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아서] (10) 시장이 법과 종교의 중심지가 된 까닭은?
고대 아고라, 기원전 6세기부터 400년간 시장 형성
공정한 매매 법·철학자 연설 … 문화·종교의 중심지
다툼 있는 곳에 경찰관 천칭 들고 나타나 갈등 해소
‘갑질’ 기업에 사정 칼날 … 동서고금 천칭 의미 같아
2017년 08월 24일(목) 00:00
플라카 시장의 골목에는 기념품 가게와 노상 카페들이 즐비하다.
나는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아테네올림픽경기장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러나 막상 철로 된 정문 안을 들여다보니 만국기만 펄럭일 뿐 별다른 유적이 없다. 기원전 330년부터 아테나 여신을 위한 경기장으로 사용했으며 아테네의 가장 큰 축제인 판아테나이아 제전이 열렸던 곳이라지만 썰렁하다. 일행 중에 몇몇이 갈증이 난다고 한다. 시장에서 맥주를 한 잔 하고 싶은 모양이다. 고대시장과 현대시장이 있는데 어느 쪽이든 선택해야 한다. 고대 아고라와 플라카 시장 골목이 지척에 있는 것이다.

고대 아고라는 기원전 6세기부터 400년 동안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었으면서도 고대 그리스의 정치와 법,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지금도 고가의 물건을 판매했던 ‘아탈로스 스토아’라는 가게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장에는 사람들이 항상 모이기 때문에 정치가 있고, 공정한 매매를 위한 법이 있으며 철학자들이 연설을 하는 곳이었으므로 문화와 종교의 중심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시장과 법이 불가분의 관계인 까닭은 시장이야말로 어느 장소보다 정의로운 곳이었기 때문이리라. 지금도 그리스 시골의 종합시장 같은 데는 천칭을 소지한 경찰관이 있다고 한다. 상인과 고객이 다투면 경찰관이 즉시 천칭에 물건을 달아보고 조정해 준다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선가 본 적이 있다. 여기서 천칭은 갈등을 해소시켜주는 정의로운 법의 저울이고, 경찰관은 법을 다루는 집행관일 터이다. 한편, 막대저울에서 저울추를 가리키는 말로 왜 권력 권(權)자를 쓰는지 이해가 된다. 저울추는 물건을 사고파는 데 있어서 무게를 재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신화를 보니 법과 정의를 담당하고 있는 여신은 아스트라이아이다. 법과 정의를 상징한다는 뜻으로 ‘눈을 가리고 천칭과 칼을 든’ 모습의 여신이다. 정의(천칭)를 실현하려면 칼(힘)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도 같다. 요즘 우리나라의 공정거래위원회가 시장경제를 교란하고 ‘갑질’하는 기업을 상대로 칼을 빼들었다고 하는데 고대 그리스 때나 지금이나 동서양 불문하고 천칭의 의미는 유효한 것 같다.

플라카 시장으로 가는 도중에 일행을 태운 택시가 멈춘다. 그리스 대통령궁이라고 한다. 시가지 안에 자리한 것이 조금 옹색하게 보인다. 대통령궁 둘레의 길도 2차선으로 협소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청와대처럼 구중궁궐의 음습한 분위기가 아니어서 좋다. 현재는 청와대 앞길을 개방했다고 하지만 내가 서울에 살 때는 그러지 못했다. 앞길을 지나치려면 환한 대낮인데도 경찰의 검문과 제지를 받았던 것이다. 결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가끔 일방적인 담화를 발표한 뒤 사라져버리는 대통령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시민과 동떨어진 은밀한 장소에 있다가 TV 화면에 등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솔직히 나는 왕조시대의 그림자를 보는 듯했던 것이다.

때마침 그리스 대통령궁 근위병들이 초소에서 부동자세로 있다가 서로 교대를 한다.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1시간마다 반복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특이한 복장이다. 단추가 많은 상의제복에 하의는 주름치마를 입고 있다. 그리고 가죽구두의 구두코에는 검은 수술이 달려 있다. 움직이는 동작도 독특하다. 발을 앞으로 높이 들었다가 말이 뒷발질하듯 하며 나아간다. 부동자세로 서 있는 동안 뭉쳤던 근육이 풀어지는 데는 그만일 듯싶다. 관광객들이 옆으로 가 기념사진을 찍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이것도 아테네의 관광거리가 된 듯하다.

이윽고 플라카 구역에 들어선 일행은 노상카페에 앉자마자 생맥주부터 시킨다. 나는 잠시 일행을 벗어나 가게를 둘러본다. 골목을 들어서면서 눈에 띈 가게가 있었던 것이다. 조각품을 진열해 놓은 가게인데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부엉이 조각들이었다. 주인이 부엉이는 지혜를 상징하는 아테네의 새라고 한다. 여신 아테나가 지혜의 여신이므로 주인의 설명이 사족처럼 느껴진다. 나는 무심코 부엉이 기념품들을 보다가 한 조각품에 관심을 갖는다. 부엉이 세 마리가 한 가지에 앉아서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마리는 자신의 날개로 입을 가리고 있고, 또 한 마리는 눈을 가리고 있고, 또 다른 한 마리는 귀를 가리고 있다.

법정스님께서 인도 간디기념관에 가셨다가 선물로 사온 세 마리 원숭이상(像)과 동작들이 똑같다. 평화주의자 간디가 생전에 좋아했던 원숭이상이라고 해서 기념관 측에서 모조품을 만들어 파는 모양이라고 말씀하셨다. 스님께서 내게 주시면서 말은 가려서 하고, 보기 좋은 것도 가려서 보고, 듣기 좋은 소리도 가려서 들으라는 의미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세 마리 부엉이상의 의미도 같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부엉이가 지혜를 상징하는 아테네의 새가 됐을 법하다.

은사님께서 설명하신 원형이론을 다시 떠올려 본다. 그리스와 인도에 의미가 같은 조각품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은사님께서 원형이론이란 신화시대의 문화형태를 해석하는 데는 유용하겠지만 자연철학시대나 인간시대까지 연장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하신다.

“그리스도 마찬가지지만 보통 3단계, 즉 신화시대, 자연철학시대, 인간시대로 나누지요. 앞에서 아키타이프를 설명할 때 신화시대를 얘기했지요. 월식(月蝕)이라는 단어를 볼 때 밥 식(食)자 옆에 벌레 충(?)잡니다. 옛날사람들은 갑자기 해나 달이 패이거나 조그맣게 보이면 우주에 거대한 괴물이 있어서 그걸 파먹었거나 큰 벌레가 먹어서 그런 현상이 온다고 생각한 거지요. 이것도 동서양이 거의 비슷해요. 그러니까 신화시대 때는 문자도 없고, 통신도 없고 문명이라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던 그런 시대에는 벼락치고, 태풍불고, 몇 달씩 계속 가뭄이 들고 하는 이런 천재지변에 대해서 누구도 알 수 없었지요. 또 조금 전까지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죽어요. 그리고 죽으면 살아나지도 않지요. 그래서 하늘의 노여움 같은 것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점복주술을 발전시켜 나가게 되는데 이게 신화시대의 특징이에요.”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시대 때 소 발톱에 칠을 한 뒤 변화를 보고 길흉화복을 점쳤다고 하는데 이런 문화형태가 바로 점복일 것이고, 주술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샤먼의 술법일 터이다.

“신화시대 이후 자연에 대한 연구가 일어났지요. 철학자들이 우주의 원리가 공기에 있느냐, 불에 있느냐, 물에 있느냐, 흙에 있느냐 등등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자연철학시대라고 해요. 한편, 신화시대의 신화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에 처음으로 시작된 그 무엇이에요. 신화는 시작을 알려주는 거지요. 이전에 없었던 이야기의 시작이에요. 말하자면 박혁거세가 태어났는데 어머니한테서 태어난 게 아니고 알에서 나왔다고 하잖아요, 이런 이야기가 바로 신화지요. 인간의 자궁을 통해서 출산된 존재가 아니라는 거지요. 예수는 동정녀한테서 나왔고, 석가모니는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얘기들이 신화적 발상인 거지요. 이런 신화시대를 거쳐서, 자연의 원리를 연구하는 자연철학시대를 또 거쳐서, 인간이라는 게 뭐냐 하는 인간시대가 온 거예요. 인간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느냐, 정의롭게 사는 것이 무엇이냐, 인자하게 사는 것이 무엇이냐,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책임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의무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는 것이 윤리학이에요.”

노상카페 건너편 가게 TV에서는 조르바의 춤과 노래가 나오고 있다. CD를 구입하려고 했지만 일행 중에 누군가가 만류한다. 유튜브를 뒤지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한다. 춤추고 노래하는 조르바가 무척 행복하게 보인다. 문득 행복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조르바는 소설 속에서 마침내 모든 것이 좌절돼 버렸지만 개의치 않는다. 화자인 나는 절망하지만 조르바는 오히려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를 부른다. 두 팔을 들고 빙빙 도는 조르바의 춤이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어깨춤을 추는 원효의 무애춤과 너무도 흡사하다.

/글·사진=정찬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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