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양림동 강경선씨] 안주하기 싫어 떠난 삶 ‘일장춘몽’ 같아
산후 우울증에 갓난 아이 두고 나홀로 파독 감행
일본 간 남편·한국의 아들, 3년 뒤 독일서 재회
독일 국적 취득에 혼란스러워 한 아들, 모국으로
가장 멋진 곳서 눈 감고픈 경선은 영혼의 방랑자
2016년 07월 28일(목) 00:00
장례식이 진행되는 내내 작은 촛불이 망자 곁에서 멍하니 타오르고 있었다. 촛불의 광채는 액자 속 망자의 얼굴을 넘나들고 다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생의 길에서 그가 만나온 존재들이 촛불 앞에서 어른거렸다. 그 옆에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 단아한 모습의 미망인이 망자와의 기억을 더듬는 듯 흐느끼고 있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깔리고 태양빛이 흩어지는 저녁이 되었다. 별빛이 바람에 스치운 날이면 더욱 남편이 그리웠고, 밤은 갖가지 추억을 몰고 왔다.

“2, 3일 짧은 여행을 하고 돌아와 현관을 들어설 때면 문득 허전함이 몰려와요. 언제나 남편이 마중 나왔는데……. 이제 또 혼자군요.”

파독 간호사 강경선(72세)은 44년 전, 굳어지고 안주하는 삶이 싫어 한국을 떠났다. 광주 남구 양림동에서 태어난 그녀는 고3 때 어머니를 먼 곳으로 떠나보냈다. 어머니는 생의 마지막을 전주 예수병원에서 머물렀다. 어머니 병수발을 들던 경선은, 이후 이 병원에서 운영하는 전주 예수간호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병원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지만, 당시 간호사가 되면 미국이나 캐나다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어릴 때 경선은 성악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레슨도 받아야 하고 그녀의 가정 형편에서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2남 4녀 중 장녀였기 때문에 어머니 대신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간호학교 졸업 후 광주 제중병원(현 광주 기독병원)에서 결핵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했다. 이상하게 전염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던 경선은 마스크도 쓰지 않고 환자들을 돌볼 정도였다. 하지만 너무 무리한 탓인지 덜컥 결핵에 걸렸다. 1년 6개월 간의 치료기간이 필요했고, 전주 예수병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전주에서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내던 교회 청년 박영실과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고, 둘은 결혼했다. 홀로 계시는 시어머니를 모셨고, 아이도 생겼다.

“아이를 낳은 후 산후 우울증이 덮쳐왔어요. 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자꾸만 회의감이 드는 거예요.”

어느 날, 애에게 젖 물리는 것도 싫어 아무도 몰래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서 늦은 시간에 들어온 적이 있다. 그 와중에 시어머니와 남편이 경찰에 실종신고를 냈고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 당시 경선에게는 출구가 절실했다. 그녀를 구원한 것은 신문에 난 광고였다.

‘파독 간호사 모집’

이대로는 미칠 것 같아 무조건 지원서를 제출했다. 한동안 설렜고, 설레는 동안 두려웠다. 합격소식을 전하자, 남편은 ‘아녀자가 어린 아이를 놓고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며, 나와 헤어질 생각하고 독일에 가라’는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경선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여러 번 일촉즉발의 전쟁이 이어졌다. 결국 침묵을 지키던 시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네가 정 원한다면, 가서 먼저 자리를 잡고 네 남편도 유학을 하면 좋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곳에 가서 포기할 것 같으면 지금 그만 두거라.”

시어머니의 단호한 말에 오히려 경선은 용기를 얻었다.

1972년 드디어 비행기에 올랐다. 막상 독일 병동의 삶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지독한 외로움이 덮쳐왔다. 경선은 처음으로 지상에서 혼자 남은 듯한 상실감에 휩싸였다. 게다가 동료들 사이에서 의사표현을 못할 때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오해를 하고 팀장 간호사에게 따지곤 했다. 열등감과 상실감이 저울추처럼 경선을 휘둘렀고, 그렇게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 한국에서 소식이 왔다.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던 남편이 선박건축 일자리가 생겨 일본으로 직장을 옮겼다는 것. 겁이 덜컥 났다.

“독일 와서 늘 아이가 생각났어요. 남편이 떠난다니 아이 걱정이 되더군요. 그땐 다 집어치우고 내 삶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했죠.”

간호부장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3년 계약을 하고 왔기에 중간에 돌아가면 비행기표와 어학원 비용을 다 돌려줘야 한다는 것. 당시 1년을 꼬박 일해도 벌 수 없는 큰 돈이었다. 경선은 3년이 딱 되는 시점에 한국에 돌아가야겠다 생각하고 미친 듯이 일에 몰입했다. 2년이 지나니 귀도 틔였고, 조금 살 만해졌다. 3년째에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보다는 가족을 데려오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당시에는 아이를 데려오는 선례가 없었다. 힘든 절차를 거쳐 3년이 되던 해 아이를 데려올 수 있었다. 가족을 초청한 것은 당시 베를린 한인 간호사 중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 아이가 날 못 알아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엄마,라고 부르며 달려오더군요. 얼마나 눈물이 복받치던지.”

그동안 할머니가 아이에게 엄마 얼굴을 잊지 않도록 늘 사진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75년에 온 가족이 상봉했다. 가슴으로 아내를 그리워했던 남편은 결국 경선이 사는 독일로 왔다. 경선의 부추김 속에 남편은 베를린의 기술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가장이었던 남편은 무게감 때문에 1년 후 학교를 그만 두었고 독일의 유수 회사인 ‘쉰들러’에 입사했다.

경선은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위해 98년 돌아가실 때까지 매달 돈을 송금했다. 6·25 때 남편을 잃고 홀로 자식들을 키워 온 시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였다.

경선의 아들은 독일 삶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 아이와 함께 버스를 탔는데 의자 앞에 ‘슈바르츠 라우스(검은색(유색인종) 나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경선은 고개를 푹 숙인 아이에게 ‘독일 사람도 한국에 살면 외국인이다. 너는 독일 말과 한국 말 두 개 언어를 할 줄 알잖니!’라고 달랬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선의 가족은 독일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고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 그것을 알게 된 당시 십대였던 아들이 심각하게 물었다. ‘왜 독일 국적으로 바꾸었는지. 왜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고 바꾸셨냐’고 역정을 내었다. 급기야 한국에 가서 잠깐 살아보고 국적 변경을 고려하겠다고 했다. 이후 한국에 있는 대학에서 1년간 언어 연수를 했다. 당시 아들은 독일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던 수재였다.

“한 번은 한국에 있는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한국 사회는 서열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자신이 직접 친척을 찾아보니 52명이 되더래요.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잘 못 했는지 깨달았다고 구구절절 썼더군요.”

한국어를 더 잘하기 위해 한문을 배우고, 근현대사를 더 알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아들은 잠시 독일로 돌아온 후 한국에서 살겠다고 다시 짐을 쌌다. 지금 아들은 한국 기업에서 중견 간부로 일하며, 독일에서 유학한 첼리스트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한국에서 살고 있다.

경선은 자신이 떠나왔던 고국으로 아들이 돌아간 것이 마치 자신이 긴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처음에 독일에 왔던 순간처럼 다시 혼자가 된 경선. 독일 삶이 마치 봄날의 낮 꿈 같다고 말했다.

일흔이 넘은 경선의 꿈은 세계 일주를 하다가 그중 가장 멋진 곳에서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길 위에서 마지막 쉼을 갖고 싶다는 그녀는 분명 영혼의 방랑자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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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취재 지원으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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