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5월 22일 ‘도청 장악’
“광주상고에 알려서 시신을 수습해 가게 허게.”
그러나 이학부 수위실에서 전화를 하고
달려온 학생과 직원이 도리질을 했다.
“과장님, 학생 이름을 알려줘야
담임선생에게 연락할 거 아니냐고만 헙니다.”
“선생이 오지 않으믄 도청으로 보내게.”
2020년 02월 27일(목) 00:00
<삽화 이정기>
구름 낀 밤하늘이 음산한 꼭두새벽이었다. 공수부대가 학교에서 철수했다는 학생과 직원의 전화를 받은 서명원은 잠이 확 깼다. 어제 시민군들이 활보하는 금남로에서 공수부대가 곧 철수할 거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명원은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담배를 물었다. 반달이 구름장 사이에서 빛을 잃고 처량하게 떨었다. 밤하늘에 가득한 구름장이 반달을 덮칠 듯했다.

“과장님, 계엄군이 조대로 철수한 거 같습니다.”

“이학부를 가봤능가?”

이학부 건물은 전남대에 주둔한 계엄군 공수부대가 본부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예, 설성수 수위 아저씨에게 보고받았습니다.”

“고생 했네.”

설성수는 체육관 잔일을 도맡아 하며 이학부 수위실에서 근무하는 50세가 가까운 늙은 수위였다.

“무서운께 혼자는 못 돌아댕기겄습니다.”

“뭣이? 찬찬히 얘기해 보게.”

“숙직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가 나가본께 조용하드그만요. 공수들이 으디로 철수한 거 같았습니다. 공수부대가 본부로 사용헌 이학부로 몬자 가봤지라. 수위실로 가서 아저씨에게 얘기를 듣고 복도로 들어갈라고 헌디 피비린내가 고약허드그만요. 수위 아저씨에게 복도에 불을 켜라고 헌 뒤 공수들이 취조실로 쓰던 강의실을 들어가 봤지라. 수위 아저씨는 무섭다고 안 들어갈라고 했습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허고 러닝셔츠, 신발, 바지 등이 어지러웠지라. 머리카락도 한 움큼씩 뭉텅뭉텅 떨어져 있었습니다. 수위 아저씨에게 날이 밝는 대로 청소허라고 허고 저는 이학부를 나와부렀그만요.”

서명원은 공수부대 철수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이른 아침에 학교로 나갔다. 공수부대원들이 종합운동장에 쳤던 군용텐트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간밤에 철수하면서 모두 걷어갔음이 분명했다. 모닥불을 피웠던 흔적만 운동장에 거뭇거뭇 남아 있었다. 서명원은 숙직하던 직원에게 전화로 보고받은 이학부인 가정관부터 먼저 갔다. 학생과 직원들과 수위, 청소부 등 5명을 데리고 학교를 한 바퀴 둘러볼 셈이었다. 이학부의 늙은 수위 설성수가 말했다.

“과장님, 취조실 청소를 아직 못했그만요. 머리끝이 쭈뼛해서 도저히 혼자 들어갈 수 ?그만요.”

“형님, 청소허시는 분을 델꼬 왔응께 같이 허시면 됩니다.”

서명원은 나이가 많은 설성수에게는 다른 수위들과 달리 존댓말을 깍듯하게 썼다.

“모새를 퍼가지고 와서 핏물부텀 닦고 빗자루로 쓸어야 헐 거 같그만요.”

공수부대원들이 취조실로 이용하던 강의실은 설성수의 말대로 생지옥처럼 처참했다. 서명원은 학생과 직원에게 취조실 현장상황을 낱낱이 적도록 시켰다. 취조실로 쓰던 강의실 바닥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취조실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신발과 허리띠를 벗게 했는지 신발 1백여 켤레, 허리띠 50여 개가 널브러진 채 뒹굴었다. 피묻은 상의와 바지들이 한쪽에 버려져 있고, 뽑힌 머리카락이 자루 하나가 될 만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이런 현장상황이믄 틀림?이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인께 주변을 둘러봅시다.”

서명원은 청소부 2명을 이학부에 남기고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뒷산을 자주 오르내리던 설성수를 앞세웠다. 솔숲 사이로 난 오솔길 주변을 둘러보면서 수색했다. 이윽고 서명원은 덤불이 수북이 쌓인 곳에 눈길을 주었다.

“형님, 저그 좀 보씨요. 덤불로 뭣을 덮어논 거 같은디 확인헙시다.”

설성수가 다가가서 발로 눌러보더니 쑥 들어가자 곧장 덤불과 솔잎을 걷어냈다. 서명원의 예감은 정확했다. 교련복을 입은 시신 한 구가 드러났다. 시신을 살펴보니 얼굴은 멍투성이였고 교련복 상의는 핏물이 번져 있었다. 대검에 옆구리를 찔린 것 같았다. 서명원은 학생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소지품을 꺼내 살폈다. 광주상고 학생인 것 같은 심증은 들었지만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다. 서명원은 학생과 직원에게 광주상고에 빨리 전화하도록 지시했다.

“광주상고에 알려서 시신을 수습해 가게 허게.”

그러나 이학부 수위실에서 전화를 하고 달려온 학생과 직원이 도리질을 했다.

“과장님, 학생 이름을 알려줘야 담임선생에게 연락할 거 아니냐고만 헙니다.”

“선생이 오지 않으믄 도청으로 보내게.”

전남대와 광주상고는 지근거리에 있었다. 그런데도 1시간이 지났지만 광주상고에서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서명원은 이학부와 출판부 사이에 방치돼 있는 페퍼포그 차 안에서도 시신 한 구를 발견했다. 페퍼포그 차는 정문을 뚫고 오다가 사격을 받았는지 은행나무 옆에 멈춰 있었다. 유리창이 다 깨진 차 안 운전석은 피범벅이었고, 조수석에는 먹다 남은 빵과 우유, 계란이 보였다. 운전기사는 머릿골이 빠진 채 머리 한 쪽이 달아나 보이지 않았다.

날이 밝자 시민들이 몰려왔다. 청년들은 문학부와 이학부로 들어가 공수부대원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매트리스와 기름통을 종합운동장으로 꺼냈다. 일부 시민은 상태가 양호한 매트리스를 가져가기도 했다.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지르자 검은 연기를 피우며 군인용 매트리스가 활활 탔다. 시민들이 공수부대와 싸워 이긴 듯 함성을 질렀다.

“공수도 별 거 아니네!”

두어 시간 동안 학교 상황을 살핀 서명원은 도청 옆 보이스카우트 사무실에서 오전 중에 보직을 맡은 교수들이 긴급회의를 한다는 연락을 받고 학교를 나섰다. 대학생들이 도청을 장악하고 있는데 교수들이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어서 갖는 긴급회의였다. 총장 이름으로 소집되는 긴급회의였으므로 서명원도 도청으로 나갔다.

도청 안으로 드나드는 시민군들은 대부분 총을 들고 있었다. 청년은 물론이고 중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까지 총을 메고 다녔다. 곧 오발 사고가 날 것만 같았다. 서명원은 도청 정문을 지날 때는 달리듯 잰걸음으로 걸었다. 보이스카우트 사무실은 도청 옆의 부속건물에 있었다. 보직교수의 긴급회의는 오전 11시에 열렸다. 총장은 아프다는 핑계로 나오지 않고 박영준 교무처장이 총장을 대리해 회의를 주관했다. 그런데 참석 인원은 생각보다 적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서너 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회의 결과도 보이스카우트 사무실을 임시연락처로 삼자는 결정만 했을 뿐 참석한 보직교수의 개인의견만 듣고 헤어졌다. 서명원은 그런 의견을 수첩에 기록했다.

“더 이상의 희생 없이 사태를 빨리 마무리 지으려면 총기를 회수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수습위원회 같은 학생지도부를 만들어야 합니다.”

“계엄군에게는 총이 있는데 시민들이 총을 반납하려고 할까요?”

이와 같은 이야기가 서너 번 반복되자 박영준 교무처장이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투쟁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원칙이자 한계입니다.”

서명원은 보이스카우트 사무실을 나왔다. 이학부 뒷산에서 발견된 고등학생 시신이 상무관으로 옮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상무관에는 아직 운구해온 관이 하나도 없었다. 한 시민군에게 묻자, 시민군들이 민원실 앞에 20여 개의 관을 준비해 놓은 뒤 시신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민원실 앞의 관들은 장례식장에서 반강제로 가지고 온 것들이었다. 시민군들이 여러 장례식장을 돌며 구해온 목재 관들이었다. 앞으로는 시중에 관이 부족해 얇은 베니어판으로라도 짜야 될 상황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서명원이 관을 둘러보고 있는데 한 시민군이 다가와 물었다.

“누구를 찾습니까?”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이요.”

“저 관입니다.”

“학생으로 보이는그만. 나는 전대 학생과장이네.”

“아, 저는 조대 불교학생회장입니다. 다들 이 일을 마다해서 제가 나섰습니다.”

김동수는 총을 들고 싸우는 일보다 희생자들에게 기도라도 해주고 싶어서 시신관리를 스스로 지원했던 것이다. 김동수가 맡은 임무는 시신의 특징을 메모해 관에 붙이는 일이었다. 물론 김동수 혼자서 도맡아 하는 일은 아니었고, 동국대생 박병규도 시신관리 일을 거들었다. 박병규는 시민군이 시신을 실어오면 인계받는 일을 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는 도청 민원실 앞이 비좁아 시신을 상무관에서도 받았다. 박병규는 상무관으로 나가 전남대 앞에서 함께 시위했던 딸기농사꾼 김대중을 만나기도 했다. 박병규는 반가워서 그에게 제의했다.

“김대중 선상님, 도청에서 같이 일합시다.”

나이가 엇비슷했지만 박병규는 김대중에게 ‘선상님’을 붙여 놀렸다. 형의 딸기농사를 돕는다는 김대중은 진솔하고 인간미가 넘쳤다. 박병규의 제안에 김대중이 펄쩍 뛰었다.

“아이고, 도청은 무식헌 나허고 어울리지 않그만요.”

“김동수 조장 인품이 훌륭헌께 권해본 거요.”

“도청 밖에서도 헐 일이 많그만요. 시체는 이짝 상무관으로 옮기고 부상자는 적십자병원으로 운반허고 있는디 총상으로 죽은 옮긴 시체만도 서너 구를 옮겼그만요.”

카빈소총을 삐딱하게 멘 김대중도 어느 새 근사한 시민군이 돼 있었다. 전남대 앞에서 시위할 때만 해도 순박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도장공 오인수도 굳이 도청에 들어가지 않고 지프차를 운전하며 외곽지역을 돌았다. 도청에서 누군가가 차량운행증과 지정한 주유소에서 기름을 받을 수 있는 허가증을 주어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순찰시간이나 장소가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지프차에 시민군 5명을 태우고 기동순찰대원 노릇을 했다. 국군통합병원 부근에서 계엄군의 장갑차를 보고는 간담이 서늘해 도망치기도 했는데 그래도 재미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카빈소총과 실탄 7발을 들고 다니던 용접공 김여수도 도청으로 들어가지 않고 도청 정문 앞에서 24인승 승합차를 탔다. 승합차에 탄 시민군들은 캘리버50 중기관총과 무전기, 수류탄을 싣고 다니면서 자신들을 기동타격대 대원이라고 불렀다. 승차한 12명의 조장은 무전기를 조작할 줄 아는 시민군이 맡았다. 캘리버50 중기관총을 다뤄본 예비군도 있었는데, 대원들은 도청의 지시와 통제를 받지 않고 무용을 자랑하듯 일부러 교도소 부근까지 가서 계엄군을 위협하기도 했다.

정해민은 시청 부근에 있는 조선대생 친구 집에서 나와 도청으로 들어갔다. 어제 오후 내내 전일빌딩 안에서 시위대를 지켜보았으므로 공수부대가 철수한 도청 상황이 궁금해서였다. 정해민의 옷차림은 3일 동안 집으로 들어가지 못해 꾀죄죄했다. 사흘 전 데모하지 말라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화순까지 갔는데 그는 보성 외갓집에 있으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어기고 17번 시내버스를 타고 광주로 돌아와 버렸던 것이다. 학내 바둑동호회 회원들끼리 계엄군에게 굴복하지 말자고 한 약속과 유서를 써놓고 시위에 나선 사범대 부회장 친구가 떠올라 도저히 보성 외갓집으로 갈 수 없었으므로 시민군에 가담하지는 못한 채 도청 주변을 맴돌았다.

도청 안은 학생들보다 시민들이 더 많았다. 시민군 중에 일부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공포탄을 쏘곤 했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대학생들은 왠지 위축돼 보였다. 일찍 학업을 포기한 시민군과 대학생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시민군들은 자신들이 싸워서 공수부대를 몰아냈다는 기분에 도취돼 있었고, 대학생들은 시민군의 활약을 인정하면서도 우왕좌왕하는 그들의 무질서를 걱정했다. 어떤 시민군은 대학생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느그덜은 일만 저질러 놓고 다 도망쳐불고 싸운 건 우리덜이잖여.”

“시방 여그서 공치사 허믄 안돼야. 대학생덜도 모다 싸왔제 우리만 싸왔간디.”

핏대를 세운 시민군에게 나이 든 예비군 출신이 말렸다. 그래도 그 시민군은 대학생들에게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내 말이 틀렸소? 시방 여그 있는 사람덜만 확인해 봐도 알 거 아니요. 주방장, 영업사원, 노동자, 운전수 아닌 사람 나와 보라고.”

“모르는 소리 마쑈. 대학생 간부덜은 17일에 모다 잡혀가부렀다고 헙디다. 긍께 여그 도청에 나온 대학생덜은 우리맨치로 싸운 사람덜이란 말이요. 비겁헌 사람이라믄 그동안 코빼기도 안 보인 교수, 목사, 신부, 승려들이제.”

“아따, 도매금으로 싸잡아서 욕허지는 마쑈. 신부복, 승복을 입은 사람을 쪼깐 본 것도 같소야.”

그제야 분개하던 시민군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난 여그 도청이 맘에 안 든께 밖에서 싸울라요. 기동순찰대맨치로 돌아댕길랑께 그라고 ?은 사람덜은 나를 따라오씨요.”

“그 말이 맞소야. 여그는 먹물덜이 모여 꾀를 내는 곳이여. 우리맨치로 가방끈이 짧은 사람허고는 안 맞을 거 같그만.”

시민군 몇 명이 상황실을 나갔다. 정해민은 흥분한 시민군을 이해했다. 공수부대가 철수한 지 하루가 지났지만 학생회 간부 학생들은 도청에 아무도 없었다. 정해민과 같은 보통의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호기심에 이끌려 도청에 들어와 있을 뿐이었다. 정해민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는 무슨 일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해민은 도청을 나와 충장로와 황금동을 돌아다니며 간판제작 가게를 찾았다. 마침내 허름한 간판제작 가게를 들어가서 주인에게 사정했다. 사십대로 보이는 사장은 공수부대원들 때문에 며칠 간 주문받아 놓은 간판을 제작하지 못했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정해민의 부탁을 받아주었다. 사장이 손피켓에 글씨를 썼다.

<학생들은 남도예술회관으로 모입시다>

정해민은 또래의 대학생들과 손피켓 4개를 나눠 들고 도청 분수대를 수십 번 돌았다. 도청분수대에서는 궐기대회를 하고 있었다. 오후 4시 30분쯤 되자 전남대생 30여 명, 조선대생 20여 명, 전문대생 20여 명이 모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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