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천동 ‘시민 아파트’를 지켜 주세요!
2019년 08월 16일(금) 04:50
광주시 광천동에 가면 3층짜리 우중충하고 어두침침한 연립 아파트가 세 동 있다. 그 건물을 광천동 ‘시민 아파트’라고 부른다. ‘시민 아파트’는 소위 도시민들의 안락한 생활 터전의 개념인 ‘아파트’가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생겨난 피난민과 부랑민을 위하여 1970년에 광주시에서 지은 180여 가구의 3층짜리 연립 주택이다. 1가구는 10평쯤 되는 공간에 두 개의 방과 부엌을 겸한 통로가 있을 뿐, 화장실과 세면실이 없다. 건물 입구에 화장실과 세탁장을 공동으로 갖추어서 세면과 빨래, 혹은 쌀을 씻는 것도 모두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화장실은 수세식이 아니어서 들어가면 역한 냄새와 메탄가스로 눈이 따가웠다. 광주시에서 지었지만 이름만 아파트지 다가구 연립 판자촌이었다.

광천동 ‘시민 아파트’는 1970년 이후 대한민국 광주의 가난한 국민들이 화장실과 세탁실이 없는 10평짜리 쪽방에서 너댓 명의 자식들을 어렵사리 키우며 삶을 영위했던 현장이다. 그곳은 1970~1980년대의 가난한 국민들의 어려웠던 살림살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처절한 삶의 현장이다. 이렇게 현실이 생생하게 배어 있는 공간이 대한민국 어디에 또 있겠는가! 21세기의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이 이런 공간을 본 적이 있을까! 광주시 광천동 ‘시민 아파트’는 그 자체로서 대한민국 근대 생활 문화의 박물관이자 기억 저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이 막바지 발악을 하던 1978년 8월, 광천동 천주교 교리실에서 광주·전남 지역 최초의 노동 야학인 들불 야학의 창립식이 열렸다. 대학생들이 광천동 광주공단의 배움에 목마른 노동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세상을 이야기하고자 설립된 야학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역인 박기순, 5월 항쟁의 대변인 윤상원,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시민 아파트 지역운동가이자 5월 항쟁 기획실장 김영철, 투사 회보 필경사 박용준 등이 모두 이곳 들불 야학에서 모였다. 들불 야학은 학생 수가 늘어나자 시민 아파트를 임대하여 교실로 사용하였다. 윤상원 열사는 동생과 함께 아예 시민 아파트 방을 얻어 자취를 하였다.

5·18 민주화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검열에 항의하여 신문 제작은 중지되고 TV뉴스에서는 시위대가 던진 돌을 맞고 쩔뚝거리는 군인의 모습만 방영되고 있었다. 그날 오후 1시 도청 앞 광장에서 금남로에 운집한 시민들을 향해 공수부대의 실탄 총격이 시작되어 60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날 광천동 성당 교리실과 시민 아파트의 방을 교실로 사용하던 들불 야학의 대학생 강학과 노동자 학생들이 모여 수동식 등사기로 ‘투사 회보’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도청 투쟁위원회 대변인 윤상원이 보낸 원고를 YWCA 신협 직원으로 근무했던 고아 출신 박용준이 등사 원지에 철필로 쓰면 나명관, 윤순호 등 노동자 학생들이 밤낮을 쉬지 않고 등사기를 돌렸다. 그러다 5월 25일 들불 야학 팀들은 시내 전일빌딩 뒤편의 YWCA로 옮겨 투사 회보를 제작하다 27일 새벽 M16 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의 총격에 의해 박용준이 사망하고 나머지 야학 학생들은 체포되고 말았다. 광천동 시민 아파트는 5·18 민주화운동 투쟁 상황을 소식지 형태로 제작한 역사적 공간이다.

2019년 현재, 광주는 주택가 절반쯤이 아파트 건설로 공사 중이다. 시민 아파트가 서있는 광천동 주택가도 53개 동, 5700여 세대의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면 시민 아파트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시민 아파트에 서려있는 들불 야학의 역사와 박기순 윤상원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도 모두 잊혀지고 말 것이다. 그뿐 아니라 지역 개발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김영철 열사의 활동과 화장실도 없이 어렵사리 살아왔던 수많은 민초들의 고단한 삶에 담긴 이야기도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시민 아파트는 근대 생활 문화의 기억 저장소이기도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또 다른 현장이다. 지금 광주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시민 아파트’를 지키지 못하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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