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의 '그림생각' (142) 설국
마냥 좋아할 수 만 없는 오늘의 설경
2016년 01월 28일(목) 00:00
양인옥 작 ‘동복’(1994년 작)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소설의 첫 문장만으로도 기억 속에 오래도록 새겨질 가와바다 야스나리(1899∼1972)의 소설 ‘설국’은 이렇게 시작된다. 작품 속 배경을 직접 가보기 전까진 “같은 일본 땅일 텐데 ‘국경의 긴 터널…’이라는 표현은 과장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수년 전, 니가타현 유자와를 가기 위해 10km가 넘는 시미즈 터널을 통과하고 나서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 걸 보고 정말로 국경을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소설 속 ‘설국’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주가 그랬다. 내리고 또 내리는 눈으로 남도 땅은 ‘설국’이 되었고, 하늘과 지상과 바다는 꽁꽁 얼어붙었다. 눈 내리는 풍경을 마냥 좋아할 수만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눈 덮인 백색의 산하는 그렇게 우리를 또 다른 세상으로 이끌었다.

동서고금의 많은 화가들이 화폭에 겨울 이야기를 풍부하게 묘사해 온 것을 보면 화가들에게도 겨울 풍경은 반가운 모티브였던 것 같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왔고, 아카데믹한 구상화풍의 작품 세계를 일관되게 보여주었던 화가 양인옥(1926∼1999)의 설경 예찬도 유명하다. 설경에 취해 겨울 산야를 누비고 다니면서 스케치하느라 눈밭의 강력한 자외선 반사광에 의해 시력이 손상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작품 ‘동복(同福)’(1994년 작)은 화가가 만년에 화순 동복에 집을 짓고 그림을 그렸던 마을의 겨울 풍경이다. 소담하게 내린 눈은 마을 뒷산을 하얗게 칠해 병풍처럼 세워두고, 마을과 집과 나무도 겨울 적막 속에 갇혀있다. 청회색조의 눈빛이 겨울 햇살에 반사된 듯 눈부시다.

호남대 미대학장과 총장을 역임하는 등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던 화가는 누드를 통해 인체의 순수미를 추구해 온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관능미만을 연상하기 쉬운 여체를 성스럽고 아름다운 대상으로 혹은 원초적인 자연의 일부로 묘사하면서 인간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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