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10>
그로피우스의 신념 … 예술은 가르칠 수 없다!
자신의 건축·예술관 내각에 전달
전후 혼란 활용 바우하우스 개교
공예학교와 미대 합친 새 모델
모든 예술의 ‘창조적 편집’ 꿈 꿔
2019년 08월 23일(금) 04:50
바이마르 작센대공 공예학교 신교사. 1915년 폐교돼 병원으로 쓰였던 이곳에서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를 개교했다. <사진 윤광준>




그로피우스의 오른팔이었던 아돌프 마이어 (Adolf Meyer)




그로피우스의 오른팔이었던 아돌프 마이어 (Adolf Meyer)








바우하우스는 1919년 4월 1일에 개교했다. 그러나 그해 그로피우스는 무척 괴로웠다. 바로 그 다음달 베르펠의 아이였지만 법적으로는 자신의 아들이었던 마틴이 선천적 장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죽자, 베르펠과의 사랑을 선택한 알마는 이혼을 요구해왔다. 딸 마농의 양육권을 둘러싼 신경전은 그 이듬해 그로피우스가 자포자기할 때까지 거칠게 계속됐다.

바우하우스의 설립 또한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전후의 어려운 경제사정과 이념갈등으로 인해 시대와 어울리기 힘든 혁신적 예술교육을 지향하는 그로피우스 앞에는 온갖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은 전후의 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지루한 참호전으로 옮겨가던 1915년 4월 11일, 바이마르의 작센대공 공예학교의 교장이던 반 데 벨데가 그로피우스에게 자신의 후임을 맡아줄 수 있는지 물어왔다. 반 데 벨데는 그로피우스 이외에도 헤르만 오브리스트(Hermann Obrist·1862~1927)와 아우구스트 엔델(August Endell·1871~1925)을 바이마르 정부에 추천했다고 썼다. 야심이 있던 그로피우스는 이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고, 필요한 서류를 즉시 반 데 벨데에게 보내 적극적인 의사를 표명했다.

당시 독일의 유겐트슈틸을 대표하는 오브리스트와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독일 디자인계의 스타 엔델은 나이로나 경력으로나 젊은 그로피우스가 감히 경쟁할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었다. 음악으로 치면 둘 다 구스타프 말러 급이었다. 반 데 벨데의 추천에 대한 그로피우스의 적극적 반응은 구스타프 말러급의 성공을 이뤄야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알마의 그때 그 조언(?)도 크게 작용했다(반 데 벨데와의 편지가 오가는 사이, 그로피우스와 미망인 알마 말러는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독일의 적국 벨기에 출신이라는 이유로 쫓겨나는 반 데 벨데의 추천이 그리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가 설립했던 작센대공 공예학교는 예정보다 빨리 7월에 폐쇄됐다. 반 데 벨데의 후임 인선 또한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로피우스는 집요했다. 공예학교는 폐쇄되었으나 바이마르의 지인들을 통해 그쪽 분위기를 계속 탐색했다. 드디어 1916년 1월, 바이마르의 정치·행정을 관할하던 작센대공국의 빌헬름 에른스트 대공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대공은 바이마르의 건축과 예술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일개 기병대 장교에 불과했던 그로피우스에게는 엄청난 기회였다. 그는 ‘예술과 산업, 그리고 건축의 미래’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그 내용을 서류로 요약해 바이마르 내각에 보냈다.

빌헬름 에른스트 대공이 젊은 건축가 그로피우스의 제안을 흥미롭게 느낀다는 소문이 바이마르의 예술가들 사이에 퍼졌다. 작센대공 미술대학에서는 건축과를 신설할 예정이니 교수로 와달라고 했다. 바이마르 예술교육에 관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로피우스를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려는 꼼수였다. 당연히 그로피우스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모든 상황이 불확실해지며 그로피우스와 바이마르와의 인연도 그렇게 끝나는 것 같았다.



사랑엔 서툴렀지만 정치적으로는 노련

1918년 11월 11일,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 전쟁과 동시에 ‘11월 혁명(Novemberrevolution)’이 일어나자, 젊은 예술가들은 ‘11월 그룹(Novembergruppe)’과 ‘예술노동평의회(Arbeitsrat fur Kunst)’를 조직했다. 전쟁에서 복귀한 그로피우스는 이 같은 혁명적 조직의 카리스마 있는 리더로 자연스럽게 부각되었다. 1919년 1월, 그로피우스는 예전에 접촉했던 바이마르의 궁내청 사람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베를린에서 시작된 혁명의 기운이 바이마르에도 번져왔지만, 아직까지는 바이마르 공국의 관리들이 임시정부를 꾸려 행정을 관할하고 있었다.

반 데 벨데의 공예학교는 폐교되고 전쟁의 부상자를 치료하는 병원으로 쓰이고 있었다. 미술대학은 유지되고 있었으나 유명무실한 수준이었다. 바이마르의 관리들은 혁명기의 그로피우스의 활약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바이마르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미술대학의 학장직에 취임할 의사가 있는지도 물었다.

그로피우스는 과감한 제안을 했다. 폐교된 공예학교와 미술대학을 합쳐 새로운 예술학교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전했다. 새로운 시대의 영향력 있는 젊은 혁명가를 바이마르로 ‘모셔오고자’ 했던 눈치 빠른 관료들은 알아서 그로피우스의 계획을 추진했다. 그로피우스의 계획대로 새로운 예술학교의 예산안이 제출되었다. 그리고 그로피우스는 이 새로운 학교의 교장으로 초빙되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공예학교와 유명무실한 예술학교의 병합을 누가 결정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 어떻게 그로피우스를 이 새로운 학교의 교장으로 초빙하고 승인했는지에 관해서도 아는 이 없다. 그로피우스가 혼자 북치고 장구 쳤다. 알마와의 사랑에는 그토록 서툴렀지만, 정치에는 매우 노련했던 그로피우스였다(알마와의 이혼 이후 그로피우스의 인생에서 ‘사랑’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는다. 결혼해서 ‘그냥’ 잘살았다). 후에 바이마르 공국의 관리였던 프리츠 남작이란 사람이 나타나 자신이 그로피우스를 초빙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작센대공국의 재산은 빌헬름 에른스트 대공의 소유였지만 혁명으로 인해 국유화되는 과정이었다. 그 누구도 주인이 아니었던 혁명의 시기, 바우하우스는 그로피우스의 추진력과 정치력에 의해 그렇게 순식간에 시작됐다. 그러나 예술과 산업과 건축을 창조적으로 편집하려는 그로피우스의 에디톨로지는 그리 간단하게 구현되지 않았다.

그로피우스는 기존 프로이센의 미술아카데미를 혐오했다. 귀족을 위한 ‘살롱미술’의 달콤함에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우하우스 교육프로그램의 마지막에서 살롱미술의 해체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아울러 예술교육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전체로 보나 부분으로 보나 건축이 여러 가지 요인의 종합적 형태임을 건축가·화가·조각가는 다시 인식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미술작품은 살롱미술로 전락하면서 상실했던 건축학적 정신을 다시 찾게 된다. 낡은 예술학교는 이러한 통일을 이뤄내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이뤄낼 수도 없었다. 예술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의 종합적 형태인 ‘건축’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기술로서의 건축’이 아니다. 그로피우스가 꿈꿨던 ‘종합예술로서의 건축’은 모든 예술이 창조적으로 편집되는 ‘에디톨로지’를 뜻한다. ‘편집의 단위(unit of editing)’가 ‘편집의 차원(level of editing)’을 달리하며 서로 엮여가는 종합예술로서의 건축은 교육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이어, 그로피우스의 생각을 글로 표현

당시 그로피우스는 자신의 이 같은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가 바우하우스에 건축과를 설치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가 생각한 ‘건축’은 건물을 짓는 제한적인 의미의 ‘건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는 데 미숙했던 그로피우스의 언어적 능력은 ‘수공예(Handwerk)’라는 용어의 사용과 관련해서도 잘 드러난다. 바우하우스 초기 프로그램에 그토록 중요하게 등장하는 ‘수공예’를 그로피우스는 몇 년 후 미련없이 폐기한다.

그로피우스의 문장력, 언어구사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그의 저작들은 그의 연설과 강연을 그대로 옮긴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로피우스가 페터 베렌스의 건축사무소에서 일할 때부터 함께 일했던 아돌프 마이어(Adolf Meyer·1881~1929)가 그로피우스의 거의 모든 문서작업을 도맡았다.

그러나 그로피우스는 아돌프 마이어에 대해 그리 많은 언급을 하지 않았다. 감사의 표현도 인색했다(스티브 잡스에게 스티브 워즈니악이 있었다면 그로피우스에게는 아돌프 마이어가 있었다). 아돌프 마이어는 바우하우스에 건축과가 설치되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그가 이해하던 ‘건축’과 그로피우스가 이해하던 ‘건축’은 달랐다. 결국 바우하우스가 데사우로 이사하면서도 건축과가 설치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돌프 마이어는 바로 그로피우스 곁을 떠난다. 그리고 몇 년 후, 높은 건물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쳐 세상을 떠난다.

그렇다면 “예술은 가르칠 수 없다!(Kunst ist nicht lehrbar)”는 그로피우스의 선언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질문은 ‘추상’과 관련해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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