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천년인물]<41> 보성 나철 (하)
‘홍익인간’ 이념 바탕 항일독립운동 앞장
일제에 직접 저항보다
단군정신 바탕 민족 결집
구국·종교 활동 전개
교세확장·독립운동 기폭제
보성군 나철 선양사업 심혈
대종교 독립운동관·홍암관
일제에 직접 저항보다
단군정신 바탕 민족 결집
구국·종교 활동 전개
교세확장·독립운동 기폭제
보성군 나철 선양사업 심혈
대종교 독립운동관·홍암관
![]()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 자리한 나철 생가. 의향 보성에서는 지난 2016년 나철기념관 건립을 비롯해 생가 복원 등 다양한 선양사업을 펼치고 있다. |
“돌아보건대 이 몸이 다시 지난해에 칼을 품고 역적을 죽이려던 인영(寅永)이 아니라 이에 오늘날 정성을 열어서 원수를 돌이키는 철이 되고 또 이 맘이 다시 옛날에 열을 맛보면서 한 나라만 사랑하는 치우친 생각이 아니라 이에 이 날로써 어짊을 같이 하야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한 길을 가졌거늘…”
나철 선생은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명할 때 유서를 남겼다. 위 글은 일본 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에게 남긴 유서로 ‘홍암신형조천기’라는 책에 수록돼 있다. 나철은 이밖에 가족과 지인들에게도 유서를 남겼다. 눈에 띄는 것은 일본 총리대신에게 유서를 남겼다는 점이다. 유서는 ‘자신의 죽음은 나라와 겨레를 위함이며 대종교는 한 나라를 넘어 세계를 위함이며 탄압하지 말라’는 것이 요지다.
물론 나철 선생이 순명을 각오하고 보낸 유서가 일제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거절을 예상하면서도 유서를 보낸 것은 대종교인들이 더욱 가열차게 항거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철의 순명은 교세확장과 독립운동 전개에 기폭제가 됐다.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홍암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바로 옆에는 홍암나철기념관이 자리한다. 초겨울 짧아진 해를 걱정하며 그의 생가로 들어선다. 낮은 담장 너머로 소박하지만 굳건한 기상이 느껴진다. 오래된 유물 같기도 한 그의 고택에선 세월의 무상함과 그 무상함 속에서도 빛나는 유훈 같은 게 배어나온다.
다소 지대가 높은 안채와 사랑채 아래 둥그런 마당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는 크고 작은 나무가 자연스럽게 벗하며 서있고 소박하지만 꽤 운치가 감도는 웅덩이도 있다. 텅 비어 물은 없지만, 오래 전 방방하게 물이 차올랐을 적에는 아름다운 풍광이 어리었을 것 같다.
이곳 생가에서 나철의 천품을 가늠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강직하지만 온유하고, 명민하지만 소탈했을 것 같다. 사람은 집을 닮는다는 말이 맞다면 나철은 이 집을 닮았을 게다. 생가 이곳저곳에 지난 세월이 켜켜이 묻어 있어 사람살이의 흔적이 가늠된다. 이곳에서 유년과 청년의 한때를 보낸 나철은 대종교의 정신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군 ‘밀알’이 된 거였다.
잠시, 그가 대종교를 중광하던 즈음으로 돌아가보자. 나철의 항일 활동은 다양한 방면에 걸쳐 진행됐다. 을사오적 처단 의거를 비롯해 국채보상운동, 대일외교항쟁을 펼쳤고 호남학회 등에도 관여했다. 일제 침탈이라는 절대 절명의 시기에 그가 전개했던 애국애족 운동은 모두 국권회복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웠다. 세상 이치라는 게 국가적 재난이 닥치면 이를 토대로 출세의 길로 나아가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을사오적이 바로 그런 부류다. 그러나 나철처럼 자신을 희생해 의의 길로 직진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역사는 두 부류의 사람을 모두 기억한다. 전자는 국가의 위난을 기회삼아 배를 채운 파렴치한 인물로 기록되지만 후자는 대의를 위해 거룩한 희생을 치른 인물로 평가된다.
나철의 일생에서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대로 대종교 중창이다. 1909년 서울 재동 취운정(翠雲亭)에서 제천의식 거행을 계기로 단군교를 중광했다. 오기호, 이기, 김윤식 등 수많은 동지들이 함께했다. 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해 대종교로 명칭을 변경했다.
“나철은 힘이 없는 한국의 입장에서 근대화된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보다 단군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의 정신적 결집이 더욱 절실한 문제로 다가왔고, 이를 바탕으로 국혼·민족혼은 단군 신앙에 근거한 단군교 중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고 경전과 의례를 정비한 뒤 적극적인 구국 활동과 함께 종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대종교를 탄압하자 오직 대종교를 위하고,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하고, 민족의 결집을 위해 1916년 대한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일본 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에게 유서를 보내고 스스로 순명하였다.”(하태근, 『홍암 나철의 구국 활동과 순명』, 레인보우, 2016.)
이처럼 나철은 대종교를 향후 독립투쟁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5천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 단군은 국난을 극복하는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의 토대가 됐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점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단군과 대종교를 기반으로 한 독립사상뿐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생가를 나와 기념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해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걸음이 빨라진다. 보성군이 나철 선생 선양사업으로 지난 2016년에 개관한 이곳에는 사당 홍암사, 개천문, 전시관인 홍암관, 대종교 독립운동관, 자료실로 구성돼 있다. 전통 양식의 기와지붕 두 동은 보성이 의향임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기와지붕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겨울햇귀가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기(瑞氣)를 발한다. 질곡의 역사를 헤쳐 나온 시대의 선각자 나철선생의 풍모를 보는 것도 같다.
홍암관은 나철의 출생과 성장, 대일외교항쟁, 을사오적 처단의거, 대종교 중광과 발전에 관한 자료들이 비치돼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나철이 순명하기 직전 딸에게 보내는 친필 유서다. ‘아비를 만나려거든 공부를 통하여 한울 길로 오라. 임종에 두어자 유탁하니 잊지 말라.’ 아비로서 몇 해 동안 보지 못했던 딸에 대한 염려와 사랑이 느껴진다. 열심히 공부해 큰 길로, 나라사랑의 길로 나아가라는 애정어린 당부에서 자식의 사랑을 대의로 확장하려는 숨은 뜻이 읽혀진다.
대종교 독립운동관에는 중광단, 대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등 대종교들이 주축이 됐던 항일투쟁 관련 자료들이 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손색이 없다.
기념관을 나와 벌교를 떠난다. 언제 와도 의향의 굳은 심지가 느껴지는 이곳 보성 땅에서 모처럼 큰 인물의 생을 되짚어보았다. 그는 ‘독립운동의 아버지’를 넘어 겨레의 큰 스승으로 모자람이 없다.
“나철의 사상은 ‘홍익인간’을 바탕으로 도리로 교화된 이상 세계인 ‘이화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이념과 하늘의 뜻에 따라 인간이 사이좋게 지내고자 하는 ‘호생’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념의 구현은 권선징악이라는 도덕적 이념으로 실현하고자 했다.”(하태근, 『홍암 나철의 구국 활동과 순명』, 레인보우, 2016)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물론 나철 선생이 순명을 각오하고 보낸 유서가 일제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거절을 예상하면서도 유서를 보낸 것은 대종교인들이 더욱 가열차게 항거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철의 순명은 교세확장과 독립운동 전개에 기폭제가 됐다.
다소 지대가 높은 안채와 사랑채 아래 둥그런 마당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는 크고 작은 나무가 자연스럽게 벗하며 서있고 소박하지만 꽤 운치가 감도는 웅덩이도 있다. 텅 비어 물은 없지만, 오래 전 방방하게 물이 차올랐을 적에는 아름다운 풍광이 어리었을 것 같다.
![]() 당호인 ‘일지당’ 현판. |
![]() 민족독립지도자 홍암나철선생 유적비. |
![]() 민족독립지도자 홍암나철선생 유적비. |
이곳 생가에서 나철의 천품을 가늠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강직하지만 온유하고, 명민하지만 소탈했을 것 같다. 사람은 집을 닮는다는 말이 맞다면 나철은 이 집을 닮았을 게다. 생가 이곳저곳에 지난 세월이 켜켜이 묻어 있어 사람살이의 흔적이 가늠된다. 이곳에서 유년과 청년의 한때를 보낸 나철은 대종교의 정신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군 ‘밀알’이 된 거였다.
잠시, 그가 대종교를 중광하던 즈음으로 돌아가보자. 나철의 항일 활동은 다양한 방면에 걸쳐 진행됐다. 을사오적 처단 의거를 비롯해 국채보상운동, 대일외교항쟁을 펼쳤고 호남학회 등에도 관여했다. 일제 침탈이라는 절대 절명의 시기에 그가 전개했던 애국애족 운동은 모두 국권회복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웠다. 세상 이치라는 게 국가적 재난이 닥치면 이를 토대로 출세의 길로 나아가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을사오적이 바로 그런 부류다. 그러나 나철처럼 자신을 희생해 의의 길로 직진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역사는 두 부류의 사람을 모두 기억한다. 전자는 국가의 위난을 기회삼아 배를 채운 파렴치한 인물로 기록되지만 후자는 대의를 위해 거룩한 희생을 치른 인물로 평가된다.
나철의 일생에서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대로 대종교 중창이다. 1909년 서울 재동 취운정(翠雲亭)에서 제천의식 거행을 계기로 단군교를 중광했다. 오기호, 이기, 김윤식 등 수많은 동지들이 함께했다. 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해 대종교로 명칭을 변경했다.
“나철은 힘이 없는 한국의 입장에서 근대화된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보다 단군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의 정신적 결집이 더욱 절실한 문제로 다가왔고, 이를 바탕으로 국혼·민족혼은 단군 신앙에 근거한 단군교 중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고 경전과 의례를 정비한 뒤 적극적인 구국 활동과 함께 종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대종교를 탄압하자 오직 대종교를 위하고,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하고, 민족의 결집을 위해 1916년 대한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일본 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에게 유서를 보내고 스스로 순명하였다.”(하태근, 『홍암 나철의 구국 활동과 순명』, 레인보우, 2016.)
이처럼 나철은 대종교를 향후 독립투쟁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5천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 단군은 국난을 극복하는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의 토대가 됐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점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단군과 대종교를 기반으로 한 독립사상뿐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생가를 나와 기념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해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걸음이 빨라진다. 보성군이 나철 선생 선양사업으로 지난 2016년에 개관한 이곳에는 사당 홍암사, 개천문, 전시관인 홍암관, 대종교 독립운동관, 자료실로 구성돼 있다. 전통 양식의 기와지붕 두 동은 보성이 의향임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기와지붕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겨울햇귀가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기(瑞氣)를 발한다. 질곡의 역사를 헤쳐 나온 시대의 선각자 나철선생의 풍모를 보는 것도 같다.
홍암관은 나철의 출생과 성장, 대일외교항쟁, 을사오적 처단의거, 대종교 중광과 발전에 관한 자료들이 비치돼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나철이 순명하기 직전 딸에게 보내는 친필 유서다. ‘아비를 만나려거든 공부를 통하여 한울 길로 오라. 임종에 두어자 유탁하니 잊지 말라.’ 아비로서 몇 해 동안 보지 못했던 딸에 대한 염려와 사랑이 느껴진다. 열심히 공부해 큰 길로, 나라사랑의 길로 나아가라는 애정어린 당부에서 자식의 사랑을 대의로 확장하려는 숨은 뜻이 읽혀진다.
대종교 독립운동관에는 중광단, 대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등 대종교들이 주축이 됐던 항일투쟁 관련 자료들이 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손색이 없다.
기념관을 나와 벌교를 떠난다. 언제 와도 의향의 굳은 심지가 느껴지는 이곳 보성 땅에서 모처럼 큰 인물의 생을 되짚어보았다. 그는 ‘독립운동의 아버지’를 넘어 겨레의 큰 스승으로 모자람이 없다.
“나철의 사상은 ‘홍익인간’을 바탕으로 도리로 교화된 이상 세계인 ‘이화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이념과 하늘의 뜻에 따라 인간이 사이좋게 지내고자 하는 ‘호생’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념의 구현은 권선징악이라는 도덕적 이념으로 실현하고자 했다.”(하태근, 『홍암 나철의 구국 활동과 순명』, 레인보우, 2016)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