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 파고든 미술관, 100년 역사 건축물과 ‘행복한 동거’
도시 디자인, 행복한 도시 풍경의 완성 <7> 핀란드 헬싱키 <하>
지난해 개관 아모스 렉스 미술관
광장·1930년대 건물 보존
50만여명 찾아 도시 명소로
노키아 공장이었던 ‘카펠리’
2019년 11월 01일(금) 04:50
헬싱키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아모스 렉스 미술관은 역사성이 담긴 광장과 건물을 살리기 위해 지하에 전시장을 만들고 광장에는 돔 형태의 구조물을 설치했다.
노키아의 케이블 공장이었던 ‘카펠리’는 핀란드 최대규모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지난해 개관한 아모스 렉스 미술관은 1930년대 지어진 건물을 통해 입장할 수 있다.


헬싱키는 도시 규모가 작아 걸으며 여행하기 좋다.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전철역 중 하나인 캄피역 인근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광장을 지나면 커다란 원형 나무통을 세워놓은 것 같은 캄피 예배당(Kampin kappeli)이 보인다. 가문비 나무 등으로 만든 이 예배당은 흔히 ‘침묵의 교회’로 불리는데 들어가보면 그 이름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다. 은은한 조명과 몇개의 의자만이 놓인 공간에 들어서면 오직 ‘침묵’만이 흐른다.

지난해 8월 이곳에 새로운 랜드마크가 등장했다. 아모스 렉스(Amos Rex) 미술관으로 개관 1년여만에 50여만명이 다녀갔다. 공간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과거와 현재의 만남’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라시팔라치 광장에 들어선 미술관은 초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으면서 세월의 흐름까지도 그대로 껴안은 의미있는 공간이다.

요즘 화두로 떠오르는 게 도시재생이다. 예전 같으면 그냥 부수고 없애 버리고 새 건물을 짓는 게 대세였지만 다행히 요즘엔 리노베이션에 관심을 두고 있는 듯하다. 역사와 장소성을 그대로 품고 있는 오래된 공간의 재해석은 ‘도시 디자인’의 또 다른 키워드다.

캄피 예배당의 ‘고요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데 어디선가 아이들 웃음소리와 환호성이 들린다. 아이들은 광장에 울룩불룩 솟은 언덕 위를 뛰어다니고 미끄럼을 탄다. 아이들만 즐거운 게 아니다. 여러벌의 의상을 준비해온 20대 청춘들은 옷을 갈아입으며 사진 촬영에 바쁘다. 유모차를 밀고 올라온 아빠도 잠시 망중한을 즐긴다.

평평한 광장에 솟아오른 언덕들은 재미있게 다가온다. 잠망경 처럼 솟은 곳엔 유리를 덮어 씌운 창문을 내 또 다른 느낌이 든다. 1930년대 세워진 굴뚝은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민들의 놀이터이자 쉼터처럼 활용되는 이 다이나믹한 공간은 아모스렉스 미술관의 뒷 광장이다. 미술관의 전시장은 광장 ‘지하’에 있다. 그 곳에서 창문을 통해 광장의 사람들이 보이고 푸른 하늘도 손에 잡힐 듯하다. 1930년대 만들어진 빌딩과 광장의 모습을 그대로 살린채 타일을 붙인 기하학적인 돔 형태 구조물들을 새로 만든 아모스 렉스 미술관은 오래된 건물과 새로운 공간의 ‘행복한 동거’가 이루어진 현장이다. 한 때 광장 구겐하임 분관을 건립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막대한 로열티에 대한 부담감과 국내 미술관을 키우자는 의견, 역사성 있는 광장 복원 등이 힘을 얻어 아모스 렉스 프로젝트가 추진됐다.

리아 팔로바라 아모스 렉스 커뮤니티 담당 안내로 미술관을 둘러봤다. 핀란드 사업가 아모스 앤더슨이 설립한 예술후원재단이 사업비 전액을 내놓은 미술관은 1930년대 지어진 라시팔리치 건물을 통해서 입장할 수 있는 게 독특했다. 1936년 세 명의 건축학도가 설계한 이 건물은 헬싱키올림픽 당시 활용하기 위해 지은 가건물이었지만, 극장인 비오 렉스도 함께 지어지고 여러 사무실이 들어서면서 시민들에게 헬싱키의 상징적인 공간이 됐다. 이후 건물은 여러번 철거 위기를 맞았지만 시민들의 반대로 그 존재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역사적인 공간과 새로운 공간의 조화를 염두에 둔 재단과 건축회사는 세월의 무게가 담긴 건물을 살리기 위해 미술관을 지하로 파고 들어갔다. 지하에 전시장을 두는 건 시민 모두의 공간이자 1800년대 세워진 러시아 병영 막사와 주방 등 오래된 역사성을 갖고 있는 광장의 의미를 살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대신 ‘지하에 있지만 지하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자연채광을 위한 돔형태의 공간을 만들었고 이 돔 덕에 광장엔 독특한 언덕이 생겼다.

낡은 건물의 입구를 지나 지하로 들어섰다. 전시실에서는 새로운 기획전을 준비 중이었다. 축구장 1.5배 크기의 갤러리는 자유롭게 변형하며 다채로운 전시를 꾸리기에 적합해 보였다. 전시장, 로비에서 고개를 들면 유리 돔을 통해 파란 하늘과 굴뚝이 보인다. 미술관 안과 밖은 이어져 있다. 기존의 라치팔라치 건물은 최소한의 리노베이션만 거쳐 매표소, 기념품숍 등으로 활용중이다. 550석 규모의 렉스 극장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다음날 찾은 카펠리(KAAPELI)는 헬싱키 최대 규모의 문화예술 공간이다. 카펠리는 핀란드 대표 기업 ‘노키아’가 전기선, 전화선 등 각종 케이블을 생산하던 공장이었다. ‘카펠리’는 핀란드어로 ‘케이블’이라는 뜻이다. 1943년 지어진 카펠리는 2000명이 재직한 핀란드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장이었지만 노키아가 핸드폰 제작에 집중하면서 1987년 문을 닫았다.

노키아는 카펠리 소유권을 헬싱키시로 넘겼고 시는 이곳을 주거용 공간으로 개발하려 했지만 공장이 문을 닫기 전 노키아로부터 일부 공간을 임대해 쓰던 예술가와 입주가들이 항의하며 이곳을 문화공간으로 만들겠다고 적극 제안, 1992년 문화발전소로 재탄생했다. 현재 소유주는 시지만 운영은 공기업이 독자적으로 맡고 있다. 이 공기업은 가스저장소를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수빌라티’(SUVILAHTI)도 운영한다.

7층 높이의 공장은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사진, 연극, 호텔 박물관을 비롯해 건물 구석 구석 숨어 있는 12개의 갤러리, 무용극장, 예술학교 등을 갖추고 있다. 카펠리는 저렴한 렌트비를 받고 예술가들에게 스튜디오를 임대하고 있다. 화가, 무용인 등 아티스트들이 130여개 공간을 사용하고 있으며 라디오 방송국, 각종 협회, 문화와 관련한 크리에이티브 관련 업체 등도 100여개 입주해있다.

안니 순델 커뮤니티 매니저와 둘러본 카펠리는 리노베이션을 최소화해 공간 구석 구석에 옛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터빈이 있던 곳은 무용 등 공연이 열리며 케이블을 조합하는, 3000여명이 들어가는 대형 공간에서는 박람회, 이벤트, 콘서트 등 각종 행사가 열린다. 취재 차 방문한 날은 ‘베지테리언 박람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카펠리 역시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또 다른 출발을 꿈꾸고 있다. 9월 기공식을 가진 대형 댄스 하우스의 건립이다. 카펠리 입구, 박물관 맞은편에 지어질 댄스하우스는 2년 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안니 순델 매니저는 “댄스하우스는 카펠리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할 것”이라며 “기존 시설들과 조화를 이루며 문화를 발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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