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명음사] 지지∼익 추억의 LP 다시 돈다
클래식 사랑하던 이선호 사장
충장로 美 공보원 동호회 활동
2016년 04월 06일(수) 00:00
LP 음반을 사던 시절이 있었다. 충장로에 나오면 레코드 가게를 순례하는 게 작은 즐거움 중 하나였다. 여러 가게 중 자주 드나들던 곳은 충장로 1가 입구 사모아 레코드. 클래식, 가요, 팝송 등 다양한 음반들을 구매했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레코드 가게에선 편집 테이프를 만들어줬다. 좋아하는 곡 리스트를 주면 ‘멋진 나만의 테이프’를 가질 수 있었다. 라디오 음악 프로에 나오는 노래를 녹음하다 장황한 DJ 멘트에 한숨 쉬던 이들에게는 요긴했다. 음반 가게마다 자체 선곡해 제작해 놓은 테이프가 딱 마음에 들 때면 하나씩 구입하기도 했다.

음원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다. 유명 가수들도 정규 앨범을 내놓는 게 어렵다. 미니앨범도 귀하고 싱글이나 음원 발매만 하는 경우도 많다. 레코드 가게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광주시 동구 남동성당 옆 ‘명음사’에 들어서자 청아한 이선희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구레코드가 2005년 발매한 히트곡 앨범 수록곡들이다. 오디오와 오래된 테이프, CD, LP가 한데 놓인 가게는 조금 어수선하다. 벽면엔 ‘피아노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 사진이 걸려 있다. 백전노장 70대의 아르헤리치가 각인된 나에겐 강한 기운을 발산하는 젊은 시절 흑백 사진이 인상적이다. 정명훈의 젊은 시절 지휘 모습, 마리아 칼라스 사진도 눈길을 끈다. 클래식 음반 명가 ‘성음’에서 제작한 달력과 포스터를 액자로 만들어 둔 것들이다.

명음사는 1980년 문을 열었다. 회사원이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하던 이선호(70)씨는 서울에서 레코드 가게를 잠시 운영하다 현 동부경찰서 옆에 가게를 열었다. ‘이름 있는 음악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명음사(名音社)’로 이름을 붙였다.

몇개월 후 옮겨간 곳이 양영학원 옆이었다. 인근에서 두차례 더 자리를 옮긴 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사가 시작돼 현재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가장 호황을 누린 건 양영학원 건물 1층에 자리했을 시절이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30여개 음반 가게가 참여하는 협회가 있어 한달에 한번 모임을 갖고는 했다. 가게는 충장로에 모여 있었다. 지금도 영업중인 25시 음악사를 비롯해 광주소리사, 사모아 레코드, 금성사 등이 대표적이었다. 빅토리 레코드사, 금성레코드사, 대광레코드 등 도매점도 많았지만 지금은 거의 문을 닫았다. LP 시대가 지나고 CD 시대가 오면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LP 시대 땐 음악적으로 좋은 작품들이 참 많이 나왔습니다. 팝송이 80%, 가요가 20% 정도 차지했었죠.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불법 해적판들이 많았었는데 라이센스 계약이 이뤄지고 문공부가 단속을 강화하면서 가요 앨범이 약진하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LP 시대엔 팝과 가요가 절반 정도였는데 CD 시대엔 가요 일색이 됐죠. ‘빌리진’ 등이 담긴 마이클 잭슨 ‘스릴러’ 음반은 참 많이 팔았어요. 디스코 음악이 유행할 때까지 음반이 잘 팔렸어요. CD가 나오면서 판매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가 등장하고, 음원 시대가 되면서 장사하기는 더욱 힘들어졌죠.”

아쉽게도 현재 신작 앨범 판매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대신 명음사에 가면 ‘보물 찾기’ 하는 기분이 든다. 오래된 CD와 낡은 LP들 틈새에서 내가 찾던 음반과 딱 마주했을 때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명음사는 LP 음반 5000장을 구비하고 있다. CD 시대가 되면서 소매업소들은 LP 음반을 모두 제작사로 반품했지만 이씨는 일부를 남겨뒀다. 누군가 필요로 하면 판매하고, 그렇지 않다해도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해온 음반들이었기에 쉬 돌려 보낼 수 없었다. 몇년 전부터 불어닥친 LP 수집 붐은 그에게 작은 즐거움을 주고 있다. 가끔 전국에서 LP를 수집하는 이들이 찾아오곤 한다. 많이 찾는 음반은 송창식 등 1970년대 포크 음반과 배호 음반, 이난영·한복남·김정구 등 1950년대 후반 음반들이다. 존 바에즈, 돈 맥클린 음반도 인기가 많고 무엇보다 고(故) 김광석 음반은 많은 이들이 찾는다.

“이런 시대가 올줄은 몰랐죠.(웃음) LP 수집가들은 전국 음반 가게들을 순회해요. 1960∼70년대 팝을 들었던 사람들은 LP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로 돌아가는 추억을 느끼시는 듯합니다. 아날로그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잖아요. 디지털 소리와 달리 풍부하고 부드러운 맛을 느낄 수 있거든요.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테이프 천여 개는 제작사에서 반품을 받아주지 않아 그대로 남겨뒀다. 가게 맞은편 버스 정류장에서 바라보면 테이프가 꽂힌 진열장이 그대로 보여 가끔 고객들이 들어와 사 가고는 한다.

아르헤리치 사진을 보고 주인장이 클래식에 관심이 많지 않을까 싶었는데 딱 맞았다.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그는 1학년 때부터 지인 소개로 클래식 음악 모임 ‘무사이 음악 감상회’에서 활동했다. 충장로 미 공보원에서 진행된 음악감상회에는 성악가 박계, 강양은씨 등도 참여하곤 했다.

“충장로에서 가방 가게를 운영하던 이상옥씨가 해설을 했는데 그 양반이 이론에도 밝고 충실한 음악 해설로 유명했습니다. 서울 음악 감상팀들도 해설을 들으러 오고는 했죠. 당시 무등극장을 빌려 오페라 ‘카르멘’ 전곡 감상회를 연 기억도 납니다. 자료를 일일이 등사해서 해설 책자를 만들어 판매도 했죠. 이후 미 공보원에서 나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다방을 돌아다니며 감상회를 이어갔어요. 2000년대 들어서는 금호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안철 선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정말 클래식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거든요.”

그가 좋아하는 클래식 아티스트는 테너 스테파노와 소프라노 조안 서덜랜드다. 가수 팻분, 앤디 윌리엄스, 김도향이 소속된 ‘투코리언스’도 좋아한다. 합창곡에 관심이 많은 그는 교회 성가대에서 지휘도 하고 ‘부르세 남성합창단’에서도 활동하기도 했다.

최근 그에는 또 다른 즐거움이 생겼다. 한창 일할 때보다 시간 여유가 생기다 보니 오디오쪽에 관심을 갖게 됐다. 빈티지 오디오에 관심이 많은데 이것 저것 조합해 보고, 손님들에게도 권하기도 한다.

사진 기자가 LP 음반을 촬영하는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므라빈스키가 지휘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음반, 정경화의 앳된 모습이 담긴 음반, 배호 히트곡 음반, 작곡가 길옥윤이 직접 노래 한 음반, 한국인들에게 유달리 인기가 많았던 이탈리아 밀바와 그리스 나나 무스쿠리 음반 등등.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주인장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양영학원 앞 카페 톰스캐빈에 다녔던 시절, 가끔 들르고는 했었으니까.

“아들 둘 다 키워 손자들까지 봤어요. 큰 욕심 없이 취미로, 소일거리로 하고 있으니 가능하지 요즘 레코드 가게를 운영한다는 건 어려워요. 최근엔 LP 음반을 찾는 이들이 꾸준히 늘어 LP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공간을 한번 만들어 볼까 싶은데 쉽게 엄두가 안나네요.”

LP판을 사이에 두고 옛날 추억을 떠올리니, 오랜만에 시간여행을 떠난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줘버린 LP 앨범도 생각나고.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사진=최현배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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