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5·18 ④ “장갑차 뚜껑 열리더니 M16 총구서 ‘탕’ … 고교생이 쓰러졌다”
19일 광주고 앞 조대부고생 피격
당시 치료의 “실탄 3∼4발 빼내”
계엄군 “불순세력 선동” 은폐 급급
동구청 일지, 군 보고 내용 뒤집어
당시 치료의 “실탄 3∼4발 빼내”
계엄군 “불순세력 선동” 은폐 급급
동구청 일지, 군 보고 내용 뒤집어
![]() 부상자를 옮기고 있는 시민들.
<광주일보 자료사진> |
5·18 민주화운동 기간 중 첫 발포는 1980년 5월19일 오후 4시50분 광주시 동구 계림동 광주고등학교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일어났다. 당시 계엄사령부는 이날 발포를 부정했다. 하지만 총상환자와 그를 치료한 의사들은 계엄사의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일관성있게 진실을 말했고, 5·18 첫 발포는 5월19일에 일어났다고 공식 인정 받을 수 있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2007)에 따르면 이날 발포로 당시 조대부고 3학년이었던 김영찬군이 유탄에 총상을 입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시위진압에 나섰다가 멈춰선 장갑차를 시위대가 공격하자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차정환 대위가 M-16 소총을 발포해 김군이 유탄을 맞았다.
하지만 계엄군은 발포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총격 발생 8시간이 지난 20일 새벽 1시께 보안사는 현지 505보안부대로부터 “5월 19일 고교생 1명(인적사항 미상)이 우측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전남의대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505보안부대는 “관내 4개 파출소 파괴 집결 데모대가 쇠파이프 및 면도칼을 소지했던 점으로 보아 특정 배후 조직에 의한 조직적이고 기동력 있는 데모대로 판단”이라며 “데모 진압병력에게는 실탄을 미지급하고 경계병력만 1인당 10발씩을 분출, 장교가 통합 보관하고 있을 뿐이었다”고 발포를 부인했다. 또 “5월 19일 발포 사실 전무했음을 감안할 때 고교생은 특정 데모세력에 의해 무성 권총으로 사격, 계엄군이 발포한 것으로 선동키 위한 지능적 수법”이라며 불순세력의 선동 수법으로 판단했다.
계엄사령부도 ‘고교생 총상자 확인 결과’에서 “김영찬(조대부고 3년·19). 5월 19일 오후 5시 광주시 계림동 5거리에서 데모대에 가입. 장갑차에 방화하려다가 복부 관통 상해를 입고, 전남대 병원에 후송. 총탄 출구가 입구보다 적으며 다수의 파편이 박혀 총기 제원 판단 곤란”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당시 장갑차를 몰고 시위진압에 나섰던 11여단의 전투상보, 상급부대인 31사단과 전교사의 상황일지 등에는 5월 19일 발포에 관련된 어떤 내용도 찾아볼 수 없다. 11공수여단에서 상급부대에 보고를 하지 않은 채 발포 사실을 은폐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동구청은 계엄사나 보안사와는 다른 보고를 했다. 동구청의 ‘5·18사태일지’에는 “광주고에서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장갑차가 고장으로 있을 때 시민에게 총 발사로 국교생(초등학생) 2명, 중학생 1명, 고교생 1명 부상, 계엄군 차량으로 후송”으로 적혀 있다.
김영찬을 후송한 인물은 현장 부근에 있었던 공중보건의 정은택(현 원광대 교수)씨였다. 정씨는 인근 외과병원으로 김영찬을 후송해 응급수술을 한 뒤 전남대병원으로 이송했다.
국내 최초 5·18학술단체인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가 지난 1988년 펴낸 ‘광주 5월 민중항쟁 사료전집’에 실린 김영찬군의 증언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나와있다.
5월18일 김군은 친구로부터 ‘지금 시내에서 난리가 났다. 공수부대원들이 사람들을 곤봉으로 사정없이 후려갈기고 칼로 쑤신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19일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자, 조선대 운동장에 텐트가 쳐 있고 공수부대원이 진주해 있었다.
4교시가 끝나자 김군의 담임은 오전 수업만 하기로 했다며 시내가 어수선하니까 곧장 집으로 가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김군은 지산동에 있는 친구 자취방에 놀러 간다. 친구가 집에 없자 전남여고 옆 하천을 따라 옛 MBC방송국까지 걸어갔고 공수부대에 쫓기는 시위대를 만났다. 김군은 대인시장 인근에서 시위대와 어울렸다. 잠시 후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중간지역에 장갑차 1대가 보였다. 시위대는 짚단 5개 정도에 불을 붙여 장갑차 밑에 던졌으나 더 이상 타 들어가지 않자 돌을 던져서 장갑차의 유리창을 깨뜨리려고 했다.
유리창 깨뜨리기는 쉽지 않았고 시위대 중 한명이 장갑차의 해치를 열어 불 붙은 짚단을 집어넣어야겠다고 말했다. 김군은 그 시위대와 불 붙은 짚단을 들고 장갑차의 해치를 열려고 했지만 열리지 않자 뚜껑 위에 짚단을 올려놓고 인도쪽으로 뛰어갔다.
그 때였다. 장갑차 해치가 열리면서 총구가 보이더니 하늘을 향해 총이 발사됐다. 김군 옆에 있던 어른들은 공포탄이니까 무서워말라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아스팔트에 불꽃이 튀면서 김군은 쓰러진다. 땅을 향해 발사된 총알이 튀어 오른쪽 배를 관통해 왼쪽 엉덩이로 빠져나간 것이다. 김군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21일 전남대병원에서 깨어났다.
입원 중인 김군에게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이 찾아온다. 군인들은 5월19일 발포한 적이 없는데 혹시 시민들이 발포한 총에 맞지 않았냐는 것이다.
김군은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 분명히 장갑차 뚜껑에서 나왔던 총구로 인해 부상 당했다”고 말했다. 김군은 장 2m를 잘라내는 등 수술 5번을 받은 끝에 1980년 12월24일 퇴원했다.
올해 3월 광주시의사회가 발간한 ‘5·18의료활동Ⅱ’에서는 김군을 치료했던 김영진(당시 외과 전공의 1년차) 전남대 교수의 증언이 실려있다.
김 교수는 “우리 병원에서 처음 치료한 총상환자가 김영찬군이었다”며 “김군에게서 ‘장갑차 위로 올라갔는데 장갑차 안에서 쏴버렸다’고 들었다”고 회상했다.
김 교수는 총알이 뚫고간 김군의 대장을 봉합하기 위해 장기를 잘라냈다. 총상환자에 대한 치료 경험이 없었지만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고 떠올렸다.
지난 2006년 중년이 된 김군은 계림동에서 자신을 구한 공중보건의였던 정은택 원광대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와 해후한다. 정 교수는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1980년 2월 전남대 의대를 졸업한 정 교수는 같은해 5월19일 공중보건의로 배치받아 사령장을 받기 위해 전남도청을 다녀 오는 길이었다. 북구 중흥동 집까지 걸어서 가던 중 계림동에서 짚단에 불을 붙여 장갑차로 접근하는 시위대를 봤다.
잠시 후 장갑차의 해치가 열리고 총부리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공포탄이 발사됐고 곧바로 땅을 향해 실탄이 난사됐다. 김군이 쓰러졌고 장갑차의 군인은 ‘더 이상 사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하늘을 향해 총을 세우고 빙빙 돌렸다.
정 교수는 김군을 업고 50m를 뛰어 인근 외과 병원으로 들어갔다. 의사들은 모두 대피하고 없어 간호보조원과 함께 김씨의 배에서 실탄 3∼4발을 빼내고 몇 바늘 꿰맨 후 전남대병원으로 이송했다.
정 교수 또한 보안대의 수사를 피할 수 없었다. 보안대 수사관들은 정 교수에게 “실탄도 지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군인들이 총을 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며 출석을 강요했다. 정 교수는 보안대의 감시를 피해 20일 새벽 발령지였던 순천으로 떠나 수사망을 피했다.
한편, 김군에게 총상을 입혔던 차 대위는 1980년 5월24일 송암동에서 일어난 11공수여단과 전투병과교육사령부 교도대간 오인 사격으로 사망했다.
/김용희기자 kimyh@kwangju.co.kr
보고서에 따르면 시위진압에 나섰다가 멈춰선 장갑차를 시위대가 공격하자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차정환 대위가 M-16 소총을 발포해 김군이 유탄을 맞았다.
하지만 계엄군은 발포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총격 발생 8시간이 지난 20일 새벽 1시께 보안사는 현지 505보안부대로부터 “5월 19일 고교생 1명(인적사항 미상)이 우측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전남의대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계엄사령부도 ‘고교생 총상자 확인 결과’에서 “김영찬(조대부고 3년·19). 5월 19일 오후 5시 광주시 계림동 5거리에서 데모대에 가입. 장갑차에 방화하려다가 복부 관통 상해를 입고, 전남대 병원에 후송. 총탄 출구가 입구보다 적으며 다수의 파편이 박혀 총기 제원 판단 곤란”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당시 장갑차를 몰고 시위진압에 나섰던 11여단의 전투상보, 상급부대인 31사단과 전교사의 상황일지 등에는 5월 19일 발포에 관련된 어떤 내용도 찾아볼 수 없다. 11공수여단에서 상급부대에 보고를 하지 않은 채 발포 사실을 은폐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동구청은 계엄사나 보안사와는 다른 보고를 했다. 동구청의 ‘5·18사태일지’에는 “광주고에서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장갑차가 고장으로 있을 때 시민에게 총 발사로 국교생(초등학생) 2명, 중학생 1명, 고교생 1명 부상, 계엄군 차량으로 후송”으로 적혀 있다.
김영찬을 후송한 인물은 현장 부근에 있었던 공중보건의 정은택(현 원광대 교수)씨였다. 정씨는 인근 외과병원으로 김영찬을 후송해 응급수술을 한 뒤 전남대병원으로 이송했다.
국내 최초 5·18학술단체인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가 지난 1988년 펴낸 ‘광주 5월 민중항쟁 사료전집’에 실린 김영찬군의 증언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나와있다.
5월18일 김군은 친구로부터 ‘지금 시내에서 난리가 났다. 공수부대원들이 사람들을 곤봉으로 사정없이 후려갈기고 칼로 쑤신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19일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자, 조선대 운동장에 텐트가 쳐 있고 공수부대원이 진주해 있었다.
4교시가 끝나자 김군의 담임은 오전 수업만 하기로 했다며 시내가 어수선하니까 곧장 집으로 가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김군은 지산동에 있는 친구 자취방에 놀러 간다. 친구가 집에 없자 전남여고 옆 하천을 따라 옛 MBC방송국까지 걸어갔고 공수부대에 쫓기는 시위대를 만났다. 김군은 대인시장 인근에서 시위대와 어울렸다. 잠시 후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중간지역에 장갑차 1대가 보였다. 시위대는 짚단 5개 정도에 불을 붙여 장갑차 밑에 던졌으나 더 이상 타 들어가지 않자 돌을 던져서 장갑차의 유리창을 깨뜨리려고 했다.
유리창 깨뜨리기는 쉽지 않았고 시위대 중 한명이 장갑차의 해치를 열어 불 붙은 짚단을 집어넣어야겠다고 말했다. 김군은 그 시위대와 불 붙은 짚단을 들고 장갑차의 해치를 열려고 했지만 열리지 않자 뚜껑 위에 짚단을 올려놓고 인도쪽으로 뛰어갔다.
그 때였다. 장갑차 해치가 열리면서 총구가 보이더니 하늘을 향해 총이 발사됐다. 김군 옆에 있던 어른들은 공포탄이니까 무서워말라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아스팔트에 불꽃이 튀면서 김군은 쓰러진다. 땅을 향해 발사된 총알이 튀어 오른쪽 배를 관통해 왼쪽 엉덩이로 빠져나간 것이다. 김군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21일 전남대병원에서 깨어났다.
입원 중인 김군에게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이 찾아온다. 군인들은 5월19일 발포한 적이 없는데 혹시 시민들이 발포한 총에 맞지 않았냐는 것이다.
김군은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 분명히 장갑차 뚜껑에서 나왔던 총구로 인해 부상 당했다”고 말했다. 김군은 장 2m를 잘라내는 등 수술 5번을 받은 끝에 1980년 12월24일 퇴원했다.
올해 3월 광주시의사회가 발간한 ‘5·18의료활동Ⅱ’에서는 김군을 치료했던 김영진(당시 외과 전공의 1년차) 전남대 교수의 증언이 실려있다.
김 교수는 “우리 병원에서 처음 치료한 총상환자가 김영찬군이었다”며 “김군에게서 ‘장갑차 위로 올라갔는데 장갑차 안에서 쏴버렸다’고 들었다”고 회상했다.
김 교수는 총알이 뚫고간 김군의 대장을 봉합하기 위해 장기를 잘라냈다. 총상환자에 대한 치료 경험이 없었지만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고 떠올렸다.
지난 2006년 중년이 된 김군은 계림동에서 자신을 구한 공중보건의였던 정은택 원광대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와 해후한다. 정 교수는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1980년 2월 전남대 의대를 졸업한 정 교수는 같은해 5월19일 공중보건의로 배치받아 사령장을 받기 위해 전남도청을 다녀 오는 길이었다. 북구 중흥동 집까지 걸어서 가던 중 계림동에서 짚단에 불을 붙여 장갑차로 접근하는 시위대를 봤다.
잠시 후 장갑차의 해치가 열리고 총부리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공포탄이 발사됐고 곧바로 땅을 향해 실탄이 난사됐다. 김군이 쓰러졌고 장갑차의 군인은 ‘더 이상 사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하늘을 향해 총을 세우고 빙빙 돌렸다.
정 교수는 김군을 업고 50m를 뛰어 인근 외과 병원으로 들어갔다. 의사들은 모두 대피하고 없어 간호보조원과 함께 김씨의 배에서 실탄 3∼4발을 빼내고 몇 바늘 꿰맨 후 전남대병원으로 이송했다.
정 교수 또한 보안대의 수사를 피할 수 없었다. 보안대 수사관들은 정 교수에게 “실탄도 지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군인들이 총을 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며 출석을 강요했다. 정 교수는 보안대의 감시를 피해 20일 새벽 발령지였던 순천으로 떠나 수사망을 피했다.
한편, 김군에게 총상을 입혔던 차 대위는 1980년 5월24일 송암동에서 일어난 11공수여단과 전투병과교육사령부 교도대간 오인 사격으로 사망했다.
/김용희기자 kimy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