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 <53> 동진의 대장군 왕돈
사마예 왕씨 제거 반발 쿠데타 일으켜
왕돈(王敦, 256-324)은 낭야 왕씨 출신으로 자는 처중이다. 진무제 사마염의 사위로 양주자사를 지냈다. 낭사왕 사마예가 강남에 동진 정부를 세우는데 사촌인 왕도와 함께 참여했다. 후일 원제 사마예의 왕씨 제거 움직임에 반발해 쿠데타를 일으켜 동진 조정을 좌지우지 했으나 병사(病死)했다.
그는 명문 출신이고 황제의 사위로 혈기가 왕성하고 성격이 괄괄했다. 무제 사마염은 서진의 명사들을 모아놓고 기예(技藝)에 관해 논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이렇다한 기예에 관한 소양이 없어 묵묵히 앉아 있곤 하였다. 무제가 재주를 보여줄 것을 거듭 재촉하자 북을 연주하겠다고 하였다. 무제가 북을 가져다주자 박력있게 북치는 것을 시현해 좌중의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자신의 재주를 한껏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를 통일한 무제 치세에 귀족들의 사치 경쟁이 치열했다. 무제의 외숙 왕개, 사위 왕제와 석숭의 사치 행각은 특히 유명했다. 당대의 거부 석숭은 명사들을 자신의 별장인 원림에 초청해 주연을 자주 베풀었다. 화장실에 가면 손님들이 모두 옷을 벗었다. 악취가 옷에 스며드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초청받은 사람들은 가급적 화장실에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거만스럽게 시녀들로부터 응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후일 엉뚱한 일을 할 것이라고 사람들이 뒤에서 수근거렸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무제의 딸 양성공주인데 궁중의 관습에 따라 화장실에 가면 냄새를 맡지 않도록 대추로 코를 막게 하였다. 그는 그런 대추를 남김없이 먹었다고 한다. 이처럼 거칠게 행동한 것은 황족인 사마씨에게 지지 않으려는 낭야 왕씨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석숭은 연회 때마다 아름다운 시녀에게 손님의 술시중을 들게 하였다. 만약에 손님이 술을 다 마시지 못하면 그 손님을 시중 든 시녀의 목을 베었다. 어느날 왕도와 왕돈이 초대받았는데 왕도는 매번 억지로 술잔을 비웠다. 그러나 왕돈은 술잔 비우기를 세 번이나 계속 거부했다. 시녀 세명의 목이 잘렸음은 물론이다. 왕도가 이를 힐난하자 “저 사람이 자기 집 사람 죽이겠다는데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대답했다. 그의 당찬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로 세설신어(世說新語)에 기록되어 있다.
‘왕과 말이 천하를 공유한다’는 말처럼 강남으로 남하한 사마씨와 왕씨가 동진 정권을 지탱했다. 노련한 정치가인 왕도가 내각을 통할했고 왕돈이 군정대권을 장악했다. 그는 정남대장군과 형주목에 올라 병권을 좌지우지했다. 사실상 강주, 양주, 형주, 상주, 교주, 장주 등 6주의 군대를 휘하에 두었다. 원제는 왕씨를 견제하기 위해 측근인 유외와 조협 등을 중용했다. 왕도는 대세에 순응해 사마씨와의 갈등을 피하려 하였지만 그는 “강을 먼저 건넌 다음 다리를 부스는 격”이라며 앙앙불락했다. 원제는 대연을 정서장군에 유외를 진북장군에 임명해 양쯔강 상류지역을 장악한 그를 견제했다.
그는 쿠데타를 결심하고 명분을 찾았다. 참모인 사곤에게 “유외는 간악한 자다. 나라에 해를 끼치고 있어 이자를 제거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데 너의 생각이 어떠냐”고 하문했다. 사곤은 “유외는 화를 불러온 사람이지만 성곽에 사는 여우나 묘에 사는 쥐와 같다”고 답했다. 그들을 제거하기 어렵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제왕 곁에서 간신짓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성호사서(城狐社鼠)라는 고사는 여기서 유래했다.
322년 무창에서 난을 일으켰다. 동진의 수도인 건강을 공격해 주의, 대연 등 중신을 살해했다. 승상이 되었고 무창에 군대를 진주시키면서 조정을 멀리서 좌지우지했다. 323년 원제는 근심스럽고 분해 병이 나서 죽었다. 왕도가 유지를 받들었다. 태자가 즉위하니 명제다. 324년 그가 병이 들자 조정은 토벌군을 보냈다. 조정과의 싸움에 패한 왕돈은 “가문이 패했으니 세상일이 끝났다. 내 마땅히 억지로라도 가서 형세를 만들어야 한다”고 전쟁터로 나가려 하였으나 기력이 떨어져 병상에서 죽고 말았다. 사후에 동진 조정은 그의 시신을 부관참시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명문 출신이고 황제의 사위로 혈기가 왕성하고 성격이 괄괄했다. 무제 사마염은 서진의 명사들을 모아놓고 기예(技藝)에 관해 논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이렇다한 기예에 관한 소양이 없어 묵묵히 앉아 있곤 하였다. 무제가 재주를 보여줄 것을 거듭 재촉하자 북을 연주하겠다고 하였다. 무제가 북을 가져다주자 박력있게 북치는 것을 시현해 좌중의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자신의 재주를 한껏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왕과 말이 천하를 공유한다’는 말처럼 강남으로 남하한 사마씨와 왕씨가 동진 정권을 지탱했다. 노련한 정치가인 왕도가 내각을 통할했고 왕돈이 군정대권을 장악했다. 그는 정남대장군과 형주목에 올라 병권을 좌지우지했다. 사실상 강주, 양주, 형주, 상주, 교주, 장주 등 6주의 군대를 휘하에 두었다. 원제는 왕씨를 견제하기 위해 측근인 유외와 조협 등을 중용했다. 왕도는 대세에 순응해 사마씨와의 갈등을 피하려 하였지만 그는 “강을 먼저 건넌 다음 다리를 부스는 격”이라며 앙앙불락했다. 원제는 대연을 정서장군에 유외를 진북장군에 임명해 양쯔강 상류지역을 장악한 그를 견제했다.
그는 쿠데타를 결심하고 명분을 찾았다. 참모인 사곤에게 “유외는 간악한 자다. 나라에 해를 끼치고 있어 이자를 제거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데 너의 생각이 어떠냐”고 하문했다. 사곤은 “유외는 화를 불러온 사람이지만 성곽에 사는 여우나 묘에 사는 쥐와 같다”고 답했다. 그들을 제거하기 어렵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제왕 곁에서 간신짓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성호사서(城狐社鼠)라는 고사는 여기서 유래했다.
322년 무창에서 난을 일으켰다. 동진의 수도인 건강을 공격해 주의, 대연 등 중신을 살해했다. 승상이 되었고 무창에 군대를 진주시키면서 조정을 멀리서 좌지우지했다. 323년 원제는 근심스럽고 분해 병이 나서 죽었다. 왕도가 유지를 받들었다. 태자가 즉위하니 명제다. 324년 그가 병이 들자 조정은 토벌군을 보냈다. 조정과의 싸움에 패한 왕돈은 “가문이 패했으니 세상일이 끝났다. 내 마땅히 억지로라도 가서 형세를 만들어야 한다”고 전쟁터로 나가려 하였으나 기력이 떨어져 병상에서 죽고 말았다. 사후에 동진 조정은 그의 시신을 부관참시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