩이다. 망망대해에서 고기 한 마리 낚이지 않던 것처럼 온 세상에서 이런 모습 하나 낚을 수 없다면, 허망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자신에게서도 소유의 욕망을 억누를 존재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살 이유를 어디서 찾겠는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헤밍웨이가 이해되는 바다 같은 밤이다.
나는, 존재의 각성으로 수고롭던 나는, “너무 멀리 나갔던 것 뿐이야”라고 하는 산티아고 할아버지의 음성을 들으며 정체불명의 눈물을 떨군다. 그리고 마지막 그의 문단을 오랫동안 떠나지 못했다. “길 위쪽, 그의 오두막 안에서, 노인은 다시 잠들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대고 자고 있었고 소년이 옆에서 그를 지켜보며 앉아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