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된 학교가 문화 1번지로…시골 미술관의 기적
[개관 15주년 맞은 ‘고흥 남포미술관’]
곽형수 관장, 영남중 폐교되자 선친 유지 이어 매각 대신 미술관 건립 선택
기획전 위해 전국 순회, 전시 유치·건물 보수에 사재 쏟는 등 ‘고군분투’
민화전 3주간 4천명 방문·소록도 주민과 콜라보 성공 등 전국 브랜드로 성장
2020년 06월 23일(화) 00:00
올해로 개관 15주년을 맞은 고흥남포미술관 전경. 옛 폐교를 리모델링한 남포미술관은 전남지역 제1호 등록미술관이기도 하다.
코로나19 여파로 인적이 끊어진 탓인지 문패가 없는 ‘학교’는 적막하기만 하다. 교문을 열고 운동장으로 들어서자 정중앙에 길다란 모양의 잔디 밭이 눈에 띈다. 오래전 까까머리 학생들이 공을 차거나 달리기를 하며 뛰어 놀았던 곳이다. 수십 여개의 계단을 오르니 아담한 2층 건물이 자태를 드러낸다. ‘남포미술관’. 지난 2005년 옛 폐교를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한 고흥군의 문화 1번지다.

미술관으로 들어서자 반전이 펼쳐진다. ‘전남 제1호 등록 미술관’ ‘전남 제10호 등록 민간정원’. 전시장 입구에 적힌 표식이 미술관의 위상을 보여준다. 화이트톤으로 마감된 건물 내부는 흔히 볼 수 있는 현대적인 미술관의 모습이다. 한때 학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깔끔하면서도 모던하다. 교장 선생님이 사용했던 교장실은 관장실로 이름이 바뀌었고, 교사들이 머물렀던 교무실은 학예실로 간판을 달았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건 복도와 교실이다.

취재차 방문했던 날, 미술관은 지난해 11월 기획한 ‘나는 화가입니다’전을 열고 있었다. 원래는 3월 초에 막을 내릴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어지면서 전시일정이 꼬인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기전까지만 해도 전시는 관람객들의 호응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고흥군민 뿐만 아니라 순천, 여수, 멀리 광주에서도 관람객들이 찾을 정도였다.

남포미술관의 전시실 모습.
올해로 개관 15주년을 맞은 남포미술관(전남 고흥군 영남면 팔영로 1081·관장 곽형수)은 곧 지역의 미술관 역사다. 예향이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미술관이 없었던 전남에서 남포미술관은 개관 이후 미술계의 ‘문제적 사건’들을 잇따라 선보이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특히 소록도 주민들과의 콜라보 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통해 남포미술관은 시골 미술관에서 전국구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는 기적을 일궈냈다.

사실 남포미술관은 개관 당시만 해도 무모한 도전으로 보였다. 지난 2005년 2월 문닫은 폐교를 리모델링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리적 한계로 ‘롱런’을 기대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도시의 갤러리나 미술관들도 운영난을 호소하고 있는데, 시골 미술관은 오죽 하겠는가. 그것도 갈수록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농촌에서 말이다.

남포미술관이 주변의 기우를 깨고 사립미술관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 건 순전히 곽 관장의 땀과 눈물 덕분이다. 선친인 고(故)곽귀동 선생의 유지로 건립된 영남중학교가 학생수가 줄어들면서 문을 닫게 되자 그는 ‘매각’ 대신 돈도 안되는 미술관을 짓기로 했다. 실제로 폐교 당시 한 건설업체에서 학교 부지 일부를 공사장 시설로 활용하기 위해 거액을 제시했지만 곽 관장은 이 ‘달콤한 제안’을 거절했다. 그도 그럴것이 남포미술관은 2층 학교 건물과 부지를 포함해 약 3000평(8200㎡), 연면적 965.13㎡ 규모다. 대형시설이 들어서기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하지만 곽 관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난 1967년 학교법인 팔영학원으로 설립된 이후 2003년 36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폐교되기까지 36년 간 사재를 털어가며 후학양성에 힘쓴 선친의 뜻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학교를 운영하느라 평생을 고군분투한 선친을 지켜봤던 곽 관장에게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선친의 호를 딴 ‘남포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지만 현실은 생각 보다 녹록치 않았다. 워낙 오래된 학교였던 터라 매년 보수비용으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됐는가 하면 평균 6~8차례 여는 기획전 비용 역시 만만치 않았다. 사재를 쏟아 붓는 바람에 한때 빚더미에 오르기도 했다. 급기야 부관장인 조해정 여사와 노후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모아둔 예금과 미술관 앞 정원에서 수십 년간 키운 나무들까지 처분해야 했다. 또 기획전을 하기 위해 전국 미술관과 소장자들을 찾아다니며 허리를 굽히기도 했다.

지난 2013년 국립소록도 병원에서 열린 소록도 옹벽 벽화 프로젝트 개막식 모습. <광주일보 자료사진>
남포미술관은 개관 이후 공공성이 강한 프로젝트와 내실있는 기획으로 사립미술관의 한계를 뛰어넘는 독보적인 궤적을 그려왔다. 지난 2012년 지역 최초로 전국 미술관장 회의를 유치했는 가 하면 지난 2007년 ‘옛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보다’를 주제로 열린 민화전 때는 20일간 4000여 명이 찾는 진기록을 세웠다. 또한 나로우주센터와 함께 지역 주민과 관광객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사업을 진행했고 지난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함께 크라우드 펀딩으로 국립소록도병원 뒤편에 대형벽화 ‘염원·소록의 꿈’을 제작해 전국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 국립소록도병원과의 연계사업은 매우 특별하다. 곽 관장은 지난 2011년~2014년까지 총 14회에 걸쳐 소장품(총 1200점)을 무상으로 대여했고 특별 기획전 ‘아기사슴-희망을 나누다’, ‘소록도-행복한 웃음으로 피어나다’(2011년), ‘경계를 넘어 마주보다’(2016년)를 공동으로 진행했다. 또한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아름다운 인생, 유희자적을 꿈꾸다’(2012년), ‘소록도 미술아카데미’(2018~2019년) 등 총 140회의 문화예술교육을 실시했다. 올해 초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사)한국박물관협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2020 박물관·미술관인’ 신년교례회에서 국립박물관재단 사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남포미술관에는 방문객의 탄성을 자아내는 공간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서 미술관 1층에 꾸며진 카페는 핫플레이스다. 예전 학생들이 쓰던 책상과 의자를 그대로 재활용해 만든 테이블 세트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화사한 꽃과 나무는 힐링 그 자체다.

남포미술관 앞에 설치된 조성주 작 ‘말’
미술관에서 밖으로 나오자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인 정원이 발길을 끌어 당긴다. 널찍한 운동장의 앞옆에는 튤립, 모란 등 화사한 꽃과 연록색 나무들이 어우러진 말 그대로 ‘꽃의 향연’이다. 전남도 지정 민간정원 1호라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정원 한켠에 자리한 ‘화담정’(花潭亭)에 앉아 즐기는 봄날의 풍광이 그림 같다. 경운기와 트럭을 타고 나들이 오는 곳, 소록도 주민에서 부터 내로라 하는 명사가 다녀가는 미술관. 어디 이런 미술관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남포미술관의 기적이 아름다운 건 그 때문이다.

/고흥 글·사진=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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