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로 사는 월요일 풍경
고 성 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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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점심을 먹으면서 지인이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말해 크게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조금은 바쁘다. 40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왔더니 직장동료나 친구들이 서운하다며 밥 먹자고 해 저녁이면 술자리가 잦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백수는 백수일 뿐이다. 백수(白手)는 말 그대로 ‘빈손’이지 ‘백수(百獸)의 왕’이 아니라는 얘기다. 더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는 아주머니가 반바지만 입고 쓰레기봉지를 들고 있는 광경을 낯설어 하거나 새벽같이 깨 세수까지 하고서야 출근이 필요 없는 퇴직자라는 걸 깨닫는 안타까운 존재일 뿐이다.
백수가 되고나니 신난 사람은 아내다. 부려먹기 안성맞춤인 인간이 하나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다. 일요일이면 늘 같이 했던 청소를, 운동이 부족하니 푸른 길을 걷자는 이유로 슬그머니 그만두었다. 허 참. 그런 다음, 슬쩍 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간다며 슬며시 나를 쳐다본다. 못 본 척 하면 ‘아이고, 무거워라.’라는 말을 연발한다. 그 정도면 어쩔 수 없잖은가. 밥은 먹어야 살고 용돈도 있어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 체면 좀 깎이면 어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나도 받을 건 받아야 한다.
일요일에 하는 일도 배가 되었다. 보통 2주에 한 번 아이들에게 반찬을 만들어 보내곤 했는데 백수가 되고나니 이제 매주 보내는 것이다. 내 할 일이 없다면 횟수야 나와 무관하겠지만 일이 그렇지 않다. 우선 장보기를 따라다녀야 한다. 아이들에게 나물이 좋다며 이것저것 뒤적거리고 깨물어 본 뒤에야 바구니를 들고 있는 내게 담으라는 시늉으로 내민다. 다음엔 국거리를 그렇게 사고, 이어 지짐용 계란과 탕으로 쓸 닭이나 오리를 들고 내민다. 족히 한 시간은 소비한 뒤에야 장보기가 끝난다. 백수? 아무나 할 짓이 아니다.
그 다음이 더욱 가관이다. 집에 도착한 다음에는 음식을 같이 하자고 조른다. 이것저것 채소를 꼼꼼하게 씻어 ‘승인’을 받고 물이 빠지도록 놓아둬야 한다. 여사님은 그동안 양념을 만들고 계란을 깨 전을 부칠 수 있도록 파와 햄 등을 갈아 섞는다. 그런 다음 내가 씻어놓은 시금치, 깻잎, 콩나물, 고사리, 얼갈이배추 등을 끓는 물속에 넣고 데치기 시작한다. 야채 씻기를 힐끔거리며 재촉하던 여사님께서 이내 그 일을 끝낸 내게 계란말이 전을 부치도록 요구한다. 계란말이는 오래전부터 내 몫이었다. 이거 대충하면 금방 표가 난다. 첫째, 약한 불로 맞춰놓고 끈기를 갖고 천천히 해야 한다. 센 불에는 곧잘 타지기 때문이다. 둘째, 전의 건더기를 긁어 훑어 내리면서 꼬부려 겹치고 눌러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겹쳐진 부분의 내용물이 설익는다. 따라서 적은 양이라도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
늦은 점심 후에 시작하면 대개 저녁이 돼서야 끝나고 몸은 파김치가 된다. 목욕이라도 하고나면 저녁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쉬고 싶어진다. 피곤하기는 여사님도 마찬가지. 그동안 각종 나물을 된장에 무치거나 기름에 볶고, 탕과 국을 끓인 다음 그 것들을 욕조에 찬 물을 받아 식혔으니 노고가 적지 않은 터라 타박할 수도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공동의 작업이니 ‘똥 뀐 놈이 성내는 척’ 아내에게만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백수의 이름으로 월요일을 시작하면서 그 거룩한 이름 때문에 차마 뿌리칠 수 없는 일들이 생겨났다.
자, 월요일 오전 백수 몫의 일정을 간추려보자. 06:30 아내를 깨운다. 07:30 아내의 출근을 배웅한다. 08:00 아이들의 음식을 당일 택배로 부치기 위해 반바지를 입은 채 박스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에 내려 차에 오른다. 출근시간이라 교통체증이 심하다. 우체국 앞에서 주차경쟁을 벌인다. 무게를 달고 돈을 지급한다. 10:00 아침 설거지를 시작한다. 10:30 어제 하지 않은 청소를 시작한다. 먼저 물수건으로 위로부터 아래로 닦아 내린다. 이어 청소기로 구석구석의 먼지를 흡입한다. 마지막 물걸레로 온 방바닥을 닦는다. 12:00 더워 죽을 지경이어서 찬물로 샤워한다. 12:30 국에 말아 점심을 간단히 때운다. 대충 이렇다.
서울에서 편하게 넙죽넙죽 받아먹는 놈들이 내 자식이니만큼 형식적으로나마 자진해서 매주 하는 모양이 됐다. 그래, 많이 움직이면 오래 산다더라. 여사님께서 내가 오래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게 아닌가. 더운 날씨에 열 내지 말자. 나만 손해다. 백수가 좋다며 머, ‘화려한 백수’라고? 또 그것도 줄여 ‘화백’이라고 하시는 분들, 정말 한 번 해보시고 말씀들 하시길. 허허허.
그 다음이 더욱 가관이다. 집에 도착한 다음에는 음식을 같이 하자고 조른다. 이것저것 채소를 꼼꼼하게 씻어 ‘승인’을 받고 물이 빠지도록 놓아둬야 한다. 여사님은 그동안 양념을 만들고 계란을 깨 전을 부칠 수 있도록 파와 햄 등을 갈아 섞는다. 그런 다음 내가 씻어놓은 시금치, 깻잎, 콩나물, 고사리, 얼갈이배추 등을 끓는 물속에 넣고 데치기 시작한다. 야채 씻기를 힐끔거리며 재촉하던 여사님께서 이내 그 일을 끝낸 내게 계란말이 전을 부치도록 요구한다. 계란말이는 오래전부터 내 몫이었다. 이거 대충하면 금방 표가 난다. 첫째, 약한 불로 맞춰놓고 끈기를 갖고 천천히 해야 한다. 센 불에는 곧잘 타지기 때문이다. 둘째, 전의 건더기를 긁어 훑어 내리면서 꼬부려 겹치고 눌러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겹쳐진 부분의 내용물이 설익는다. 따라서 적은 양이라도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
늦은 점심 후에 시작하면 대개 저녁이 돼서야 끝나고 몸은 파김치가 된다. 목욕이라도 하고나면 저녁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쉬고 싶어진다. 피곤하기는 여사님도 마찬가지. 그동안 각종 나물을 된장에 무치거나 기름에 볶고, 탕과 국을 끓인 다음 그 것들을 욕조에 찬 물을 받아 식혔으니 노고가 적지 않은 터라 타박할 수도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공동의 작업이니 ‘똥 뀐 놈이 성내는 척’ 아내에게만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백수의 이름으로 월요일을 시작하면서 그 거룩한 이름 때문에 차마 뿌리칠 수 없는 일들이 생겨났다.
자, 월요일 오전 백수 몫의 일정을 간추려보자. 06:30 아내를 깨운다. 07:30 아내의 출근을 배웅한다. 08:00 아이들의 음식을 당일 택배로 부치기 위해 반바지를 입은 채 박스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에 내려 차에 오른다. 출근시간이라 교통체증이 심하다. 우체국 앞에서 주차경쟁을 벌인다. 무게를 달고 돈을 지급한다. 10:00 아침 설거지를 시작한다. 10:30 어제 하지 않은 청소를 시작한다. 먼저 물수건으로 위로부터 아래로 닦아 내린다. 이어 청소기로 구석구석의 먼지를 흡입한다. 마지막 물걸레로 온 방바닥을 닦는다. 12:00 더워 죽을 지경이어서 찬물로 샤워한다. 12:30 국에 말아 점심을 간단히 때운다. 대충 이렇다.
서울에서 편하게 넙죽넙죽 받아먹는 놈들이 내 자식이니만큼 형식적으로나마 자진해서 매주 하는 모양이 됐다. 그래, 많이 움직이면 오래 산다더라. 여사님께서 내가 오래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게 아닌가. 더운 날씨에 열 내지 말자. 나만 손해다. 백수가 좋다며 머, ‘화려한 백수’라고? 또 그것도 줄여 ‘화백’이라고 하시는 분들, 정말 한 번 해보시고 말씀들 하시길. 허허허.