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밝힌노래]<7> 8·15와 '우리의 소원'-남북 함께 부르던 ‘우리의 소원’ 지금 우리의 소원은 소통
1947년 안석주·안병원 父子
3·1절 드라마 주제곡으로 발표
정부 수립 전엔 ‘통일’ 아닌 ‘독립’
89년 8·15 임수경 방북 때 히트
신냉전에 북에선 더이상 안 불러
3·1절 드라마 주제곡으로 발표
정부 수립 전엔 ‘통일’ 아닌 ‘독립’
89년 8·15 임수경 방북 때 히트
신냉전에 북에선 더이상 안 불러
![]() 1989년 7월23일 평양에서 ‘우리의 조국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에 나선 임수경 전대협 대표와 세계의 청년학생들.
〈임수경 전 국회의원 제공〉 |
노래에도 생명이 있다. 작사·작곡가에 의해 태어난 노래는 사람들의 입과 귀, 가슴에 의해 강력한 생명력을 얻게 되고, 또 그들의 입과 귀, 가슴에 따라 사그라진다. 사람이 ‘제각각’이듯 노래도 그렇다. 기구한 운명의 노래도 있다.
‘우리의 소원’.
“우리의 소원은 통일 / 꿈에도 소원은 통일 / 이 정성 다해서 통일 / 통일을 이루자 // 이 겨레 살리는 통일 / 이 나라 살리는 통일 / 통일이여 어서 오라 / 통일이여 오라”
한민족이면 누구나 아는 노래다. ‘애국가’보다 더 민족의 사랑을 받은 노래다. ‘애국가’는 남한에서만 불리지만, ‘우리의 소원’은 북한에서도 애창됐다.
하지만 최근 이 노래가 북한에서 금지곡이 됐다고 한다. 왜? ‘신냉전’의 결과다.
본래 이 노래는 1947년 3월1일 한국방송의 3·1절 특집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으로 발표됐다. 일제강점기 ‘천재예술인’으로 불린 안석주가 가사를 썼고, 당시 서울대 음악대학에 재학 중이던 그의 아들 안병원이 곡을 붙였다.
처음 발표될 때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 / 꿈에도 소원은 독립’이라는 가사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남북 분단이 기정사실화되면서 교과서에 노래가 실릴 때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가사가 바뀌었다.
남한에서만 불리던 이 노래는 1989년 임수경이 북한을 방문해 부른 이후 널리 퍼져 남북 모두 좋아하는 노래가 됐다. 남한에서 ‘이 정성 다해서 통일 / 통일을 이루자’는 2절 부분을, 북한에서는 ‘이 목숨 다바쳐 통일 / 통일을 이루자’라고 불러 남북의 가사가 조금 다르다. 정성을 다하든, 목숨을 다비치든, 남북 모두 통일의 소중한 가치와 염원을 노래하고 있다.
1989년 8월15일 오후 2시22분 판문점 군사분계선.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임수경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문규현 신부가 ‘선’을 넘었다. 6월21일 서울을 떠나 도쿄∼서베를린∼동베를린을 거쳐 열흘만에 평양에 도착한 길을 단 몇 초만에 넘은 것이다.
그 해 여름은 뜨거웠다. 임수경의 방북은 그보다 더 뜨거웠고 울림이 컸다. 남북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소원’은 히트곡이 됐다. 이후 남과 북이 만나는 장소면 어김없이 이 노래가 불리어졌다.
임수경 방북의 또 다른 성과는 판문점 귀환이었다. 금단의 선을 넘은 것이다. 고작 높이 7㎝, 너비 40㎝ 시멘트 경계였지만, 임수경은 그 것은 넘어온 첫 민간인이 됐다.
임수경은 “군사분계선은 어마어마한 철조망이나 콘크리트 장벽이 아니라 폭 50㎝정도의 낮은 시멘트 덩어리”라며 “이 선을 넘기 위해 그렇게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설움이 필요했나 생각이 들면서 감정이 북받쳤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녀는 또 “그 곳에도 사람이 있었다. 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대동강에는 강물이 흘렀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생지옥이라고 배웠는데, 그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전했다.
뜨거웠던 올 여름, 임수경이 걸었던 그 곳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최소 3개월 전 신청해 신원조회 등을 거쳐 결격사유가 없어야 관람이 허용되는 탓이었다. 대신 인근 도라산역, 도라전망대, 도라산평화공원, 제3땅굴 등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라산역은 남쪽의 마지막 역이다. 아니 북쪽으로 가는 첫번째 역이다. 도라산역에 그렇게 쓰여있다. ‘←서울 56㎞, 205㎞ 평양→’ 표지도 있다. 임진강역에서 열차를 타고 불과 5분거리다. 민간인 통제구역인 도라산역까지 끊겼던 경의선이 복구되는 데는 장장 52년이 걸렸다. 다시 도라산역을 출발해 개성∼평양∼신의주로 내달릴 날은 언제쯤 될런지….
도라전망대는 남측 최북단 전망대다. 이 곳은 민간인이 북한 생활상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개성 송악산, 김일성 동상, 개성공단 등을 망원경으로 볼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육안으로 김일성 동상이 보인다고 한다. 왼쪽에는 개성공단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북한의 최남단 마을인 ‘대성동마을’이 있다.
임진각관광지도 빼놓을 순 없다. 1953년 한국전쟁 포로 1만2773명이 북으로부터 귀환했다해서 명명된 ‘자유의 다리’와 21t의 육중한 무게로 평화와 통일의 염원을 담아낸 ‘평화의 종’, 2만명의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잔디언덕과 수상야외공연장 등으로 이뤄진 ‘평화누리공원’ 등이 있다. 또 1978년 발견된 총 길이 1635m, 폭 2m, 높이 2m의 제3땅굴이 있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3땅굴 안은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다.
판문점 아래 파주 헤이리예술마을에서 출판계 원로인 김언호 한길사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8·15는 새로운 출발”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매일 확성기 소리를 들으며 평화와 민족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파주는 평화의 절실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갈등과 긴장의 땅”이라며 “긴장 속에서 창조적 에너지가 나온다. 갈등과 긴장이 문화예술을 탐구하게 만들고, 그 문화예술은 곧 평화·생명의 노래다. 파주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파주는 서울보다 개성이 가깝다. 김문수 경기지사 시절 만화가들과 함께 점심은 개성에서, 저녁은 해이리에서 먹은 적이 있다”며 “개성에 점심 먹으러 가고 싶다”고 바랐다.
/파주 글·사진=박정욱기자
jwpark@kwangju.co.kr
‘우리의 소원’.
“우리의 소원은 통일 / 꿈에도 소원은 통일 / 이 정성 다해서 통일 / 통일을 이루자 // 이 겨레 살리는 통일 / 이 나라 살리는 통일 / 통일이여 어서 오라 / 통일이여 오라”
하지만 최근 이 노래가 북한에서 금지곡이 됐다고 한다. 왜? ‘신냉전’의 결과다.
본래 이 노래는 1947년 3월1일 한국방송의 3·1절 특집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으로 발표됐다. 일제강점기 ‘천재예술인’으로 불린 안석주가 가사를 썼고, 당시 서울대 음악대학에 재학 중이던 그의 아들 안병원이 곡을 붙였다.
남한에서만 불리던 이 노래는 1989년 임수경이 북한을 방문해 부른 이후 널리 퍼져 남북 모두 좋아하는 노래가 됐다. 남한에서 ‘이 정성 다해서 통일 / 통일을 이루자’는 2절 부분을, 북한에서는 ‘이 목숨 다바쳐 통일 / 통일을 이루자’라고 불러 남북의 가사가 조금 다르다. 정성을 다하든, 목숨을 다비치든, 남북 모두 통일의 소중한 가치와 염원을 노래하고 있다.
1989년 8월15일 오후 2시22분 판문점 군사분계선.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임수경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문규현 신부가 ‘선’을 넘었다. 6월21일 서울을 떠나 도쿄∼서베를린∼동베를린을 거쳐 열흘만에 평양에 도착한 길을 단 몇 초만에 넘은 것이다.
그 해 여름은 뜨거웠다. 임수경의 방북은 그보다 더 뜨거웠고 울림이 컸다. 남북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소원’은 히트곡이 됐다. 이후 남과 북이 만나는 장소면 어김없이 이 노래가 불리어졌다.
임수경 방북의 또 다른 성과는 판문점 귀환이었다. 금단의 선을 넘은 것이다. 고작 높이 7㎝, 너비 40㎝ 시멘트 경계였지만, 임수경은 그 것은 넘어온 첫 민간인이 됐다.
임수경은 “군사분계선은 어마어마한 철조망이나 콘크리트 장벽이 아니라 폭 50㎝정도의 낮은 시멘트 덩어리”라며 “이 선을 넘기 위해 그렇게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설움이 필요했나 생각이 들면서 감정이 북받쳤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녀는 또 “그 곳에도 사람이 있었다. 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대동강에는 강물이 흘렀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생지옥이라고 배웠는데, 그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전했다.
뜨거웠던 올 여름, 임수경이 걸었던 그 곳을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최소 3개월 전 신청해 신원조회 등을 거쳐 결격사유가 없어야 관람이 허용되는 탓이었다. 대신 인근 도라산역, 도라전망대, 도라산평화공원, 제3땅굴 등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라산역은 남쪽의 마지막 역이다. 아니 북쪽으로 가는 첫번째 역이다. 도라산역에 그렇게 쓰여있다. ‘←서울 56㎞, 205㎞ 평양→’ 표지도 있다. 임진강역에서 열차를 타고 불과 5분거리다. 민간인 통제구역인 도라산역까지 끊겼던 경의선이 복구되는 데는 장장 52년이 걸렸다. 다시 도라산역을 출발해 개성∼평양∼신의주로 내달릴 날은 언제쯤 될런지….
도라전망대는 남측 최북단 전망대다. 이 곳은 민간인이 북한 생활상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개성 송악산, 김일성 동상, 개성공단 등을 망원경으로 볼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육안으로 김일성 동상이 보인다고 한다. 왼쪽에는 개성공단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북한의 최남단 마을인 ‘대성동마을’이 있다.
임진각관광지도 빼놓을 순 없다. 1953년 한국전쟁 포로 1만2773명이 북으로부터 귀환했다해서 명명된 ‘자유의 다리’와 21t의 육중한 무게로 평화와 통일의 염원을 담아낸 ‘평화의 종’, 2만명의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잔디언덕과 수상야외공연장 등으로 이뤄진 ‘평화누리공원’ 등이 있다. 또 1978년 발견된 총 길이 1635m, 폭 2m, 높이 2m의 제3땅굴이 있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3땅굴 안은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다.
판문점 아래 파주 헤이리예술마을에서 출판계 원로인 김언호 한길사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8·15는 새로운 출발”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매일 확성기 소리를 들으며 평화와 민족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파주는 평화의 절실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갈등과 긴장의 땅”이라며 “긴장 속에서 창조적 에너지가 나온다. 갈등과 긴장이 문화예술을 탐구하게 만들고, 그 문화예술은 곧 평화·생명의 노래다. 파주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파주는 서울보다 개성이 가깝다. 김문수 경기지사 시절 만화가들과 함께 점심은 개성에서, 저녁은 해이리에서 먹은 적이 있다”며 “개성에 점심 먹으러 가고 싶다”고 바랐다.
/파주 글·사진=박정욱기자
jw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