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감동시킨 ‘삶의 한 순간’
![]() 김미은 편집부국장·문화부장 |
좋아하는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나를 뺀 세상의 전부’ 서문에서 이런 대목을 발견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의 주장을 듣고 있을 때보다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에 더 크게 설득되고 더 큰 경이감이 찾아온다.”
시인의 생각에 동의한다. 때론 나를 감동시키는 것, 나를 이해시키는 것은 장황한 설명이나 명료한 논리가 아닌 ‘누군가의 소소한 삶의 모습’일 때가 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버렸다. 비대면·비접촉이 일상화되다 보니 아무래도 사람과의 ‘거리’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우선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 식당에 가면 없던 공간 감각을 최대한 활용해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앉는다. 마스크를 썼음에도 가끔 재채기를 할 때면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고 주눅이 들기도 든다. 전철에선 여러 곳의 빈자리를 두고 내 곁에 누군가 앉으면 그의 눈치 없음을 탓하며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진다.
담 없는 운동장으로 주민들에게 활짝 열려 있던 집 앞 중학교에 언제부턴가 높은 철제 담장이 생겼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학교 출입을 삼가 달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운동장을 출입하는 게 보여 ‘아이들이 등교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저러면 안 될 텐데’ 싶었는데 역시나 담장을 두른 것이다. 높은 담장이 코로나로 바뀐 현실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코로나가 안긴 ‘소소한 위로’
물론 코로나가 이런 슬픈 풍경만 만들어 낸 건 아니다. 사람들은 코로나로 인해 작은 일에 감동하고 감사하게 됐다는 말을 많이 한다. 나에게도 경이감을 안기거나 감동을 전한 ‘사람들’과 조우한 순간이 많았다.
먼저 운전 중 만난 공사장 안내원의 이야기다. 불볕더위에도 긴팔 옷과 워커 등으로 무장한 채 차량을 통제하던 그는 뙤약볕 아래서 붉은 깃발을 흔들며 운전자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반대편 쪽 인부가 그냥 깃발을 흔드는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은 따뜻해졌고, 차 안에 있던 나도 덩달아 인사를 했는데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엔 꽃 이야기다. 언젠가부터 아파트 우리 동 입구에 작은 화단이 생겼다. 온갖 꽃들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코로나에 지친 일상에서 단비를 만난 듯. 사람들도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꽃밭이 우리 동에만 조성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연히 관리사무소에서 만든 꽃밭인줄 알았는데 화단을 만든 주인공은 같은 동에 살고 있는 60대 아저씨였다.
물을 주던 아저씨는 “사람들이 좋아하니 내가 더 기쁘다”며 내년에는 더 많은 꽃을 심을 거라고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웃 주민도 함께 화초를 심기 시작했다며 웃었다. 선한 영향력이다. 한 주민이 지나가며 말했다. “아저씨 정말 복 받으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얼마 전 일본 드라마에서 만난 장면도 따뜻함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남편은 실직 후 꼬치구이 집을 열고 전업주부였던 아내는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직장은 자전거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곳. 대학생 딸은 엄마가 집 앞 마트에서 일하지 않는 이유가 아빠의 실직으로 주변에 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창피해서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엄마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계산대에 있다 보면 고객들 살림살이를 알게 되는데, 세일 상품만 사 가는 사람이나 할인된 저가 도시락과 반찬을 사 가는 동네 사람들이 행여 마음을 쓸까 봐 그런 것이었다. 그들의 마음까지도 헤아리고 배려한 것이다.
아무래도 올해 가장 마음에 남는 건 두 아이가 될 것 같다. 그중 한 명은 “늘 집에 꽃을 꽂아 두는데 식물에서 꽃이나 꽃봉오리를 잘라 낸 ‘절화’(切花)를 사 오면 초등학생 아들이 울어 구근을 사 온 후 키워 꽃을 본다”는, 음악 채팅방에서 만난 엄마의 사연에 등장했던 소년이다. 또 한 명은 ‘저녁 시간인데도 손님 하나 없는 식당에서 할머니가 혼자 식탁 닦는 모습’에서 슬픔을 느낀다는 초등학교 5학년 남자아이 ‘호수’(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글에도 썼고, 아는 이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한 친구는 그 아이들이 어떻게 커 가고 어떤 어른이 될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아이들의 저 마음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
꺾인 꽃봉오리가 슬픈 소년
코로나를 나름 잘 견뎌 내던 주변 사람들도 요즘엔 “이제 지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럴 때 만나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팍팍한 삶에 위안을 준다.
김소연 시인의 말을 조금 바꿔 본다. 그 사람의 하루가 아니더라도, 때론 누군가의 어느 ‘한 순간’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생애 전반에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위드 코로나’ 시대를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건너가는 우리들이 그 ‘한 순간’을 자주 만나게 되기를. /mekim@kwangju.co.kr
시인의 생각에 동의한다. 때론 나를 감동시키는 것, 나를 이해시키는 것은 장황한 설명이나 명료한 논리가 아닌 ‘누군가의 소소한 삶의 모습’일 때가 있다.
우선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 식당에 가면 없던 공간 감각을 최대한 활용해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앉는다. 마스크를 썼음에도 가끔 재채기를 할 때면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고 주눅이 들기도 든다. 전철에선 여러 곳의 빈자리를 두고 내 곁에 누군가 앉으면 그의 눈치 없음을 탓하며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진다.
코로나가 안긴 ‘소소한 위로’
물론 코로나가 이런 슬픈 풍경만 만들어 낸 건 아니다. 사람들은 코로나로 인해 작은 일에 감동하고 감사하게 됐다는 말을 많이 한다. 나에게도 경이감을 안기거나 감동을 전한 ‘사람들’과 조우한 순간이 많았다.
먼저 운전 중 만난 공사장 안내원의 이야기다. 불볕더위에도 긴팔 옷과 워커 등으로 무장한 채 차량을 통제하던 그는 뙤약볕 아래서 붉은 깃발을 흔들며 운전자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반대편 쪽 인부가 그냥 깃발을 흔드는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은 따뜻해졌고, 차 안에 있던 나도 덩달아 인사를 했는데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엔 꽃 이야기다. 언젠가부터 아파트 우리 동 입구에 작은 화단이 생겼다. 온갖 꽃들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코로나에 지친 일상에서 단비를 만난 듯. 사람들도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꽃밭이 우리 동에만 조성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연히 관리사무소에서 만든 꽃밭인줄 알았는데 화단을 만든 주인공은 같은 동에 살고 있는 60대 아저씨였다.
물을 주던 아저씨는 “사람들이 좋아하니 내가 더 기쁘다”며 내년에는 더 많은 꽃을 심을 거라고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웃 주민도 함께 화초를 심기 시작했다며 웃었다. 선한 영향력이다. 한 주민이 지나가며 말했다. “아저씨 정말 복 받으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얼마 전 일본 드라마에서 만난 장면도 따뜻함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남편은 실직 후 꼬치구이 집을 열고 전업주부였던 아내는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직장은 자전거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곳. 대학생 딸은 엄마가 집 앞 마트에서 일하지 않는 이유가 아빠의 실직으로 주변에 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창피해서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엄마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계산대에 있다 보면 고객들 살림살이를 알게 되는데, 세일 상품만 사 가는 사람이나 할인된 저가 도시락과 반찬을 사 가는 동네 사람들이 행여 마음을 쓸까 봐 그런 것이었다. 그들의 마음까지도 헤아리고 배려한 것이다.
아무래도 올해 가장 마음에 남는 건 두 아이가 될 것 같다. 그중 한 명은 “늘 집에 꽃을 꽂아 두는데 식물에서 꽃이나 꽃봉오리를 잘라 낸 ‘절화’(切花)를 사 오면 초등학생 아들이 울어 구근을 사 온 후 키워 꽃을 본다”는, 음악 채팅방에서 만난 엄마의 사연에 등장했던 소년이다. 또 한 명은 ‘저녁 시간인데도 손님 하나 없는 식당에서 할머니가 혼자 식탁 닦는 모습’에서 슬픔을 느낀다는 초등학교 5학년 남자아이 ‘호수’(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글에도 썼고, 아는 이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한 친구는 그 아이들이 어떻게 커 가고 어떤 어른이 될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아이들의 저 마음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
꺾인 꽃봉오리가 슬픈 소년
코로나를 나름 잘 견뎌 내던 주변 사람들도 요즘엔 “이제 지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럴 때 만나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팍팍한 삶에 위안을 준다.
김소연 시인의 말을 조금 바꿔 본다. 그 사람의 하루가 아니더라도, 때론 누군가의 어느 ‘한 순간’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생애 전반에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위드 코로나’ 시대를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건너가는 우리들이 그 ‘한 순간’을 자주 만나게 되기를.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