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아서] (12) 기원전 2천년 크레타문명은 유럽문명의 시원
지중해 무역 독점 해양강국 크레타 … 청동기 고도 문명 발달
온난한 기후에 동서남북 해상 연결한 거대한 섬
미노스 왕, 통일국가 완성하고
올리브유·포도주 항아리 이집트·시리아 수출
막대한 부 축적하며 건축·예술 발달시켜

유럽 첫 포장도로에 하수도 시설까지 갖추고
방 1000개 넘었던 크노소스 궁전 어디 가고
폭격맞은 듯 초라한 궁터에 대형 올리브항아리만
2017년 09월 21일(목) 00:00
기원전 2000년경에 시작된 미노아 문명의 유적지 크노소스 궁터. 미노아 문명은 유럽문명의 시원이 됐다.
하니아 선창은 뜻밖에 한가하다. 관광객들이 찾지 않는 비수기란다. 여객선터미널을 나서자 택시기사 여러 명이 다가온다. 기념품 가게에서 학창시절에 들었던 낯익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들어보니 나나 무스쿠리의 노래 ‘Over and over’이다. 노래에 문외한인 내가 기억할 정도이니 명곡이 아닐까 싶다. 가사가 감미롭기 그지없다. ‘저는 달을 감히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천국을 알게 될 줄은 짐작도 못했어요/ 현재의 제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마음속의 기쁨을 어떤 말로도 표현을 못해요/ 계속해서 당신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계속해서 당신에게 키스를 해봅니다/ 당신의 눈 속에서 사랑의 빛을 봅니다/ 사랑은 영원해요 더 이상의 이별은 없어요.

일행 중 일부는 하니아 올드타운의 박물관으로 가고, 나와 은사님, 길진현 동문 세 사람은 흥정한 택시를 타고 이라클리온으로 향한다. 지도에는 헤라클리온이라고 나와 있지만 현지인들은 이라클리온이라 부르고 있다. 하니아에서 이라클리온까지는 버스로 3시간. 그러니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택시를 탄 것이다. 목적지는 크노소스 궁터와 카찬차키스의 무덤이다.

크노소스 궁터는 미노아문명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청동기시대의 미노아문명은 그리스문명는 물론 유럽문명의 시원이라고 봐도 된다. 그러나 내 관심은 길진현 동문과 달리 오직 카잔차키스일 뿐이다. 내가 택시기사에게 산투리 연주곡을 부탁하자 바로 들려준다. 산투리는 조르바가 애지중지했던 그리스와 터키의 전통악기이다. 소설 속에서 화자(나)는 조르바가 산투리를 대하는 태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조르바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세계는 자꾸 커지는 기분이지. 어쩌다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면 펄쩍 뛰어 일어나 춤을 춘다네. 춤으로도 안 되면 산투리를 무릎에다 올려놓고 켜기도 하지.’

‘나는 곡괭이와 산투리를 함께 다룰 수 있는 조르바의 손을 보았다. 두 손은 못이 박히고 터지고 일그러진 데다 힘줄이 솟아나와 있었다. 조르바는 여자의 옷이라도 벗기는 것처럼 섬세하고 주의 깊은 손놀림으로 보따리를 열고 세월에 닦여 반짝거리는 산투리를 꺼냈다. 줄이 여러 개였는데, 줄 끝에는 놋쇠와 상아와 붉은 비단 술로 장식돼 있었다. 그 큰 손이 여자를 애무하듯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정열적으로 줄을 골랐다. 그러다가는 사랑하는 여자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다시 옷을 입히는 것처럼 보따리에 싸기 시작했다.’

관광 시즌이 지나서인지 2차선 도로는 뻥 뚫려 있다. 크레타 태생이라는 택시 기사는 뚱뚱하고 선량한 얼굴이다. 여객선터미널에서 보았던 크레타 사람들의 얼굴도 그랬다. 실제로 그리스인 중에서도 크레타 사람들의 인심이 가장 후하다고 한다. 그리스인의 환대문화인 필로크세니아(philoxenia)의 진수를 크레타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필로크세니아란 ‘최고의 것을 대접한다’라는 뜻. 그런데 그리스 본토 사람들 일부가 크레타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비하하기도 한다는데, 아마도 그것은 크레타를 침략한 지배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누명이 아닐까 싶다.

고대 로마나 동로마제국, 베네치아 공화국이 크레타를 지배했지만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크레타 사람들이 그들에게 굽히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하고 투쟁했기 때문이었다. 베네치아가 지배할 때는 27건의 소요사태와 2세기 동안 무장투쟁과 폭동이 계속 일어났던 것이다. 베네치아가 점령한 곳은 도시지역뿐이고 산맥과 오지는 크레타의 전사(戰士) 가문들이 살았는데 베네치아 당국의 행정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저항하는 반골기질의 크레타 사람들을 제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침략자들은 사도 바울이 크레타 사람들을 비난한 구절을 찾아내 비아냥댔다고 한다. 사도 바울이 선교하고자 크레타에 들렀을 때 고분고분하지 않는 주민들을 향해 ‘거짓말쟁이이며, 사악한 짐승이며, 게으른 배불뚝이들’이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나 크레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본 것처럼 정말로 무지하고 사악했던 것일까. 바울이 크레타 사람들의 진면(眞面)과 자부심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유일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사악하고 무지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고대 크레타 사람들은 제우스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바로 크레타의 한 동굴이라 하여 자부심이 컸으리라. 그리스신화는 이야기한다. 후손에 의해 권력을 뺏기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들은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태어나는 자식들을 모조리 잡아먹는다. 이에 화가 난 제우스의 어머니 레아가 남편 몰래 크레타의 동굴에서 제우스를 낳고 키웠다는 것이다. 크레타 관광지도에도 딕티(Dikti)산 북쪽, 해발 1025m에 위치하는 사이크로 동굴이 제우스 동굴이라고 표기돼 있다. 뿐만 아니라 크레타의 미노아문명은 기원전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그리스문명보다 훨씬 앞선다. 이 정도면 크레타 사람들을 미신이나 믿는 미개인으로 알던 사도 바울이 잘못 봤다고 해야 되지 않을까.

택시 기사에게 미노아문명의 유적지인 크노소스 궁터가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30분 정도란다. 곡선의 좁은 길이지만 막힌 곳이 없었으므로 시속 80km쯤으로 내달린 듯하다. 미노아문명의 1차는 기원전 1900년경에 시작되었고, 2차는 기원전 1700년부터 다시 나타났는데, 이때를 미노아문명의 전성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문명은 기원전 1400년경에 갑자기 사라져버리는데, 소멸의 원인은 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지진설이 있고, 테라 섬의 화산폭발로 인한 화산재와 쓰나미의 급습, 이산화황의 햇볕 차단으로 영하의 기후변화 등을 들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고구려를 계승한 요동과 만주의 제국 발해가 멸망해버린 것과 흡사하다. 발해 역시 백두산 화산폭발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크레타에 고도의 문명이 발생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온난한 기후 조건을 들기도 하지만 나는 동지중해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섬으로써 동서와 남북의 해상을 연결하는 지정학적인 면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크레타가 바다를 지배한 해양강국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메소포타미아문명이 해풍처럼 자연스럽게 크레타로 불어간 것이 아닐까. 문명이란 반드시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니까. 해양제국 베네치아가 해양무역의 전초기지로 크레타를 400여 년 동안 지배한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고 본다.

크레타 여러 지역이 최초로 통일된 것은 기원전 2000년경 미노스 왕 때라고 한다. 미노아문명이란 말도 미노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미노스 왕국은 지중해의 무역을 거의 독점했다고 한다.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담은 화려한 항아리를 아프리카의 이집트, 동방의 시리아에 수출하면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건축과 예술은 그러한 부를 바탕으로 발달했을 터이다. 거대한 크노소스 궁전과 세밀한 조각과 화려한 그림이 그때 나타났으니 말이다. 당시 사람들은 상형문자와 선(線)문자를 사용하면서 장식물건과 염소를 사고 팔았다고 한다.

이윽고 택시가 숲이 있는 공터에 선다.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작은 크노소스 궁터가 보인다. 궁터 안으로 들어가 보니 폭격을 맞은 것처럼 벽돌과 기둥이 널려 있고, 미로 같은 길이 나 있다. 궁전은 단층이 아니라 복층이었던 것 같고, 길은 반듯한 돌이 깔린 포장도로이다. 안내문을 보니 궁전은 3-4층이었고, 방은 1000개가 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궁전 지붕에는 햇빛을 받아들이는 광정(光井)이 있어 건물 안을 환하게 밝혔으며, 수도와 하수도 시설 및 목욕탕, 유럽 최초의 포장도로가 나 있었다고 나온다.

제사장을 겸했던 미노스 왕의 옥좌가 있고, 방과 복도에 프레스코 그림이 장식돼 있었다는데 실제로 그림 두 점이 보인다. 비록 모조품이지만 말이다. 대형항아리 몇 개가 지하실 같은 장소에 있는데, 미노스왕국이 올리브유 수출국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도 같다. 그러니까 이곳의 유물은 모두 유럽 최초의 것들이므로 나와 일행은 유럽문명의 발원지에 와 있는 셈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유적지 건물을 복원하면서 원래의 재질로 하지 않고 시멘트를 이용하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글·사진 정찬주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 기사는 광주일보 홈페이지(www.kwangj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kwangju.co.kr/article.php?aid=1505919600613996253
프린트 시간 : 2025년 07월 11일 17: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