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진압군 ‘버스 총격’ 효천역 인근서도 있었다”
평화봉사단 활동 폴 코트라이트 광주일보에 목격 증언
1980년 5월 21일 오후 도로에 버스 3대 널브러져
버스에 총탄 자국 무수히 많았고 내부에는 핏자국
1980년 5월 21일 오후 도로에 버스 3대 널브러져
버스에 총탄 자국 무수히 많았고 내부에는 핏자국
![]() 1980년 5월21일 당시 광주시 남구 송암동 효천역 인근 남평~광주간 국도변에 시민군 민간버스가 넘어져 있다. 사진을 찍은 폴 코트라이트씨는 해당 버스 이외에도 총격을 당하고 핏자국이 있는 버스 3대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폴 코트라이트씨 제공> |
5·18민중항쟁 당시 광주시 남구 효천역 인근에서 민간 버스에 대한 사격이 있었다는 외국인 목격자의 첫 증언이 나왔다. 이 목격자는 1980년 5월21일 오후 남평~광주간 도로 차단 지점에서 광주 방향쪽으로 이동을 하다 도로에 총탄자국이 무수한 버스 3대가 지그재그 모양으로 멈춰선 광경을 봤다. 내부에는 핏자국이 있었고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5·18민중항쟁 당시 광주·전남에서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 소속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던 폴 코트라이트(63·Paul Courtright)씨는 지난 12일 광주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광주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1980년 나주시 남평 호혜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5월21일 자전거를 타고 광주에 왔다가 끔찍한 참상을 목격했다”며 “군용차량과 민간차량으로 도로를 막은 차단지점을 통과해 효천역 인근까지 왔는데 버스 3대가 널브러져 있었고 겉면에는 수많은 총탄 흔적이 보였다”고 증언했다. 이어 “버스 안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핏자국을 봤다”며 “광주 상황이 그 정도로 심각한지 몰랐기 때문에 매우 겁이 났고, 그때 본 모습은 평생 트라우마로 자리잡아 나를 괴롭히고 있다”고 말했다.
폴씨는 또, 지금의 효천역 인근에서 민간 버스가 옆으로 넘어져 논에 빠져 있는 모습과 차단 지점 2곳 등을 직접 찍은 사진도 처음으로 공개했다. 폴씨는 원본 필름을 분실했고, 사진 촬영 날짜는 5월21일로 추정했다.
버스를 찍은 사진은 광주시민 3명이 넘어진 버스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으로, 사진 속 버스는 왼편으로 누워 있고 오른쪽 헤드램프 위에는 붉은 글씨로 ‘계엄’이라고 적혀 있다. 앞 유리창과 번호판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사진촬영 장소는 사진 배경과 폴씨가 당시 연탄을 싣은 수레를 많이 봤다고 기억한 점으로 미뤄 남선연탄공장이 있는 지금의 효천역 광주~나주간 도로 인근 송암공단 사거리로 추정된다. 차단 지점 사진은 진압군이 파손된 군용트럭과 민간 승용차·택시를 이용해 임시로 설치해놓은 차단시설의 모습이 담겨있다. 폴씨는 다만 총격을 당한 버스 사진은 두려움과 군인 감시 때문에 찍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항쟁 기간 폴씨는 5월23일 남평 호혜원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진압군의 제지에 막혀 5월25일까지 광주메 머물렀다. 미국 정부의 철수 명령에도 그는 팀 완버그·데이비드 돌린저·쥬디 채임벌린 등 다른 평화봉사단 동료 3명과 함께 외신기자 통역, 상무관 시신 수습 등을 도왔다.
폴씨를 포함한 평화봉사단원들은 언론에서 접한 광주 상황이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느꼈고 광주를 빠져나가 직접 사실을 밝히기로 결정했다. 폴씨는 “우리들은 데이비드 밀러 당시 광주 미국문화원장이 미국대사관에 제대로 보고하고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며 “회의 끝에 지리에 밝은 내가 광주를 빠져나가기로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폴씨는 25일 송암동 인근 산길을 5~6시간 걸어 광주를 벗어난 뒤 택시를 타고 전주로 가 고속버스를 이용해 서울로 향했다.
폴씨는 다음 날 미국 대사관을 찾아 2시간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는 지금까지도 ‘당시 미국 정부가 5·18을 이미 폭동으로 규정하고, 자국민인 자신들의 이야기까지도 묵살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헬기사격에 대한 질문에는 “사실이라고 확신한다”고 답변했다. 폴씨는 “상무관에서 활동하며 손자를 잃은 할머니로부터 헬기에서 총을 쐈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이 할머니 뿐 아니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여러 광주시민들에게 헬기사격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나는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5·18연구자들은 폴씨의 증언에 대해 충분한 신빙성을 부여하며 효천역 인근 버스 사격에 대해서는 조사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5·18재단은 오는 18일 폴씨를 초청해 증언을 청취할 계획이다.
폴씨의 인터뷰 통역과 자문을 맡은 이재의 5·18기념재단 비상임 연구원은 “39년 전 기억이지만 폴씨의 이야기는 5·18 일자별 상황과 비교하면 대부분 일치한다”며 “그동안 주남마을 민간버스 학살만 알려진 상황에서 효천역 인근에서도 버스 학살이 있었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kimyh@kwangju.co.kr
버스를 찍은 사진은 광주시민 3명이 넘어진 버스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으로, 사진 속 버스는 왼편으로 누워 있고 오른쪽 헤드램프 위에는 붉은 글씨로 ‘계엄’이라고 적혀 있다. 앞 유리창과 번호판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사진촬영 장소는 사진 배경과 폴씨가 당시 연탄을 싣은 수레를 많이 봤다고 기억한 점으로 미뤄 남선연탄공장이 있는 지금의 효천역 광주~나주간 도로 인근 송암공단 사거리로 추정된다. 차단 지점 사진은 진압군이 파손된 군용트럭과 민간 승용차·택시를 이용해 임시로 설치해놓은 차단시설의 모습이 담겨있다. 폴씨는 다만 총격을 당한 버스 사진은 두려움과 군인 감시 때문에 찍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항쟁 기간 폴씨는 5월23일 남평 호혜원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진압군의 제지에 막혀 5월25일까지 광주메 머물렀다. 미국 정부의 철수 명령에도 그는 팀 완버그·데이비드 돌린저·쥬디 채임벌린 등 다른 평화봉사단 동료 3명과 함께 외신기자 통역, 상무관 시신 수습 등을 도왔다.
폴씨를 포함한 평화봉사단원들은 언론에서 접한 광주 상황이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느꼈고 광주를 빠져나가 직접 사실을 밝히기로 결정했다. 폴씨는 “우리들은 데이비드 밀러 당시 광주 미국문화원장이 미국대사관에 제대로 보고하고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며 “회의 끝에 지리에 밝은 내가 광주를 빠져나가기로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폴씨는 25일 송암동 인근 산길을 5~6시간 걸어 광주를 벗어난 뒤 택시를 타고 전주로 가 고속버스를 이용해 서울로 향했다.
폴씨는 다음 날 미국 대사관을 찾아 2시간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는 지금까지도 ‘당시 미국 정부가 5·18을 이미 폭동으로 규정하고, 자국민인 자신들의 이야기까지도 묵살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헬기사격에 대한 질문에는 “사실이라고 확신한다”고 답변했다. 폴씨는 “상무관에서 활동하며 손자를 잃은 할머니로부터 헬기에서 총을 쐈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이 할머니 뿐 아니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여러 광주시민들에게 헬기사격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나는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5·18연구자들은 폴씨의 증언에 대해 충분한 신빙성을 부여하며 효천역 인근 버스 사격에 대해서는 조사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5·18재단은 오는 18일 폴씨를 초청해 증언을 청취할 계획이다.
폴씨의 인터뷰 통역과 자문을 맡은 이재의 5·18기념재단 비상임 연구원은 “39년 전 기억이지만 폴씨의 이야기는 5·18 일자별 상황과 비교하면 대부분 일치한다”며 “그동안 주남마을 민간버스 학살만 알려진 상황에서 효천역 인근에서도 버스 학살이 있었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kimy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